살다 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맹수의 포효처럼, 소리를 질러 보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꼭 집어 화가 났거나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슴 밑바닥에 있는 에너지를 소리로 내뿜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냥 날숨 한번 쉬고 말았다. 아마 내가 그때마다 소리를 질렀다면 예전 같으면 미친 여자 소리를 들었을 테고 요즘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느 날 한참 유행하던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보았다. 늦은 저녁 무료함에 챙겨보던 프로였다. 때마침 지인이 아주 좋아한다던 장구 치며 노래 부르는 가수가 나왔다. 꽤 많은 팬이 있는 나름 인기가수였지만 나에게는 무명의 가수였다.
“장구의 신이 여기에 왜 나왔어. 오늘은 장구 안 가져왔나? 설마 장군이 칼을 안 가져왔겠어.” 마스터석과 대기석에서 웅성거리는 말이 거실까지 들려왔다.
사회자가 출연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행사장을 가면 장구 왔네. 장구재비네. 장구 치는 그 애라고 한다. 나는 ‘박서진’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장구 없이 (가수 박서진)을 알리고 싶어 나왔다.”
그는 여려 보이는 체구에 분홍색 조끼를 입고 마이크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나중엔 다리도 뻣뻣해져 보였다. 그럼에도 <붉은 입술>이라는 노래를 어찌나 애절하고 고운 음색으로 불러내는지, 나도 모르게 올 하트 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켜봤다. 올 하트를 받아 첫 관문은 통과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온몸을 달달 떨면서 마이크를 꼭 쥔 손과 눈물 가득 고였던 붉은 눈시울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인터넷과 유튜브를 헤매면서 그에 대해 알아보고 빠져들기 시작했다.
열세 살에 처음으로 동네 무대에 오른 그의 가정사는 슬펐다. 엄마의 암과 아버지의 당뇨, 49일 간격으로 하늘나라에 간 두 형 이야기로 가슴이 아팠다.
그가 출연했던 인간극장을 보면 열일곱이던 어느 날 거리 공연 후 “엄마, 사는 게 뭐 별거 있나. 안 아프고 욕 안 먹고살면 되지.”라며 애어른 같은 말로 아픈 엄마를 위로하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비록 각설이 무대에서 노래하지만, 최고의 트로트 가수를 꿈꾸며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부끄럽지 않다며 솔직하고 당당히 말한다. 그를 응원해야겠다는 보호 본능 같은 게 스멀스멀 올라왔다.
애절하고 테크니컬 한 귀한 음색과 리드미컬하면서 휘몰아치는 장구의 타법도 성장 과정과 난장판의 공연에서 습득되어 몸에 배었으리라. 찾아볼수록 가슴 아린 이야기가 많지만, 눈웃음이 매력적인 미소와 츤데레 같은 심성 뒤에 숨어버려서 애써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매일 그가 부르는 트로트를 따라 부르고 그의 영상을 찾아보며 그의 노래와 장구 장단에 맞춰서 허리춤을 흔들며 나 홀로 방구석 공연을 연출하고 즐겼다. 그러다가 이 애절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이 최고의 가수가 되도록 응원해야 한다는 나만의 당위성에 팬카페까지 가입했다. 콘서트를 보기 위해 속칭 피의 티켓팅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팬덤의 고유색인 노란색으로 내 물건들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그의 팬들은 노란색 옷과 모자, 신발 등 보이는 모두를 노랑으로 꾸미고 심지어 관광버스도 노란색과 그의 사진으로 래핑 하였다. 팬 들은 그가 가는 곳 어디든지 가서 응원한다. 그의 이름을 외치고 피켓을 흔들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를 전도한다. 너무도 합법적(?) 행동으로 발산하고픈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낸다.
문득 이런 행위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외로움과 고달프고 아팠던 나를 응원하고 치유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뿐 아니라 수많은 그의 팬들이 가수를 응원하는 것은 곧 자신들을 응원하고 스스로 치유하며 재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혼자서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고 소리 지르고 춤출 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지역민들을 위한 자리 양보하는 마음이면 된다. 그러기에 그의 팬들은 매주, 때로는 한 달에 오십여 회가 넘는 축제장에 서슴없이 따라나서는 것이다. 그러곤 가수님, 나의 왕자님 등 존칭을 쓰며 때론 행사장 정리를 도우며 가수의 위상을 높이려고 선행도 많이 하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종일을 창만 보며 보낼 때가 있었다. 주말 내내 현관문 한 번 열지 않고 멍하니 지내는 것은 예사로 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그의 기사를 검색하고 응원 댓글을 달고 있다. 주중이나 주말이나 그를 따라 행사장으로 달려가서 응원하고 즐긴다. 그를 봐도 봐도 또 보고 싶고 그가 궁금해진다.
한때는 아이돌 스타에 환호하는 젊은이들, 학생들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 서울까지 밤낮 상관없이 공연장을 찾던 고등학생 조카를 볼 때 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조카가 친구와 고모 집에서 자고 공연을 보겠다고 하면 흔쾌히 내 공간을 내어줄 것이다. 공부 잘하는 그 아이는 입시의 무거움을 그렇게 털어낼 것임을 알기에 조카의 덕질을 기꺼이 응원해 줄 것이다.
얼마 전 구례 산수유 축제 때 그의 팬 닻별(팬덤 명)들은 삼십여 대의 관광버스를 이용해 그를 응원하러 갔다. 산수유꽃보다 더 노란 물결이 그곳을 물들이며 나훈아가 작사해 준 그의 노래 <지나야>를 떼창하고 춤추며 지역 축제를 응원하고 그의 또 다른 방송 출연을 축하하며 서로에게 봄이 되어주었다. 그는 그토록 원하던 국민 가수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겨울이 다 지나가고 축제의 계절이 돌아왔다. 노년에 가수를 덕질하는 즐거움에 푹 빠진 나도 꽤 바빠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