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비는 종이를 떨어뜨리고 얼굴을 감쌌다. 울고 싶지 않아서 울지 않았다. 대상 없는 분노가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 과녁 없는 화살 같은 분노를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저도 모르게 꽉 쥔 두 주먹에 하얗게 바들바들 떨렸다.
외출할 때 들었던 에코백 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녹색 불빛이 미색 캔버스 천 너머에서 아련하게 깜빡였다. 문비는 주먹을 풀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라한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이 도저히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잠시 후 문자메시지가 왔다.
-진료 잘 받았어요? 깨금이가 보고 싶다고 전해 달래요.-
-네, 다 괜찮대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래요. 나도 깨금이 보고 싶어요. 깨금이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이.-
눈의 상태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잠깐 동안은 문비 스스로도 경악스러웠지만 이내 수긍했다. 거짓말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고. 하지 않은 말은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거짓말은 나중에라도 바로잡을 수 있지만, 지금 정직하게 밝혀 버리면 돌이킬 수도 덮을 수도 없으니까.
-다리목 아래 냇가 자갈밭에 달맞이꽃이 피었어요.-
뒤이어 청보랏빛 어스름 속에 또렷이 떠오른 맑은 노랑의 꽃들을 찍은 사진이 전송돼 왔다.
사진 속 달맞이꽃을 보면서 문비는 믿기지가 않았다. 머지않아 자신이 영영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이. 꽃도, 풍경도, 사랑하는 사람의 선하고 깊은 눈동자도. 그 무엇도, 아무것도. 어둠조차도.
-어제도 피어 있었을 텐데 오늘에야 유심하게 봤어요. 내일은 우리 같이 볼 수 있겠죠?-
-여기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며칠은 걸릴 것 같아요. 미안해요.-
문비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과의 타협이건 회피건 체념이건 간에 우선 이 막막한 상황을 소화시킬 시간, 혼란스러운 심경을 정돈할 시간이.
-미안하긴요. 거기 일 차근히 잘 정리하고 와요. 다만 간간이 내 생각도 했으면 좋겠어요.-
-생각했어요. 생각해요. 내가 오늘 라한씨 생각한 만큼 비가 내린다면 호우경보가 발효되고도 남아요.
-내가 문비씨 생각하는 만큼 바람이 분다면 지표면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예요.-
-믿어요.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이제 우린 어쩌면 좋을까요.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요. 난 어떡해야 하는 걸까요. 나는…… 자신 없어요.
갈증을 느낀 문비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는데 문득 은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산뜻하지만 허무한 웃음을 띠고 농담처럼 했던 말.
두 사람이 결혼을 한다면 아이를 많이 낳았으면 좋겠어요. 다섯쯤? 너무 많은가? 그럼 셋 정도? 그냥 내 바람이 그렇다고요. 둘의 아이가 태어나면 아마 난 그 집에 살다시피 할 것 같아요. 그 아이들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완벽한 아이들일 테니까요. 적어도 나에겐요.
꽃집 아이를 바라보던 라한의 눈빛도 떠올랐다. 다정과 동경이 무지개처럼 서린 그 눈빛.
의사의 말이 되살아나 문비의 회상을 절망으로 바꾸어 놓는다.
모계 유전 질환입니다. 모계 유전. 모계…….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소름이 돋고 몸이 덜덜 떨렸다. 문비는 생수병을 힘껏 집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석양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늪 같은 밤이 야금야금 흘러들었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던 문비는 불은 켜지 않은 채 카세트테이프리코더만 작동시키고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웠다. 이 시점에 왜 하필 그 카세트를 재생시키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러고 싶었다.
인어공주를 읽어주는 낯설고 포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문비는 생각했다. 이런 자신을 엄마가 볼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엄마가 그리웠다. 어느 때보다 간절히 그리웠다. 자신을 농락하는 운명을 엄마에게 일러바치고 싶었다.
오 분여가 지나지 않아 인어공주 낭독이 끊어졌다. 카세트테이프를 처음으로 되돌려 다시 들으며 문비는 이 낭독이 일종의 시연이 아닐까 추측해 봤다. 시연이라면 녹음도서 제작을 위한 시연 같은 것인가.
사슬처럼 이어지는 추측과 상념을 따라가던 문비는 이상한 예감에 도달했다.
엄마. 엄마가 이상하다.
여행을 가라던,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라던 유언이 이상하다.
엄마의 서랍에서 나온 점자악보, 녹음도서 시연이 연상되는 이 카세트테이프, 끝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봉사 활동을 놓지 않았던 엄마. 이상하다.
시각장애가 없는 딸에게 일찍이 점자를 익히게 한 것도 정말 우연일 뿐일까?
안과 의사에게서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 환자에게 사용되는 약인 이데베논의 가격을 들은 바 있는 문비로서는 항상 검소했던 엄마가 남겨준, 문비가 예상치도 못했던 금액의 예금도 이상하다. 이데베논은 180캡슐의 가격이 천만 원을 훌쩍 넘는 비싼 약이라고 했다.
문비가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 대답해 봐.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이렇게 될 줄 미리부터 다 알았던 거야? 그래? 그랬던 거냐고!”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심증이 자꾸만 굳어졌다. 이 심증의 가장 끔찍한 지점은 엄마가 생모일 수 없다는 대목이었다.
문비의 눈이 멀 것을 엄마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문비는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을 발병시키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건 문비가 엄마의 친딸이 아니라는 증명이나 다름없다.
울음을 더는 욱여 참을 수 없었다. 문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팔로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물에 떨어져 풀어지는 핏방울처럼 어둠 속으로 울음이 풀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