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화분 하나가 돌아와 있었다. 문비보다 나이가 많은 키 큰 행운목이 사는 화분이었다. 엄마는 그 나무를 운목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 역시 문비보다 나이가 많았다.
누가 집에 놀러오면서 선물로 들고 온 것이라 했다. 당시에는 수경재배 상태였는데 어느 순간 나무 둥치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해 귀처럼 매달린 푸른 가지만 잘라 물에 담아 키우다 다시 화분으로 옮긴 것이라고 문비는 들었다.
운목이는 강인한 생명력에 비해 꽃에는 인색했다. 남의 집 행운목들은 육칠 년에 한 번은, 어떤 건 오 년만에도 향기 짙은 흰 꽃을 피운다는데 운목이는 도무지 꽃 소식이 감감이었다.
혹시나 싶어 문비는 잎들의 한복판을 헤집어 본다. 꽃대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운목이가 영영 꽃을 피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안 될 까닭도 없었다. 단정한 줄기와 반드르르 푸른 잎사귀만으로도 눈과 가슴을 시원히 맑혀 주는 나무였다.
엄마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할 때 화분들은 모두 채선 이모네로 이사시켰다. 문비는 채선 이모에게 부탁했다. 짐이 되지 않는다면 그 화분들 계속 맡아 주셨으면 한다고. 채선 이모도 흔쾌히 받아들였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비어 있는 집이 너무 삭막하다고 생각하셨나, 채선 이모가?
어쩌면 냉장고에 채선 이모가 남긴 메모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 문비가 주방으로 향했다. 과연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고정해 놓은 쪽지가 있었다.
내용인즉 운목이만은 꼭 문비한테 돌려주라는 엄마의 당부가 있었다고. 문비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이모가 왔다갔다 관리할 테니 신경 쓸 것 없다고.
문비는 채선 이모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말았다.
채선 이모네는 온 가족이 채선 이모의 부모님 댁에 가 있는 참이었다. 인우의 귀국 첫 일정은 언제나 외가에 방문해 외조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채선 이모가 무남독녀라서 그녀의 부모님께 손주라고는 인우네 형제뿐이었다.
운목이를 돌려주라고 하면서 엄마가 더 보탠 말은 없었는지 물어보려던 것이었는데, 그런 게 있었다면 채선 이모가 어련히 알아서 전해 줬을까 싶었던 것이다.
-병원 갔어요?-
라한의 문자메시지였다.
-깜빡 잊고 집에 들어와 버렸어요. 내일 갈게요.-
-꼭 가는 거예요.-
-그럴게요.-
곧 이어 사진메시지가 떴다. 살구나무에 기대어 자라는 둥근잎나팔꽃의 이파리들을 촬영한 것. 그건 완벽한 형태의 하트, 그린 하트들. 살아 있는 하트의 물결.
가만히 내려다보며 미소 짓던 문비의 가슴이 뭉클 저려왔다. 동화 같아서. 그 산골짜기의 사람들과 거기에서 일어난 일들이 다 동화 같아서. 더럭 겁이 나서. 어느 날 갑자기 동화가 끝나 버릴까 봐.
멍하니 서 있던 문비가 엄마 방으로 갔다. 책상 위 동전 통을 뒤집어 쏟아 작은 열쇠 하나를 찾아 들었다. 엄마가 중요한 서류들을 보관하는 함의 열쇠였다. 함은 장롱 안 이불들 사이에 들어 있었다.
문비가 집에 온 건 뜻밖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세입자가 집을 사고 싶어 한다고 했다. 문비로서는 영문을 모를 소리였다. 사태를 파악한 그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문비의 엄마 정인이 세놓은 주택이 한 채 있다는 것. 거기에 오래 세 들어 살던 일가족이 그 집을 샀으면 한다는 것. 이정인씨 휴대 전화가 결번이기에 이정인씨가 만약을 대비해 일러 준 비상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는 것.
까맣게 몰랐던 사실. 갑자기 나타난 가외의 집 한 채. 문비는 황당했다. 주변 정리를 그렇게 철저하게 하고 떠난 엄마가 이건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았을까.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처분해 버렸으면 편했을 걸.
아무래도 아픈 상태였으니까, 잊어 버렸던 것이라고. 엄마도 사람이니까, 완벽할 순 없었을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며 문비는 함을 열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서류들이 나오고 그것들의 맨 아래에서 오래된 등기부등본이 나왔다. 주소를 보니 부동산 중개업자가 말한 그 집이 맞았다. 발급 연도를 확인한 문비의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문비가 태어난 그 해였다. 어쩌면 이 집……! 기지개 켜는 상상력을 문비는 일단 억눌러 나중으로 미룬다.
상상력. 문비가 말도 트기 전부터 엄마가 강조했던 덕목이었다. 상상력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의 엄마는 꼭 상상력 만능주의자 같았다. 엄마의 지론에 따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들은 바람직한 상상력의 작용이며, 나쁜 일들은 제대로 된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분에 넘치는 권력을 쥐고 휘두른 탓이었다.
서류 뭉치 아래에서 검푸른 벨벳 주머니가 나왔다. 끈이 달린 작은 주머니를 열어 손바닥에 털었다. 반지 하나가 톡 떨어졌다.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구식 디자인의 금반지는 누가 봐도 결혼반지였다.
얼마 동안 반지를 바라보던 문비가 반지 주머니와 나란히 놓여 있던 또 하나의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손뜨개로 뜬 하얀 주머니 안에서 나온 건 카세트테이프였다. 작게 ‘인어공주’이라고 쓴 볼펜 글씨를 문비는 한눈에 알아봤다. 다정한 필체는 엄마의 것이었다.
등기부등본과 반지, 카세트테이프를 따로 챙긴 문비가 함과 열쇠를 워래 있던 자리에 두고 엄마의 방을 나갔다.
거실 소파에 다리를 접고 앉은 문비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엄마가 그 집을 정리하지 못한 것과 결혼반지를 계속 간직했다는 건…… 일말의 미련 같은 것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 집, 아마도 엄마와 아버지가 함께 살던 집이겠지. 이혼하면서 아버지가 엄마에게 집을 줬겠지. 문득 집을 보고 싶어진다.
문비는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보고 싶다고, 내일 그 집을 보러 가도 될지 세입자에게 묻고 양해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내 그쪽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세입자가 쾌히 승낙했다고, 내일 약속된 시간까지 자신의 사무실로 오면 된다고 했다.
감사를 표하고 전화를 끊은 문비가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다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