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글을 쓸 때 루틴이 있느냐고 물었다.
하루의 문을 여는 여명 앞이거나 바람 냄새가 지독히 슬픈 날 책상 앞으로 가는 등의 약속된 행동 같은 건 없다. 어떤 사람처럼 글쓰기 전 기도를 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특별하게 마음에 각인될 때 그것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글을 쓸 때 동기 부여가 되는 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좋은 글(수필)을 만났을 때다. 이때 나도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에게 좋은 글이란 문장의 연결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고, 따뜻하든지, 아리든지 마음을 두드리며 자꾸 생각 나는 글이다.
좋은 글을 만난 날은 내 기억의 회로를 끊임없이 돌려본다. 며칠을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있다. 나에게도 유사한 주제나 소재의 경험이 있는지 대입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생각한다. 이때 특별하게 각인된 사물이나 사건이 떠오르면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책상 앞에 간다. 밥을 먹다가, 청소하다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집 밖이라면 휴대전화 메모장을 이용한다. 순간의 기억을 영영 잊어버릴 수도 있기에.
주제만 가지고 모방할 때도 있고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써보기도 한다. 어떻게 전개하고 결말지어야 할지, 글의 중심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퇴고하고 글을 만들어 본다. 제목만 써놓고 한 달이 지날 때도 있고 제목을 못 정해서 갈등할 때도 있다. 얼개만 짜놓은 글이 오래도록 컴퓨터 안에 있을 때도 있다. 그러곤 결국 못 쓰기도 하고 애써 쓴 글이 엉망일 때도 있다. 그래도 동기 부여는 나를 책상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는 번개처럼 스치면서 마음을 때리는 현상과 언어이다. 사전을 펼치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어라도 나에게 생소하게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땐 가슴이 뛴다. 그것으로 글을 써보고 싶어진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낱말과 구절들, 예를 들면 띠앗, 볕뉘, 자드락, 푸른 심줄, 열사흘 달빛 등등 감성을 건드리는 사소한 언어가 내 마음에 불쑥 들어오면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뭐라도 끄적여 둔다. 오늘처럼 네모난 햇살 조각이 나뭇잎을 달고 거실벽에 붙어있는 것을 봤을 때도 그러하다. 이런 순간의 느낌이 폴록에서 온 손님이라도 만나면 영영 잊어버릴 수도 있다.
오래전 마른빨래에서 나는 햇볕 냄새를 처음 느낀 날 ‘햇볕 냄새’란 말을 빛낼 수 있는 글을 머리가 지끈하도록 생각해 보았다. 몇 계절이 지나고 나서 ‘햇볕 냄새’는 결국 내 글 속에서 살아났다. 다른 언어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명을 준다.
우리말은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고 소리 내어 읊조려 보면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쁜 말이 많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몰랐던, 잊혔던 우리말을 만날 수 있다.
결국 나의 글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동기 부여가 껴안아서 탄생한다. 동기 부여가 나를 흔들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여기에 꼭 써야겠다는 욕망이 생기면 더 확고해진다.
수필을 써서 처음 등단했을 때 나도 ‘쓴다’라는 뿌듯한 마음에 자존감이 올라갔다. 다음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글쓰기에서 내가 가장 두려운 건 ‘이 글이 글 같은 글일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을 때다. 즉 글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다. 명수필을 쓰고 싶은 마음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을 것이다. 두어 번 권위 있는 문학상 공모에 응모했지만 내 글이 얼마나 미숙한지 깨달았다. 그럴 때마다 몸살을 앓았다. 나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명작이 아니라도 내 글이, 추운 날 또는 외로운 날 따뜻한 차 한잔 마신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잠깐이라도 함께 본 듯이, 함께 느낀 듯이 ‘그렇지. 그래었지. 그렇구나.’하고 마음을 끄덕이는 그런 글이면 싶다.
젊은 날은 책을 읽느라 연사흘 밤을 날밤으로 보낸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숨 막히고 황홀했던 짓을 못 한다. 에너지도 부족하지만, 눈이 따라주지 않는다. 아니 모든 신체기능이 그러지 말라고 반항한다. 그래도 읽고 싶다.
글을 쓰는 동안 나를 발가벗기면서도 살아 있는 인간으로 꿈틀 하는 것 같아서 좋다. 지금의 나는 글 쓰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읽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서 읽는 것이 도돌이표처럼 이루어진다. 읽으려고 쓰고 읽어야 가슴 뛰는 글을 만날 수 있다. 그래야 살아가면서 덜 여문 햇볕 아래서 소소리 바람을 만나도 담담한 마음으로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