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꽃 시장에 가서 아리잠직하고 마음을 끄는 식물을 집으로 데려오면서 말을 건넨다. 화분 속 식물이나 꽃은 처음엔 바짝 긴장한 듯이 겉잎을 떨어뜨리거나 시들시들 온몸을 웅크린다. 난 그들의 엄마가 되어 분갈이도 해주고 세심히 보살피며 마음을 나눈다. 거의 매일 들여다보고 말을 건넨다. 별말 아니다.
“잘 잤니, 오늘은 기분이 어때? 햇볕이 그리웠구나. 영양제 좀 줄까?”
이렇게 살피고 며칠 지나면 잎이 반짝거리고 생기가 돌아오는 게 보인다. 새로운 꽃봉오리가 맺히는 것을 발견하거나 잎이 커지는 것을 보며 가슴이 콩닥콩닥한다.
아마 그즈음부터 식물을 들이기 시작한 듯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마저 제 짝을 찾아 떠난 후 홀로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세월이 있었다. 하루 종일 현관문을 열지 않고 누군가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있는 물건을 향해 이야기하는 나를 발견했다. 냉장고, 텔레비전 등등, 차 한잔을 마주하고도 주절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이런 내가 겁이 났지만, 아픈 것이 아니야, 조금 외로울 뿐이라며 이때부터 식물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여행이라도 갔다 오면 식물 옆에서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눈다. 소곤소곤 귀엣말로 ‘그동안 잘 있었니. 엄마가 없어서 심심했지? 너 물 먹고 싶었구나.’ 하면서 화분의 흙을 고르고 오래된 잎도 따주고 말랐던 가지에 물을 주면서 다독여 준다. 그러면 식물들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전하듯 수줍게 꽃대 하나 쏙 내밀거나 색 바랜 잎사귀 하나 툭 떨군다. 그럴 땐 ‘그래그래, 알았다.’ 하면서 환기도 하고 좁은 베란다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햇살을 따라 자리를 옮겨준다.
어느 날 가을볕에 꽃보다 이쁘게 물든 다육식물을 보고 마음이 끌렸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다 다른 창 종류 다육식물, ‘복랑금’처럼 이름에 ‘금’이 붙는 몸값 비싼 아이들까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우리 속어에 얼굴값 한다는 말이 있듯이 다육식물도 특별히 예쁜 것은 어찌나 까다로운지 애만 태우다가 떠나보낸 것이 여럿 있다. 어느 날 친구와 이야기 나누다 화분이 몇 개나 되느냐 해서 백 개는 되는 듯하다 했더니 “너 미쳤니! 그 좁은 베란다에.”라고 했다. 사실 식물을 바라볼 때는 많다는 생각보다 그저 이쁘기만 했는데 백 개라는 말을 뱉고 보니 베란다에서 키우기에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사들이기를 멈추고 나눔도 하고 당근이란 사이트에 팔기도 했지만 줄어들지 않았다.
식물도 동물처럼 새끼를 낳는다. 떨어진 잎과 줄기, 가지에서도 새로운 싹이 생겨난다. 다육식물은 작고 태깔이 별로라 쓰레기 봉지에 던져 놓아도 오랫동안 시들지 않고 내 눈길을 붙잡는다. 살아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려서 또 화분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그해 여름엔 유난히 축축하고 후텁지근하게 느껴졌다. 날씨 탓인지 가슴 깊이 눌러둔 우울증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나왔다. 장맛비마저 나를 적시면서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는 듯한 날들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었다. 하루에 몇 번씩 베란다로 나를 불러내어 이야기하게 하던 어여쁜 식물들이 그냥 시퍼런 풀떼기로 보였다.
“자생력을 좀 키워봐. 비도 맞고 뜨거운 태양을 만나 짱짱하게 커야지”
물과 뜨거운 햇볕을 좋아하지 않는 그들에게 무시무시할 한마디를 핑계 삼아하고는 방임했다. 여름을 지나고 보니 몇몇 다육식물은 회생할 수 없는 무름병에 걸려서 죽고, 남은 것도 소수를 빼고는 햇볕에 타서 모양이 말이 아니었다.
‘자생력(?) 다 너 때문이야.’라고 원망하며 힘들게 버티고 있는 듯했다. 나를 움직이게 하고 기쁨을 주던 반려 식물이었는데….‘그래, 미안하다.’
상처투성이가 된 식물을 생기 나게 하는 방법은 내가 무기력에서 빠져나와 함께 치료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힘을 내서 분갈이도 하고 영양제와 병충해 방지약도 주었다. 와중에 살아나기 어려울 것 같은 다육식물 하나가 초록으로 반짝이는 속잎을 품고 있었다. 차마 버릴 수가 없어 병든 겉잎을 떼어내고 줄기를 잘라서 화분 위에 올려두었다. 자른 줄기에서 시간이 지나 하얗게 새 뿌리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바람결이 날카로워지고 햇볕이 힘을 잃고 있다. 화분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커다란 비닐로 덮어주고 베란다 문을 꼭 닫았다.
무리 옆에 둔 이 어린 허브도, 무름병을 이겨내고 새 뿌리가 나기를 바라는 아픈 다육식물도 모두 겨울을 잘 이겨내길 바라면서 베란다를 한 번 더 둘러봤다. 가끔은 창문을 열고 비닐도 들어주며 환기했다.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갈 땐 나도 사용하지 않는 미니 온풍기를 구해서 틀어주었다.
식물들이 얼마나 커다란 위로인지 키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추위 속에서도 씨눈을 틔우고 싶다고, 꽃송이를 품고 싶다고 옹알옹알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계절이 바뀌고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낸 식물에 영양제 섞은 물을 듬뿍 뿌려주고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다행히 어린 허브도 줄기 자른 다육식물도 잘 견뎌내었다. 식물들은 봄이 되니 앙증맞은 꽃을 피웠다.
나는 매일 베란다와 베란다 밖 걸이대에 있는 식물을 보며 말을 걸었다.
“ 너는 꽃이 별 모양이구나. 너는 꽃대를 올리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야 꽃잎이 벌어지네. 넌 주황색이 참 예쁘다.” 이렇게 식물에 빠져서 이야기하다 보니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던 마른 내 마음도 꽃잎처럼 배시시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