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정신이 어둠의 심연에 갇히자마자 최초로 들었던 목소리를 시스는 기억해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던 그 목소리, 말리티아의 목소리였구나!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같이 갈 데가 있다니.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시스는 자신에게 잇달아 벌어지는 터무니없고 고약한 사건들에 넌더리가 났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했다. 시스의 의지는 흑주술의 힘 때문에 그녀의 신체와 완전히 괴리되어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아무래도 말리티아와 데세르가 공모한 일인 것 같고. 데세르는 나를 움직이는 인형처럼 소유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울 목적이었을 텐데. 말리티아는 데세르를 돕는 척하면서 날 어디론가 빼돌릴 계획이었다는 거잖아.’
시스의 몸은 말리티아의 지시에 복종해 재빠르게 간소한 옷을 찾아 입는 중이었지만 그녀의 사고 능력은 말리티아와 상관없이 자유로웠다. 기묘한 부조화에서 느껴지는 불쾌감 속에 시스는 말리티아를 따라 저택을 빠져나갔다.
말리티아는 마굿간지기를 손쉽게 처리했다. 수고 많다는 상냥한 격려와 함께 그녀가 건넨 한 잔의 에일로 마굿간지기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에일에 잠자는 주술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말리티아의 흑주술은 마르타가 쓰는 초보적이고 흔한 주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달빛 아래 말리티아와 나란히 말을 달리던 시스는 이대로 말리티아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말리티아가 말을 달리라고 해서 달리고 있긴 해도 일단 지금은 몸을 움직이는 데 제약은 없는 상태였다. 말은 못하지만 손을 쓸 수 있으니 필담은 문제없었다.
제대로 된 여관만 찾으면 되지 않을까? 입은 옷의 겉감과 안감 사이에 숨긴 비상금 주머니를 꺼내 주인과 흥정을 하는 거다. 그럼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투숙객이 되어 앙켑세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갈을 보낼 수 있을 텐데.
도망칠 기회를 엿보면서 시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보다는 이지러지고 반달보다는 도도록한 달과 무수한 별이 떠 있었다. 무심히 아름다웠다. 다만 시스가 찾는 페로의 모습이 거기에 없을 뿐.
꼭 따라오지 않아도 페로는 시스를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걱정할 것은 없었지만 시스는 조금 쓸쓸했다. 쓸쓸함 속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섞여 있었지만 시스의 용기를 꺾을 만큼은 아니었다.
태평하게 앞서 가는 말리티아의 등을 주시하며 시스는 차츰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거리를 조금 벌려 놓고는 방향을 바꾸기에 적당한 곳에 이르러서 급격히 말머리를 돌렸다.
“시스! 돌아와! 당장! 결국 후회하게 될 테니까.”
말리티아의 외침이 오솔길을 흔들었다. 시스는 말리티아를 힐긋 돌아보았다. 쫓아올 거라는 시스의 예상과 달리 말리티아는 말을 멈춘 채로 시스를 보고만 있었다.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시스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손이 말고삐를 놓쳤다.
철퍼덕.
말에서 떨어진 시스는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처박힌 지점은 돌밭이 아닌 낙엽 쌓인 흙바닥이었다. 얼굴의 반이 흙과 낙엽에 파묻힌 채로 시스는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바로 앞이 돌서덜이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사지는 전혀 움직여주지 않았다.
또각또각 느린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
“이를 어쩌나. 고귀하신 레이디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그러게 돌아오랄 때 돌아왔어야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말에서 내린 말리티아가 시스의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못 참겠다는 듯 웃어 젖혔다. 그녀는 망토에 달린 후드를 벗고 있었는데 왼쪽 귀가 이상했다. 귀 아래쪽 3분의 1이 떨어져 나간 것을 시스는 보았다. 지혈을 위해 바른 약과 피가 시커멓게 굳어 있었다.
저 귀는 다피넬의 솜씨 혹은 실수라고 시스는 확신했다. 사실이었다. 다피넬이 단검을 휘두르던 순간 시스의 방에 페로가 창과 벽을 부수면서 들이닥쳤다. 그 소리에 다피넬은 동요했고 말리티아는 몸을 틀어 단검이 목에 꽂히는 것은 겨우 모면했지만 약간의 살점을 잃은 것이다.
“나와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그렇게 되는 거란다. 반력이라는 피의 대가를 치르면서 구사하는 흑주술인 만큼 한 번 걸린 이상 빠져나갈 길은 거의 없어. 죽어서 벗어난다면 모를까.”
시스는 흙더미에 잠기지 않은 한쪽 눈을 차갑게 빗떴다. 참담했고 화가 치밀었다. 일부러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야. 이런 꼴이 되는 걸 보려고, 좌절하게 만들어 놓고는 비웃으려고. 말리티아는 즐기고 있는 거야. 약자를 괴롭히는 잔인한 쾌락을.
“그래. 내가 데세르를 도왔고, 배신했어. 지금 내가 무척이나 즐거운 것도 사실이야. 그게 어때서? 난 내 목적을 위해 뭐든 해. 비겁해질 수도 있고 교활해지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좋은 사람 노릇도 얼마든지 하지. 억울해 할 것 없어. 맹수가 약한 동물을 사냥하는 것과 같은 원리니까.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얼른 일어나서 움직여라. 얼굴에 묻은 흙도 좀 닦아내고.”
이유가 없는 악, 그러므로 개전의 여지를 찾을 수조차 없는 악인이구나. 시스는 좋지 않은 의미에서 내심 감탄했다. 애젊은 나이에 비해서는 풍파 많았던 삶이고 별의별 인간들을 다 봤지만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요컨대 저런 존재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면.
몸을 일으켜 입 안의 흙을 뱉어낸 다음 얼굴을 닦으려던 시스가 오른쪽 팔을 내려다보았다. 말에서 떨어져 바닥에 충돌할 때 뼈를 다친 것 같았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스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짧은 비명을 질렀으나 실상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쪽 팔쯤이야 별 문제도 아니야. 말고삐는 왼손으로 잡으면 되니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
말리티아는 시스의 왼팔을 잡아 당겼고 시스는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다시 말에 오르기 직전에 시스는 한손과 이를 써서 속치마를 찢어냈다. 그런 다음 올가미를 지어 자신의 몸에 묶어 다친 팔을 고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