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인우랑 이렇게 많이 놀았어요. 옛날엔 이 숲에 하늘다람쥐도 살았었어요. 근데 언젠가부터 보이질 않네요.”
“날다람쥐?”
“아니고, 하늘다람쥐.”
“그게 그거 아닌가?”
“절대 아니에요. 하늘다람쥐랑 날다람쥐는 억새와 갈대가 다른 만큼이나 서로 다른데.”
“억새와 갈대가 다른 만큼이라면 보통 다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텐데?”
난감한 빛으로 라한이 말했다. 문비의 세심한 고지식함이 귀여워서 부러 어기대는 것이었다. 답답함으로 찌긋해지는 그녀의 눈썹이 손가락을 대고 따라 그리고 싶도록 예쁘다.
“억새는 흰색이나 은색, 갈대는 갈색. 하늘다람쥐는 등쪽이 회색이나 회갈색이고 배쪽은 흰색, 날다람쥐는 등쪽은 주로 갈색이고 배쪽은 등보다는 밝은색. 억새보다 갈대가 더 높게 자라는 편이고 갈대는 습한 곳에 서식하고. 하늘다람쥐는 몸길이가 이십 센티미터가 채 안되고 날다람쥐는 그 두 배쯤이고.”
열거하는 태도가 심각하리만치 진지해서 라한은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문비의 엄격한 눈빛을 받고는 움찔 구겨 참았다.
“확실히 다르네, 달라. 그러니까 희고 작다 싶으면 하늘다람쥐와 억새, 갈색이고 좀 크다 싶으면 갈대와 날다람쥐, 이런 식으로 기억하면 되는 거죠?”
끝까지 잘 들어준 그를 칭찬하는 의미로 문비가 사풋 웃었다.
“그런 셈이죠. 아, 인우 들어왔대요. 다음 주말에 세진이랑 같이 여기 온대요.”
상큼한 눈매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것 하나로 라한의 마음에는 일면식 없는 문비의 친구들에 대한 호감이 싹텄다. 그들이 기다려진다. 그들이라면 무조건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소개해 줄 거죠?”
“그럼요. 정말 괜찮은 애들이에요.”
라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세진은 그를 무척이나 궁금해 하고 보고 싶어했다. 세진의 이번 방문은 사실상 문비보다 라한을 보러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우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인우가 얼마나 놀랄지를 생각하면 문비는 즐거웠다.
“아까 눈 감으면서 뭘 기대했던 거예요?”
놀리는 문비를 짐짓 원망스럽다는 듯이 응시하던 라한의 눈빛이 짙어졌다.
“이런 거?”
라한이 문비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당기면서 입술을 가져갔다. 말린 청귤을 우린 물을 마신 그녀에게선 청귤의 향이, 솔잎차를 마신 그에게선 솔향이 났다. 아마도 둘은 같은 기대를 예비했으리라. 어쩌면 서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주 더 절실하게.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두 얼굴이 방향을 바꿔 교차했다. 두 입술은 좀 더 대담하고 깊게, 동시에 물푸레나무 잎사귀를 훑고 가는 가만바람의 나긋함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손이 그의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가장 정직하고 바람직한 전령이 된 입술을 타고, 시냇물 흘러가듯 마음이 흘러 오갔다. 머리 위 가지들이 흔들릴 때마다 투명하게 끓는 빛이 잎사귀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와 젊은 두 정수리에 노랗게 고였다.
여름빛이 천지 사방 그들먹했다. 내피에 단단히 각인되어 망각 앞에 몰락하지 않을 여름빛. 삶의 어떤 겨울에도 지지 않을 여름빛.
“집에 다녀올 일이 있어요. 며칠 걸릴 것 같아요.”
소풍의 흔적을 말끔히 정리하고 거둬 시냇가를 걸으면서 문비가 알려줬다.
“며칠이면 정확히 얼마나요?”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날들이 벌써부터 서운하고 아쉬운 듯 라한이 문비의 손을 잡았다.
“글쎄요. 한 사흘쯤?”
“이틀, 이틀로 해요. 하룻밤만 지내고 오는 것으로.”
오롯하게 와 닿는 애틋함이 문비의 가슴에 달콤한 파문을 일으켰다. 라한의 손에 잡혀 있는 손가락을 굼실거리며 문비는 속말을 곱게 묻었다. 나도 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 없는 그 어디에도.
“노력해 볼게요. 최선을 다해.”
“약속한 거예요.”
라한이 문비의 어깨를 살짝 안았다. 굳이 말에 담지 않은 마음을 그는 청명한 하늘 낮달에 걸어 둔다. 따라가겠다고 떼라도 쓰고 싶지만 참는 거예요. 매력 없는 남자라고 할까 봐.
두 사람은 늘 그렇듯 다리목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갈라졌다. 라한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제 자리에서 문비의 뒷모습을 지켰다. 머지않아 그녀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 것이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민소매 아래로 드러난 뽀얗고 동그란 어깨, 가녀린 등이 오늘따라 안쓰럽다 싶은 순간 문비가 허방을 짚고 기우뚱했다.
“괜찮아요?”
순식간에 달려가 문비를 부축하는 라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괜찮아요, 별 거 아니에요.”
한 손으로 왼쪽 눈을 가린 문비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다시 오른쪽 눈을 가린 채 주위를 둘러봤다. 라한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차분히 바라봤다.
“세밀한 그림을 그리다 보니 눈의 피로도가 높은 편이에요. 오른쪽 눈이 자기 좀 신경 써 달라고 시위하나 봐요. 얼마 전부터 가끔씩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방금 또 그러더라고요.”
문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일 집에 가는 길에 병원부터 가 봐요. 체크하고 즉시 연락 줘요.”
라한이 당부했다.
“병원은 무슨…… 그냥 눈을 좀 쉬어주면 되는 걸요. 마침 집에 다녀오는 며칠은 그림 못 그리니까 눈에는 휴식인 셈이잖아요. 그거면 돼요. 정말 별 거 아니에요.”
아직도 심각한 기색이 남은 라한을 안심시키려는 듯 문비의 말투는 밝고 씩씩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래도 병원 진료는 받아요. 눈 피로한 일 하는 사람이니까 눈 관리 차원에서라도요. 네?”
“네네, 알겠습니다요. 어째 잔소리 대마왕 기질이 엿보여. 흠, 그건 좀.”
팔짱을 낀 문비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고, 아까 말했다시피 체크하고 즉시 연락 주는 거예요?”
눈을 똑바로 맞추고 라한이 분명하게 못을 박아 일렀다.
“알았다고요.”
콧잔등을 찌그러뜨려 보이며 문비가 대답하고서야 라한의 낯빛이 한결 편안하게 누그러졌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잔소리 대마왕의 오명 따위 기꺼이 뒤집어쓸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 문비를 라한이 그녀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비가 다가가자 그는 알맞게 식힌 당근죽을 보온병에서 따라 내밀었다.
“아침 안 먹었죠?”
문비는 말썽 피운 아이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끄덕였다.
기름에 볶은 당근을 잔뜩 넣어 빛깔이 노을처럼 고우면서 적당히 묽어 목 넘김이 부드럽고 맛이 고소한 죽을 마시며 문비는 충일감을 느꼈다. 먼 길을 배웅해주고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희구해 주는 사람이, 엄마의 부재가 주는 결여를 견디고 다스릴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 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