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뜰에는 수목이 많았다. 날씨는 더웠지만 고목이 된 아기단풍나무는 꽃을 틔워서 씨앗을 만들고 있었다. 그 옆에서 청보라 고운 색을 뽐내는 도라지꽃도 뿌리를 단단히 키워내느라 햇볕을 유혹하듯 하늘거렸다.
국립 현대미술관에 전시된『한국 근현대 자수 전』을 볼 생각에 잰걸음으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그림 갓흔 자수」 「우주를 수건繡巾으로 삼아」 「전통미傳統美의 현대화」라는 이름을 붙여 미술관 4관을 꽉 채운 전시였다.
1관의 자수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하며 신비로웠다. 백번을 단련한 바늘이 아닌 천 번 만 번을 비단 천의 앞뒤를 드나들었을 바늘과 실의 노고였다. 이 자수들은 19세기 궁녀들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수놓은 궁수(宮繡)와 민간 여성이 제작한 민수(民繡)로 무명의 예술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흔히 기억하는 궁중 예복의 자수와 모란이나 무궁화 등 꽃으로 가득 채운 베갯모와 골무, 거기다 화조도 병풍까지 보다 보니 내 영은 잠시 과거로 향했다.
장롱 위 병풍 집에 숨어있다가 특별한 날 나오던 6폭짜리 병풍, 그 속에 있던 초충과 화조 수가 예뻐서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아버지의 베갯모에 있던 닳아서 수실이 너덜거렸던 모란도 잠깐 만났다. 그리고 늘 한쪽 벽을 가리고 있던 횃댓보도 스치듯 지나간다. 기억의 저편에서 아른거리는 아득한 과거와 함께 2관으로 갔다.
‘그림 갓흔 자수’란 이름을 단 2관에서는 우리나라 신여성을 대표할 만한 유명 예술인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오히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자수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당당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이었다. 나혜석, 천경자, 박래현 등은 1900년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여자미술 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자수 공부도 했다. 그 시절 딸을 일등 신부로 내세우고 싶었던 근대화 교육이 여성들을 엘리트로 만들었다. 그들은 신부 수업이길 바랐던 부모의 생각 과는 달리 경제적 자립과 사회활동에 참여하며 여성 지위 향상에 앞장서게 되었다. 자수 전이지만 나혜석의 그림「화녕전 작약」도 있었다. 몇 안 남은 귀한 작품이라 들었기에 유심히 보았다. 천경자의 「노부」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가르마 타서 쪽진 하얀 머리에 안경을 쓰고 곰방대를 물고 책을 보는 노인의 모습이 도도해 보였다. 사회의 편견 속에서도 자수, 그림, 글 등을 빛낸 훌륭한 솜씨를 보면 ‘이들의 천재적인 예술 감각은 어디까지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관에서는 「등꽃 아래 공작」이 기억에 남는다. 탐스럽게 핀 등꽃 아래 한 쌍의 공작이 있는 대형 병풍으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것이라 하는데 한 사람의 솜씨처럼 보였다. 화폭을 가득 채운 화려한 공작의 꼬리 깃털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윤기가 흘렀다. 작품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이때부터 우리 자수도 체계적인 수를 놓기 시작한 것 같다.
‘우주를 수건繡巾으로 삼아’란 주제로 전시된 3관에서 도슨트(해설가)를 만나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광복 후는 이화여대 미술 대학에서 자수 과가 설치되어 자수의 위상이 높아졌다. 우리의 자수가 전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추상적인 기법을 실험하고 나아갔던 시기라고 한다.
이번 자수 전의 대표 타이틀인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최유현작 1968년)은 비단에 추상화를 바탕으로 수를 놓았다. 타이틀을 거머쥔 작품이라 유심히 봤다. 새의 형태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여러 색으로 촘촘하게 빗살 무늬처럼 메운 실이 새의 깃털을 연상케 하고 힘차게 가로지르는 듯한 사선과 속도감이 비상하는 새처럼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줬다. 도슨트는 태양과 새는 자수일 수도 있고 관객일 수도, 우리의 자수를 알리려는 우리일 수도 있다고 했다. 3관에서는 우리의 자수가 분명하지만, 전통을 벗어난 여러 형태의 추상화를 바탕으로 한 자수가 많았다.
‘전통미傳統美의 현대화’라는 4관에서 발견한 놀라운 작품은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서 기록한 그림 「팔상도」(최유현 1987~1997)였다. 고향에 있는 고찰 벽면을 채운 팔상도를 본 적이 있다. 크고 웅장했지만, 색이 바래고 낡아서 자세히 인지하지 못했는데 자수로 보니 선명하고 화려한 색과 디테일에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작품 「나는 상처를 받았습니다.」(함경아 2009~2010)도 기억에 남는다. 대형 틀에 I'M HURT라고 중앙에 배치하고 해골과 섬뜩한 느낌의 추상적인 것들을 여러 가지 재료로 독특하고 파격적으로 표현했다. 작품 해석에 무지한 나는 솔직히 ‘자수에서 이런 표현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수하면 떠오르는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고정관념과 감성이 깨어졌다.
봐도 또 보고 싶은 작품들을 두고 미술관을 나오는데 머릿속을 맴도는 자수가 있었다. 「민들레」(엄정윤 1953년)와 「풀」(이강성 2022)이었다.
「민들레」는 흑갈색의 섬유에 수놓은 자수로 전통 자수의 모티브인 부귀영화도, 추상적인 것도 아닌 작가가 관찰한 것을 표현한 것인데 액자 속에서 민들레 홀씨가 날아갈 것만 같은 생동감이 들었다.
「풀」은 삼베에 백 년이나 된 금사로 수를 놓았다는데 소재는 귀하고 화려해도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은 듯했다.
다리 쉼을 위해 잠시 덕수궁 뜰의 벤치에 앉았다. 대각선 방향에 능소화 한 그루가 태양 색을 닮은 꽃을 달고 시선을 끈다. 마주 보이는 중화전을 보고 있자니 세월을 건너뛰어 자수를 놓는 옛 여인들이 상상된다.
옛 여인들은 원단 종류에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수놓으면서 壽福富貴를 비는 마음으로 자수에 정성을 들였을 것이다. 여염집 아낙네의 소박한 자수는 각자 솜씨대로, 그저 바늘 가는 데로, 마음대로 만들었을 것이다. 자수의 가치 같은 건 셈하지 않고 그저 소중하게 안방에서 사랑을 받거나 깊은 곳에 보관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지금에서야 뜻있는 이들에 의해 살펴지고 문화재적 가치로 인정받는 것 같다.
궁을 나오는데 이번 자수 전에서 세수수건이나 횃댓보 같은 서민들의 생활자수도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