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비가 없는 매일 밤 라한은 냇가를 따라 길게 펼쳐진 자갈밭을 거닐었다. 나날이 차오르는 달을 향해 달맞이꽃은 청초하게 흐드러졌고 그를 따라 나온 깨금이가 노란 빛을 품은 꽃들 사이를 활발하면서도 조용하게 누비고 다녔다.
깨금이는 뛰거나 걷거나 어딘가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거나 라한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쫓아다녔다. 신이 나서 놀다가도 깨금이는 얼마 만에 한 번씩은 꼭 라한에게 돌아와 제가 그와 동행임을 잊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 주곤 했다.
라한은 기특한 짐승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꽃 냄새와 이슬을 묻히고 온 깨금이는 풋풋하고 축축하고 따뜻했다.
문비를 기다리면서 라한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오리라는 사실은 그에게 머리 위에 떠 있는 달의 존재만큼이나 명징했다. 시간과 마음이 교직되어 빚어진 자연스러운 확신이었다.
달맞이꽃밭을 거닐던 어느 밤 라한은 자신의 가슴 속 소년과 조우했다. 꽤 오랜 세월을 비껴 흘려보낸, 자라지 못한 소년이었다. 여느 아침처럼 주먹을 서로 맞대며 호탕하고 다감하게 인사하고 나간 아버지를,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이었다.
라한은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고 소년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악수했고 라한은 소년에게 나침반을 건넸다. 새로운 기다림의 나침반, 단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었다. 마침내 소년은 모든 인간이 돌아가는 그곳으로 돌아간 아버지를 보냈다. 그리고 단숨에 비껴 흘려보낸 세월만큼 자랐다.
달 아래 여름 숲가에서 체험할 수 있는 일종의 신비에 휩싸인 라한은 문비와 함께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쉬웠다. 푸른 달빛과 고요에 젖은 노란 달맞이꽃 사이에 문비가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신비를 만났을까.
아주 가끔씩 문비가 무심코 흥얼거리는 즉흥 허밍 혹은 부드러운 휘파람은 또 이런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까, 라한은 궁금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라한은 그동안 자신이 들었던 문비의 멜로디를, 짧지만 독특하고 아기자기하거나 서정적인 멜로디들을 기억에 의존해 오선지에 옮겨 놓곤 했다.
그는 문비와 같은 절대음감이 아니었기에 정확하게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짧은 악보가 제법 모이면 문비에게도 보여 줄 참이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그녀가 수정해 줄 것이었고, 어쩌면 좀 더 발전시켜 볼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노래를, 가문비의 노래를 모으는 일은 라한의 비밀스러운 즐거움이었다.
다음날 새벽, 달리기를 하러 나가던 라한은 문비의 차를 발견했고 달리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여명이 번지는 달맞이꽃밭에 서 있는 문비를 볼 수 있었다. 뒷모습이었다. 여전히 가녀린, 아직도 그늘이 엿보이는 뒷모습이 새삼 라한에게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기척을 느낀 문비가 돌아보며 상긋 웃었다.
명랑한 분홍빛의 미소 앞에서 라한은 오히려 마음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과장된 경쾌함과 달콤함이 그 미소에 스며 있기 때문이었을 텐데, 라한으로서는 그 과장됨의 이면을 가늠하지 못한 채로 그저 막연히 아팠다.
“이것 좀 봐요.”
달맞이꽃 사이에서 쇠뜨기 한 줄기를 뜯어 올린 문비가 그걸 라한의 코앞으로 디밀었다.
“이슬 맺힌 거 말이에요?”
가느다란 잎과 줄기의 마디마디에 조롱조롱 매달린 작고 투명한 물방울을 보며 라한이 말했다.
“이슬이 아니고 일액이라고 하는 건데, 식물이 호흡을 하지 않는 밤 동안 증산되지 못하는 수분이 식물체 바깥으로 밀려난 거예요.”
말을 마친 문비가 맛을 보라는 시늉을 했다. 라한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유기물, 무기물에 당분도 있어서 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어때요? 단맛이 느껴져요?”
선선히 연초록 잎 끝에 입술을 대고 훑어 맛을 보는 라한을 문비가 가만히 응시했다.
인정할 수가 없다. 온갖 식물들의 빛나는 푸름을 못 보게 되리라는 것, 섬세한 사색과 따스한 감성이 담긴 저 눈빛 저 얼굴을 영영 볼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명백하고 냉혹한 현실을.
“그런 것 같아요.”
일액을 묻힌 입술로 그가 가볍게 키스했다. 가벼웠던 시작을 농밀하게 이끌어 간 건 문비 쪽이었다. 눈자위가 뜨끈해지려 해서, 코끝이 시큰해지려 해서. 자신의 불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문비는 울창한 숲에 새벽빛 아름다운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에 키스하다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다가오는 암흑의 나날을 피할 수 없다면.
풀이 스적대는 소리를 앞세우고 깨금이가 두 사람에게로 달려왔다.
“깨금이 왔어?”
앞에 앉아 온화하게 꼬리를 흔드는 깨금이의 머리와 턱을 문비가 다정히 쓰다듬었다. 반갑고 좋은 심정과는 별개로 문비는 문득 착잡해졌다. 전에 복지관에서 마주쳤던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모습이 깨금이에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멀지 않은 눈이지만 이제 문비의 눈은 이전의 눈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지난날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고, 시각장애인이나 안내견이라면 특히 더 그랬다. 한숨을 삭이고 절망을 감추느라 문비는 더 자주 웃었다.
깨금이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문비의 손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를 지그시 올려다봤다. 지난 며칠 그녀를 사로잡았던 막연한 분노와 의문, 참담의 시간을 다 안다는 듯이. 깨금이의 머룻빛 눈은 맑고 깊었다.
사위가 완전히 밝아지자 문비는 도구들을 꺼내고 일을 시작했다. 달맞이꽃을 관찰하고 채집하고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마지막으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남기는 것 또한 빼놓지 않았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전 문비는 짧고도 강렬한 갈등에 빠졌다. 시력을 잃을 사람에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이런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자조적인 갈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