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하게 문진이 이어졌다. 문비는 의사의 질문에 최대한 성의 있게 답하면서도 별것 아닐 거라는 확신으로 내심 태평했다.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신다니 시력의 중요성도 다른 사람들보다 크겠군요. 일이란 자고로 소중한 거니까요.”
이런 저런 검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의사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네, 아무래도 좀 그런 편이죠.”
문비의 말에 의사는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무표정하게 끄덕였다.
검사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문비는 책상 가장자리에 붙은 스티커를 발견했다. 호랑이 스티커, 정확히 말하면 곰돌이 푸의 친구인 티거였다. 문비는 쿡 웃을 뻔했다. 이마가 약간 벗어진 의사와 티거가 묘하게 닮아 있는 탓이었다.
다음날 문비는 티거 스티커가 붙어 있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의사와 다시 마주앉았다. 의사는 검사실에서 전송된 영상과 검사 기록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문비는 의사가 고개를 들어 검사 결과를 알려주기를 기다리며 티거 스티커를 보고 있었다.
진료를 받으러 왔던 꼬마 환자 누군가가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안 아프게 진료를 봐 줘서 고맙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꼬마는 저 의사에게 티거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을지도.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의사의 헛기침이 문비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저 괜찮은 거죠? 그냥 눈이 좀 피로한 것뿐이죠?”
의사는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을 깍지 낀 그대로 얼굴을 숙여 손등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고서는 문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입니다.”
“네? 심각한 건가요?”
“중대한 상황이죠. 혹시 가문비씨 어머니께 시각 장애가 있나요?”
“아뇨, 전혀 아니에요. 그건 왜요?”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은 모계 유전 질환입니다. 자연 발병하는 사례도 있지만요.”
“모계…… 유전이라고요?”
엄마도 외할머니도 나이 들어 노안이 온 것 외에는 달리 시각적인 문제를 겪지 않았던 사실을 떠올리며 문비가 되물었다. 외삼촌을 포함한 외가 친척들 중에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은 전혀 없었다.
“어머니에게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 유전 인자가 있으면 그 자녀에게는 성별과 무관하게 유전이 됩니다. 발병 시기는 개인차가 있고요. 하지만 좀 전에 말씀 드렸다시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께서 시력에 문제가 없었다니 가문비씨는 자연 발병일 가능성이 높네요. 원인이 어떻든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만.”
건조하지만 둥글고 완만한 어조였다. 직업적인 균형감이 투철하거나 천성적으로 무난하고 느긋한 성격일 것이다.
“치료 방법은요? 수술 같은 거 받음 되는 건가요?”
좀 전에 의사의 입에서 나왔던 말 중 ‘중대한’이라는 단어와 ‘결과’라는 단어가 그제야 마음에 돗바늘처럼 꽂혀 왔다. 문비는 두려웠다.
“현재로서는…… 실명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빠르면 몇 개월, 최대한 길게 잡아도 몇 년 안에는 완전히 실명하게 될 겁니다. 지금 진행 중인 오른쪽 눈 뿐 아니라 왼쪽 눈도 마찬가지로요.”
모서리 없이 유하지만 정확하게 그러나 시선은 피한 채로 의사가 말했다. 문비를 피한 그의 시선이 티거 스티커에 머물렀다.
문비의 입술이 말을 내어놓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떨렸다. 몇 개월? 몇 년? 완전히 실명? 어떻게 그런 일이 있죠? 오진일 거예요. 오진하신 거예요. 제가 눈이 멀다니. 그럴 순 없어요. 그럴 리 없어요. 이런 말들이 입술 안에 갇혀서 맴돌았다.
시간이 단속적으로 흘러갔다.
문비는 자신이 진료실을 나와 복도 가의 벤치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투명하고 단단한 막 같은 것이 생겨 버린 것 같았다. 바로 앞을 스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한없이 멀었다.
보이지 않는 막을 뚫고 저편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돌아가야 하는데.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득한 고립감. 서늘한 외로움. 어두운 혼돈.
그런 것들이 문비를 옭매어서는 어딘지 모를 깊은 바닥으로 자꾸만 끌어당겼다. 이제껏 문비가 직시한 적 없는 심술궂은 운명의 민낯이 웅크렸던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비웃었다. 비교적 평탄했던 삶이 그야말로 지독히도 잔인한 농담 같은 인생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 벤치에 얼마 동안이나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절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마디마디를 어찌어찌 딛고 건너서 집으로 돌아오긴 했나 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는 문비의 시야를 채우는 풍경이 익숙했다. 집의 거실이었다. 해가 지는지 창 너머 서쪽 귀퉁이로 먼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속여 본다.
꿈이었던 거야. 난 병원에 가지 않았던 거야. 내 눈이 머는 일 따위는 없어.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 없을 거야.
머리를 흔들던 문비가 거실 탁자 위에 덩그마니 놓인, 스테이플러 찍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목록에 흩뿌려진 생경한 낱말들이 문비를 엄혹한 현실 앞으로 끌어낸다.
LHON(레버씨 시신경 위축증). 룩셈부르크의 미토텍이 발표한 SKQ1의 임상 2상 결과. 프랑스 젠사이트 바이올로직스의 GS010 임상 2상 보도자료. 비타민 B12, 비타민A, 비타민C, 비타민E. 일반 명칭 이데베논 즉 Raxone 유럽 승인 시판…….
진료실을 나올 때 의사가 참고삼으라며 종이를 건네던 기억이 난다.
반으로 접은 종이를 멍하니 서 있는 문비의 에코백에 넣으면서 그는 다른 병원을 찾아 다시 진료 받아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자신의 진단이 오진이었기를 자기도 바란다고 했다. 앞으로 추적 관찰해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진행 속도가 빠른 것 같지는 않다고도 했다.
종이를 찢어 버리려는데 맨 마지막 줄 아래에 붙은 티거 스티커가 눈길을 붙잡았다. 스티커 위쪽에 적힌 몇 줄의 손글씨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 찢어 버리지 마세요. 지금 찢으면 나중에 인터넷 검색으로 다시 찾아 정리하는 수고를 하게 될 겁니다. 삶이란 자고로 소중한 거니까요. 볼 수 있는 사람에게나 볼 수 없는 사람에게나 매한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