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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꿈과 새

by 화진


명령은 늘 그렇듯 불필요한 단어 하나 없이 간결했고, 라무스의 머릿속은 다른 어떤 임무를 받았을 때보다 복잡해졌다.


누구의 의뢰일까? 왜 시스를 원하는 걸까?


비밀리에 파보르에게 의뢰했다면 좋은 일일 확률은 낮았다. 혹여 자신이 콤메르에게 팔았던, 시스의 결혼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정보 때문에 벌어진 사태는 아닐까 하는 추측에 이르자 라무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임무의 종착지가 카푸인 점은 오히려 반가웠다. 어차피 시데레온으로 가는 길에 카푸에 들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시데레온이 아바루스 왕의 간섭 아래 놓여 있는 마당에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시스는 이미 타키툼의 프레케스 저택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줄곧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던 그녀였으니까. 아무리 봐도 길게 참고 있을 성질머리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를 원수 보듯 할 게 뻔한 레이디 시스를 카푸로 데려가야 한단 말이지. 라무스는 팔을 베로 누운 채로 어이없는 코웃음을 쳤다.


의도치 않게 힘을 합쳐 님파의 서를 훔쳐보던 날 마지막으로 그녀가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거기서 나가면 그녀에게 난 갚아줄 게 남아 있는 인간일 뿐이라고 했었지. 조심하라고.


라무스는 눈앞이 캄캄했다. 차라리 모르는 여자였다면 사기를 치든 달콤한 말로 꼬드겨 꾀어내든 무슨 쓸 만한 수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하필 시스였다. 라무스는 자신이 그녀를 찾아가 같이 카푸로 가 달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뭐? 당신하고 같이? 내가 미쳤어?

그녀는 카푸로 가던 길이었더라도 안 가겠다고 선언하겠지. 아니면.


카푸? 가고말고. 단, 당신에게 갚을 걸 갚고, 나 혼자 가겠어.

아마도 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작은 흉기 같은 게 날아오겠지.


라무스는 이마를 거칠게 쓸었다. 임무를 받고 미리부터 이렇게 생각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사전 준비를 위한 궁리라면 모를까 이런 잡념 따위는 정작 임무 수행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뭔지 모르게 예감이 개운치가 않았다. 라무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시스를 카푸로 데려갈 수 있을까? 납치? 그녀를 묶고 속박한 상태로 그 먼길을 가는 것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마차는 필수겠고. 설득?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인데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그 고집불통을 도대체 어떻게?


골머리를 썩이던 라무스는 어느 결엔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그는 타키툼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데세르를 대신하여 신랑인 척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라무스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했다. 꿈은 실제로 결혼 서약을 하던 그날과는 좀 다르게 전개되었다. 신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스?’


라무스는 불러 보았다. 꿈이니까 상관없지 않은가. 그녀가 나타나면 카푸로 가자고 말해 봐야겠다고, 연습 삼아 그녀를 설득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레이디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격식을 갖춰 한 번 더 불렀다. 그러나 텅 빈 신전에 그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불길하고 음산했다. 라무스는 신전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려 입구로 향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라무스를 붙잡았다. 멈춰 돌아보는 라무스의 눈에 기둥 뒤에 숨은 누군가가 들어왔다. 보이는 거라곤 여자의 치맛자락과 빼꼼 내다보는 한쪽 눈 정도였지만. 확실히 시스는 아니었다. 생면부지의 타인이 분명했다.


기둥 주위로 흐릿하게 울긋불긋한 안개가 흐느적흐느적 떠다녔다.


‘누구지?’


‘나는…… 아무도 아니야. 그냥 한 가지만 알려주고 싶어서.’


여자가 쭈뼛쭈뼛 중얼거렸다. 그녀가 조심스러워하는 건지 두려워하는 건지 라무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뭘 알려주겠다는 거지?’


‘시스는 여기 없어. 시스는 지금 몹시…….’


하늘을 찢는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무수한 빗줄기가 내리그었다. 라무스는 눈을 번쩍 떴다. 실제로 거센 비가 덧문과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번개가 번쩍 하더니 다시 천둥이 쳤다.


꿈은 꿈일 뿐이었다. 맥락이 통하지 않고 황당무계했다. 자기 전에 시스를 떠올린 탓에 그녀를 처음 보았던 신전이 꿈에 나온 거라고 라무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른 새벽에 시작된 소나기에 라무스는 발이 묶였다. 오전이 반쯤 흘러갔을 때 빗줄기가 약해졌고 라무스는 길을 나서기로 작심했다. 그가 지느러미 여관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는 그치고 하늘이 개었다.


라무스는 고래 산맥을 가로질러 가는 길을 택했다. 협곡과 바위산을 여럿 지나야 하는 험준한 길이었다. 중간 중간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고, 때로 산허리의 가파르고 좁은 길을 말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슬아슬하게 지나야 했지만 이 길이 타키툼으로 가는 최단 경로였다.


대륙의 남쪽인 고래 산맥에 봄이 스미고 있었다. 흙냄새는 촉촉하면서 상쾌하고 새로 돋은 연한 싹들이 푸르무레한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렸다. 문제는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본디 남쪽의 봄날은 순한데 이즈음에는 무슨 조화속인지 소나기와 강풍이 잦았던 것이다.


강한 비바람을 만났을 때 몸을 피하거나 잠을 청하기 위한 은신처를 삼을 바위굴이나 거목의 틈새는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라무스는 가능한 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나아갔다.


돌무더기 협곡을 지나 산등성이의 완만한 오솔길로 접어든 라무스는 다시 말에 올랐다. 이대로만 가면 내일은 타키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도 아직 기운이 넘쳤다. 한참을 길을 재촉하여 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른 라무스가 말에서 내렸다.


지형지세를 살필 요량으로 라무스는 까마득히 키가 큰 나무로 올라갔다. 거의 우듬지 가까이까지 올라가서 아래를 살피던 라무스가 문득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희고 둥근 새 한 마리가 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깃털 속에 숨은 두 눈을 이글이글 번쩍이며 새가 라무스를 향해 돌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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