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피스키볼라 날아오르다

by 화진


물고기의 등에 그냥 올라타라고? 시스와 라무스는 순간 얼굴을 마주보았다. 무슨 물고기인지 등지느러미의 모양이 매우 독특했다. 상어도 고래도 아니었다. 훨씬 더 컸다. 두 사람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물고기가 분명했다.


“피스키볼라의 등지느러미에 기대앉아서 깃털처럼 생긴 걸 꽉 잡도록 해. 아, 피스키볼라는 예의와 도리를 중시하니까 얌전히 행동하고, 나중에 정중한 감사 인사 잊지 말고. 그것만 명심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피스키볼라가 너희를 떨어트리는 일은 절대 없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겁먹을 것 없어.”


비텍스가 라무스의 등을 떠밀었다. 라무스는 나룻배에서 물고기의 등으로 뛰어내렸다. 시스도 치맛자락을 걷고 가볍게 내려섰다.


“시스, 라무스. 잘 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고 비텍스는 노를 저어 멀어졌다.


시스와 라무스는 물고기의 등을 밟으며 담장처럼 솟아 있는 등지느러미로 걸어갔다. 깃털과 비늘이 빽빽하게 뒤섞인 독특한 등이었다. 방금 물 밖으로 내민 등인데도 깃털은 물 한 방울 묻지 않고 보송보송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스가 말하자 등지느러미가 반짝이며 일렁였다. 두 사람은 비텍스가 말했던 대로 등지느러미에 기대어 앉아 지느러미에 난 깃털을 붙잡았다. 깃털은 홀씨무리처럼 보드랍고 쇠줄처럼 강인했다. 피스키볼라가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해무가 자욱했다. 이내 번개 반도의 조약돌 해변도 자취를 감추었다. 시스와 라무스는 옆에서 출렁이는 바다와 피스키볼라의 오묘한 비늘과 지느러미와 깃털밖에 볼 수 없었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짙고 흰 안개 사이로 스민 빛의 파편이 밝았다. 너머에 해가 떠 있나 보았다.


피스키볼라는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렇게 한 치의 미동도 없이 헤엄치는데 깃털은 왜 잡으라고 한 걸까. 시스와 라무스는 같은 생각을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풀게트 관문을 지나 번개 반도까지 데려와준 거, 고마워.”


거대한 물고기가 물을 가르는 소리와 파도 소리 위로 무심한 듯 말하는 시스의 목소리가 얹혔다. 그녀는 라무스가 아닌 해무를 보고 있었다.


“라무스 당신이 가짜 신랑 노릇으로 사기쳤던 일은 잊어줄게.”


솔직히 그 일에 대한 원망은 이미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감정의 앙금이 사라진 것이 언제인지는 시스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풀게트 관문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였는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게 증명되었던 마차 안에서였는지. 풀게트에서 라무스가 검은 기사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던 도중이었는지.


“이봐, 시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반대편 해무에 시선을 둔 라무스가 당치도 않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 알아, 알아. 고맙다는 소리 듣자고, 대가를 받자고 그랬던 건 아니라는 거. 순수한 측은지심이었을 거라는 거. 그래도 내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아서 말이야.”


시스가 팔꿈치로 라무스의 팔을 툭 쳤다.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탓인지 시스는 라무스가 제법 편해졌다. 그 사이에 동료 의식 같은 게 싹트기라도 한 건가.


“뭔가 크게 잘못 알고 있군. 나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인데?”


“뭐? 뭐라고?”


코웃음 치는 라무스의 옆얼굴을 돌아본 시스가 도끼눈을 떴다. 장난이 아니잖아? 이 남자, 지금 진지해!


“말 그대로야. 난 시스 당신이 제대로 된 보답을 하길 원해. 물론 지금 당장 받겠다는 건 아니고. 나중에라도 내가 필요할 때.”


파트로나의 말, 시스로부터 보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놓으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라무스는 짐짓 얄팍하고 약은 태도를 보였다.


“흥, 들어나 볼게. 제대로 된 보답이 어떤 건지.”


고개를 홱 돌려 외면하는 시스의 얼굴에서 온기와 혈색이 가셨다.


“당신을 돕자고 나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어. 아, 잊을 뻔했군. 풀게트 관문에서 숨이 끊어지는 당신을 내 피로 살리기도 했고. 말 그대로 당신이 나에게 진 빚은 목숨 빚이지. 자, 당신이 대답할 차례군. 말해 봐. 목숨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하는 걸까?”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저렇듯 자기 입으로 공치사하듯 내세우는 바람에 빛이 바래 버렸다. 시스는 실망감이 들었다.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인간에 지나지 않는 건가?


고마웠는데, 진심으로 고마웠는데,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을 작정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뻔뻔하고 쩨쩨하게 나오다니. 시스는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잠시나마 그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이, 그 판단이 착각이었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목숨 빚은 목숨으로 갚으라는 뜻이야?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나에게서 목숨 값을 제대로 받아 내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난 일 년 정도밖에 안 남았으니까.”


차갑고 냉소적인 어조였다. 라무스는 그녀의 말이 얼음 파편으로 변해 얼굴을 때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도채비족 파트로나의 조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약속만, 보은의 약속만 받아내는 거다. 그 약속에 대한 이행을 요구할 일 따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보은하겠다는 약속, 그거면 돼.”


“그래. 그럴게.”


시스는 그에 대한 경멸을 담아 내뱉었다.


“약속한 거다.”


“그렇다니까아악!”


대답이 급박한 비명으로 이어졌다. 등지느러미 깃털을 느슨하게 잡고 있던 시스가 휘청하면서 아래로 떨어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리고 재수 없게도 라무스가 제때에 시스의 목덜미 옷깃을 움켜잡아 끌어올려 주었다.


시스도 라무스도 비텍스가 깃털을 꽉 잡으라고 한 까닭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피스키볼라가 날아올랐던 것이다. 지느러미와 깃털로 이루어진 거대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바다로부터 창공으로. 우아하고 세차게.


피스키볼라의 몸에 묻었던 바닷물이 비처럼 흩어졌다. 피스키볼라는 전설의 물고기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