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손을 써서 말을 달리는 거야 일도 아니었으나 깊고 예리한 통증이 시스의 인내심을 매순간 시험했다. 시스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고 피로감에 젖은 등이 뻣뻣했다.
고통스럽다는 생각과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시스는 자신이 냉철함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던 시스가 말리티아를 따라잡은 다음 말머리를 돌려 말리티아의 말을 막아섰다. 목소리를 낼 수가 없으니 행동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니?”
네가 아무리 용을 써 봐야 아무 소용없을 텐데, 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리티아가 물었다.
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 저만치 앞쪽에 흐르는 냇물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물 마시는 시늉을 했다.
“허락하마. 가자, 저리로.”
말에서 내려 냇가로 간 시스는 무릎을 꿇고 왼손 하나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얼음처럼 차갑고 수정처럼 맑은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몸을 일으킨 시스는 옆에 있는 버드나무로 다가가 역시 왼손으로 가지를 여러 개 꺾었다.
말리티아는 커다란 돌에 걸터앉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시스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했다. 나뭇가지를 돌로 두드려서 한쪽 끝을 밟고 한 손으로 비틀어서는 껍질을 벗겨냈다. 껍질을 다 모으자 우선 한 움큼을 입에 물고 씹으면서 나머지를 망토 주머니에 넣었다.
“고귀한 혈통의 귀족 레이디치고는 생존력이 강하구나. 아주 흥미롭단 말이지. 우리가 처음 인사할 때 네가 내 옷핀에 찔렸었잖니. 기억나지?”
물론 기억났다. 시스는 말에 오르려다 말고 말리티아를 돌아보았다.
“네 피의 맛이 말이다.”
맛? 옷핀에 묻은 피를 맛을 봤다고? 시스의 담녹색 눈이 회동그래졌다.
“굉장히 맑고 순연한 맛이었어. 그런 맛은 처음이야. 보니타의 피도 맛이 깨끗한 편이었지만 너만큼은 아니었거든.”
그래서였다. 말리티아가 데세르의 뒤통수를 치고 시스를 훔치기로 결심한 것이.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시스의 눈에서 의문이 일렁였다. 나를 납치한 게 그것 때문이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런 내 피가 너희들에게 어떤 쓸모가 있다는 거야?
“아, 오해는 하지 말거라. 인간의 피를 먹는 쪽은 아니니까.”
말리티아가 키들거렸다. 단지 우리는 찾고 있을 뿐이야. 가장 순수한 피를 가진 존재를.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구나. 이런 얘기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다. 말리티아는 이만 입을 다물고 가볍게 말 등에 올라탔다.
시스는 버드나무 껍질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리티아를 따라갔다. 시스가 버드나무 껍질에 기대하는 효과는 두 가지였다. 진통 효과 그리고 저작운동을 함으로써 신경을 통증으로부터 분산하는 동시에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
주변 풍경을 보며 시스는 자신들이 고래 산맥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알았다. 습지와 숲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가 나왔고 두 사람은 말고삐를 더욱 신중하게 잡고 속도를 늦추었다. 곧 달이 기울 참이었으니 거의 밤내 말을 달린 셈이었다.
“저기서 좀 쉬었다 가자. 얼마간 눈도 붙이고.”
멀리 어스름에 잠긴 오두막 몇 채가 보였다. 시스는 말리티아의 말이 반가웠다. 온몸이 쑤시고, 다친 팔은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아팠고, 눕고 싶었고, 잠을 좀 자고 싶었다.
오두막이 있는 곳에 다다라 말에서 내리는데 요란하게 꽥꽥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에서 자고 있던 거위들이 낯선 자들을 경계하여 내는 소리였다.
“거기 누구요? 누가 왔소?”
두꺼운 문은 열리지 않은 채 나이 지긋한 남자가 묻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나야. 문 열어, 아비움.”
말리티아가 온화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시스가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오던 도중에 말리티아가 보였던, 냉소적이고 사람을 무시하는 말투는 간데없었다.
문이 열리고 아비움이라는 남자와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함께 나와서 말리티아에게 굽신굽신 허리를 숙였다.
“아이구, 보니 마님. 어떻게 이런 꼭두새벽에 이 험한 곳까지 오셨답니까. 칸나, 어서 마님을 안으로 모셔.”
인사를 차리고 난 아비움은 아직도 시끄럽게 떠드는 거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거위 우리로 갔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마님.”
칸나가 말리티아와 시스를 오두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잘 지냈나, 칸나? 이 아이는 내 먼 친척 아이인데 가엾게도 말을 하지 못한다네. 나와 함께 어딜 좀 가는 길인데 말에서 떨어져 팔을 다쳤지 뭔가. 자네가 뼈를 잘 맞추니 좀 봐주면 좋겠는데.”
망토와 후드를 벗지 않은 채로 말리티아가 말했다. 안쓰럽다는 듯 여린 한숨을 쉬는 말리티아의 연기가 가히 일품이었다. 시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속으로만 웃을 뿐 얼굴로 웃을 수는 없었다.
“예. 그리 하지요.”
칸나가 시스를 나무 의자에 앉히더니 몸에 고정해 놓은 오른팔을 풀었다. 그녀는 시스의 소매를 걷어 올려 팔을 세심하게 살피고 만져 보았다. 시스는 입 안에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꽉 물고 아픔을 참았다.
“뼈를 조금 다치기는 했는데 부러져 버린 건 아닙니다. 부목을 대어 드릴게요.”
“다행이로군. 정말 다행이야.”
말리티아가 말했다. 기왕이면 흠집 없이 데려가는 게 더 좋을 테니까.
시스가 칸나의 처치를 받고 있을 때 아비움이 들어왔다. 아비움은 거위들에게 모이를 주고 옆채의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오는 길이었다.
“두 분 머무실 방에 환기를 시키고 불을 피워 놓았습니다.”
아비움이 옆채 열쇠를 말리티아에게 건넸다. 말리티아는 마치 진심인 듯 들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