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느러미 여관에 깃발이 게양되어 있었다. 얇은 돌비늘을 붙여 지느러미를 그려 넣은 커다란 깃발은 펄럭일 때마다 반짝임을 일으켰다. 높디높은 깃대 끝에 달아놓은 사각뿔 모양의 거울도 빛을 반사해 먼데까지 존재를 과시했다.
거기서 꽤 떨어진 산등성이를 지나던 중 반짝이는 깃발을 본 라무스는 동쪽으로 잡았던 말머리를 지느러미 여관 쪽으로 돌렸다. 그는 깃발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지느러미 여관의 실소유주는 콤메르였다. 콤메르 소유의 모든 여관에는 돌비늘 깃발이 있었다. 돌비늘 깃발을 올리는 것은 콤메르의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녹스 용병단과의 제휴 사업이었는데 깃발을 한 번 올릴 때마다 쏠쏠한 수입이 발생했다.
라무스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지느러미 여관에 도착했다. 마굿간지기에게 말을 넘겨준 그는 곧장 여관 관리인 파물루스를 찾았다.
“이 파물루스에게 볼일이 있으시다고요? 아, 얼마 전에도 다녀가신 분이로군요. 한데, 무슨 일일까요?”
바싹 마른 장작을 연상하게 하는 풍채의 노인이 의례적인 친절을 내보이며 라무스를 맞았다. 그는 안 그런 척하면서 라무스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주의 깊게 살폈다. 어쩌면 저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깃발을 내리게 할 사람이.
라무스는 대답 대신 목깃 안으로 손을 넣어 목에 걸고 있던 표패를 내보였다. 녹스 용병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으로 용병단 내에서도 최정예 81명에 속하거나 파보르의 측근인 핵심 인사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었다.
“역시 제 예감이 맞았군요. 깃발을 내리러 오신 분이었네요. 저를 따라 오십시오.”
돌비늘 깃발은 그 일대에 있을지도 모르는 녹스 용병을 호출하는 신호였다. 아주 중대한 임무가 아니고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안식년을 받은 단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임무 수행에 걸린 기간만큼 안식년을 연장해 주는 것이다.
파물루스가 라무스를 옆방으로 데려갔다. 휑하니 비어 있는 방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전서매였다. 높은 횃대에 앉아 날카롭게 눈을 빛내던 매를 향해 라무스가 팔을 내밀며 휘파람을 불었다.
매는 딴청을 피우며 라무스가 몇 번이나 휘파람을 불도록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파물루스가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라무스를 쳐다보았다. 녹스 용병이라는 것이 증명되어도 전서매가 그에게 가지 않으면 임무를 맡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원칙이라기보다 불가능이라고나 할까. 매의 다리에 달린 편지를 읽지 못하고서야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풀루스?”
라무스가 혹시나 해서 불러 보자 매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에 날아와 앉았다. 라무스는 동물을 좋아했고 녹스 용병단의 매들은 라무스를 잘 따랐다. 그렇다 해도 매 담당이 아닌 라무스로서는 수십 마리나 되는 매를 하나하나 구분하지는 못했다.
풀루스는 매 담당이 장난삼아 붙인 이름으로, 라무스의 풀루스 즉 라무스의 귀염둥이라는 뜻이었다. 풀루스가 특히 더 라무스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풀루스가 지느러미 여관에 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파보르. 작정하고 제 안식년을 방해하시는군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의뢰를 받으셨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지금 고래 산맥 일대의 여관에 내걸린 돌비늘 깃발을 발견할 만한 녹스 용병이라고는 라무스밖에 없을 터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라무스는 콤메르의 여관들을 이용했다. 아마 파보르는 콤메르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라무스의 동선을 파악해 달라고.
파보르가 콤메르를 통해 여관 이용의 편의를 제공했을 때 이미 라무스도 자신이 그의 손바닥 안에 있을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갑자기 임무를 맡길 줄은 몰랐다. 웬만큼 중차대한 사안이 아니고서는 파보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서매가 내려앉았으니 이제 깃발은 내려도 되겠군요.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밝은 낯빛으로 말하고 파물루스는 자리를 떴다. 깃발이 제때에 역할을 다하면 여관에도 떨어지는 몫이 있었다.
파물루스는 고래 산맥 일대의 여러 여관 중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지느러미 여관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그는 깃발을 내린 다음 다른 여관들에 전서조를 날릴 참이었다. 지느러미에서 일을 성사시켰으니 녹스의 매를 용병단으로 돌려보내고 그만 깃발을 내리시오.
매와 단 둘이 남은 라무스는 매의 다리에 묶인 자그마한 통에서 돌돌 말린 작은 종이를 꺼냈다. 잘 훈련된 매는 얌전히 다시 횃대 위로 날아갔다.
암호문으로 적힌 명령서를 불빛에 비춰 보던 라무스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이마를 짚었다. 거칠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찬찬히 명령을 해독한 그는 종이를 난롯불 속으로 던지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기다려, 풀루스. 네가 먹을 만한 걸 좀 갖다 줄게.”
풀루스에게 먹이를 먹인 다음 바깥으로 날려 보내고 나온 라무스를 파물루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한 손님에게 걸맞은 좋은 방을 준비했습니다.”
파물루스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깃발을 올리는 것 자체가 좀체 없는 일이었다. 한 번씩 상상은 해봤지만 실제로 깃발을 올린 건 파물루스가 지느러미 여관의 관리인이 된 지 십수 년만에 처음이었다. 성과를 내기까지 했으니 자랑을 삼을 만한 경험담이 생긴 것이다.
라무스를 위한 자질구레한 시중을 파물루스는 자청하여 직접 들었다. 음식을 날라다 주고, 깨끗한 새 침구를 가져다 침대를 정돈해 주고, 난롯불을 살폈다.
“뭐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식사를 마친 라무스에게 파물루스가 손을 비비며 물었다. 파물루스는 나중의 자랑거리를 위해 그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불필요한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없소. 고맙소. 이만 가보시오.”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파물루스를 내보낸 라무스가 명령서를 꺼내 한 번 더 읽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파보르의 필체로 쓴 암호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타키툼의 프레케스 공작 부인 나이아시스를 카푸로 데려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