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by 화진


잣나무와 소나무, 물푸레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져 그려내는 숲 그늘 아래 계곡을 따라 개울은 이어졌다. 소沼라고 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지만, 좁아지는 물목을 끼고 냇물이 제법 모였다 돌아나가는 물굽이였다.


냇가에 작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한여름 더위가 무색한 그 명당자리가 최근 문비와 라한의 야외 카페랄지 소풍 장소였다. 덥고 나른한 한낮의 한때를 두 사람은 주로 그곳에서 보냈다.


도란도란 편안하고 소소한 담소를 나누거나 눈앞의 정경을 그저 물끄럼 바라보거나 돗자리에 눈을 감고 누운 채로 자연이 내는 조용하고도 소란한 음계에 귀 기울이거나 하는, 한가로운 겨를이었다. 잠자리, 꿀벌, 나비가 이따금씩 두 사람의 돗자리를 인사차 방문하고 갔다.


커피와 음료, 과일이나 케이크와 같은 먹을거리는 번갈아 준비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문비는 커피 내리는 일은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원칙을 고수하면서 섬세한 그녀의 성향이 커피 내리는 일과 상성이 좋다고 엄마인 정인이 평한 바 있었다. 그런 성향은 식물학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주효했다.


깨금이는 가끔씩 함께했지만 은성은 거의 항상 빠졌다. 어렸을 때는 허약 체질이었던 은성은 그 시간대에 잠깐씩 눈을 붙이는 습관이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었다.


문비는 깨금이와 훌쩍 가까워져서 이제는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상황도 가능해졌다. 무섬증이 어느 찰나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우정과 신뢰가 대신하는 기적 같은 경험이 문비에게도 찾아왔던 것이다.


개와의 교감, 그 뿌듯하고 따듯한, 특별하고 아름다운 세계. 그런 느낌에 이제라도 눈떠서 다행이라고, 널 만나서 기쁘다고, 문비는 어느 날 깨금이에게 가만 고백했다. 깨금이는 다 안다는 듯 웃으며 황금의 실 같은 털이 늘어진 꼬리를 흔들었다.


개들 중에서도 깨금이가 그리고 골든리트리버 종이 제일이라고 문비는 덧붙였다. 말하자면 골든리트리버 종의 깨금이는 가문비에게 개에 관한 한 첫정이라고. 깨금이 너도 알겠지만 정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건데 그 중에서도 으뜸이 첫정이라고.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문비가 도착했을 때 라한은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물굽이 가장자리에 들어가 돌들을 들추고 있었다. 열목어와 가재를 찾는 것이었다. 잡을 목적이 아니라 그저 술래잡기였다. 라한은 그 술래잡기를 즐겼다.


빛의 각도에 따라 금빛 혹은 은빛으로 헤엄쳐 달아나는 열목어를 보는 라한의 표정에 순진무구한 소년이 얼비쳐 나왔다. 그 해맑음에서 문비는 은세를 떠올렸다.


자신만의 소년을 향한 막막한 그리움을 저물녘 그림자처럼 길고 무겁게 끌며 어느 이국 낯선 거리를 적적히 쏘다니고 있을지 모를. 애달픈 그녀. 부디 안녕하기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문비를 발견한 라한이 물가로 나왔다.


“조금 전이요. 물고기랑 노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열목어는 말만 들었지 여기 와서 처음 봤거든요.”


돗자리를 펴면서 라한이 멋쩍게 미소했다.


“실은 보기 좋았어요. 자, 이리 앉아서 눈 좀 감아 봐요.”


“눈 감으라는 말을 그렇게 무덤덤하게?”


은근하고 의뭉스런 표정을 지어 보인 라한이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뭔가 장난을 치리라는 가늠은 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당하자 라한은 소스라치면서 눈을 번쩍 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동물이나 새 같은 것이 목덜미를 쓸고 간 감각이 도돌도돌 소름으로 남았다.


“뭐…… 였어요?”


꺼림칙하게 목을 털며 라한이 물었다.


“다람쥐 꼬리?”


허리 뒤로 손을 감춘 문비의 웃음은 수상쩍었다.


“다람쥐 꼬리면 양호한데, 다른 뭐 이상한 거 아니죠?”


도마뱀에 당한 기억이 있는 라한으로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내 봐요. 건네줄 테니까.”


“아니아니, 그냥 보여줘요.”


상체를 뒤로 비스듬히 물리면서 라한은 여전히 의아하다. 다람쥐 꼬리라면 다람쥐 한 마리를 통째 숨기고 있다는 건가? 그건 좀 힘들지 않나? 그럼, 꼬리만? 그건 좀 엽기적이니까, 그럴 리는 없고. 분명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것이다.


“짠, 어때요? 맞죠, 다람쥐 꼬리?”


라한은 확 밝아진 얼굴로 문비가 내놓은 것을 받아 들었다.


“이거 나뭇가지잖아요. 낙엽송?”


부드러운 녹색의 침엽이 복슬복슬 매달린 모양새와 부들부들한 느낌은 가히 다람쥐 꼬리와 유사했다. 나뭇가지인데 속심은 없고 껍질만 있는 그것으로 라한은 눈을 감고 목을 쓸어 본다. 정체를 모를 때와 달리 기분이 좋다.


“나오는데 마루에 그 가지가 떨어져 있잖아요. 낙엽송은 꺾인 부분의 껍질을 조금 벗겨내고 드러난 속심이랑 껍질을 양손으로 잡고 확 잡아당기면 분리가 잘 되거든요. 자 이거, 속심.”


문비가 피크닉 바구니에서 하얗게 뼈만 남은 나뭇가지를 꺼내 내밀었다. 라한은 한 손에는 잎들이 수북한 껍질을 한 손에는 희고 매끈한 속심을 들고 신기하게 번갈아 봤다. 나무 냄새가 눈에 보일 듯이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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