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마주침

by 화진


문비는 좀 어리둥절했다. 아까의 심드렁함과는 상반된 은세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같이 손을 흔들기는 어색하고 무반응은 매정한 것 같고. 엉거주춤 서 있던 문비는 목례와 함께 우산을 살짝 숙였다 들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요란한 빗소리와 좀 전의 피아노 소리가 닮아 있다고 문비는 생각했다. 은성은 집을 비웠고 라한은 작업에 몰두해 있을 시간이었으니 그 피아노 소리의 주인공은 은세일 거라고 문비는 확신했다.


의외였다. 태무심하게만 보이던 사람의 손끝에서 그렇게 격정적인 연주가 나오다니. 하긴, 영혼의 바다 어딘가에 폭풍우 한 자락쯤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서은세라는 사람도 예외는 아닐 테다.


한갓지고 고요한 산중에서는 한낮을 가로지르는 소나기 한 줄기도 좋은 이벤트가 된다. 내리는 동안에는 시원스럽고 활기찬 소리가 좋고 그치고 나면 물방울 똑똑 떨구는 나무와 풀의 경치가 좋다. 운이 좋으면 하늘에서 산머리로 드리우는 무지개도 볼 수 있다.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얼마간의 망중한에 빠져 있던 문비가 이윽고 작업 책상에 앉았다. 이번 그림은 닭의장풀, 얇고 하늘하늘한 꽃잎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 보고 싶어서 수채로 채색할 참이었다. 물을 만나 맑게 녹은 푸른 물감이 붓놀림에 실려 꽃으로 피어난다.


남교수에게 닭의장풀은 꽃이라기보다 나물이었다고 했다. 연한 줄기와 잎을 데쳐 양념해 무쳐낸 그 나물을 그의 모친은 명지나물이라 불렀다고. 풋내와 양념이 어우러져 입맛을 돋우던 그 맛은 아직 생생하기만 하다고.


그런데 이제는 모친도 안 계시고 혀도 그 시절의 혀가 아닌지라 더러 명지나물 먹어볼 기회가 있어도 좀처럼 기억의 그 맛에 포개어지질 않더라고.


같은 음식이어도 미묘하게 어긋나는 맛에 대해서라면 문비도 안다. 공연히 속이 헛헛해 잠 안 오는 밤에도 문비가 비빔국수를 시도하지 않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진정으로 그리운 건 맛이 아니라 그 맛을 내던 사람이다.


꽃잎을 완성하고 잎을 칠하려는데 누가 창문을 두드렸다. 한실댁이었다. 감자를 몇 개 미리 캐 봤다며 흙 묻은 햇감자가 든 소쿠리를 내밀면서 저녁에 수육과 수제비를 할 거라고 먹으러 오라고 했다.


한참 뒤에는 은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읍내에서 막 돌아왔다고, 이번 음식에 문비가 준 허브솔트를 쓸 거라고, 저녁을 먹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한실댁과의 선약을 내세워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서 문비는 다행스러웠다. 삼남매 사이에 끼는 게 왠지 모르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한실댁의 집으로 내려간 문비는 세 할머니들과 함께 솔잎 수육과 앉은뱅이밀 수제비를 먹었다. 수육은 한실댁, 수제비는 내앞댁의 솜씨였다. 흰돌댁은 얼린 홍시를 가져와서 후식으로 냈다.


조각달이 걸린 밤길을 되짚어 돌아오던 문비는 차를 세워 두는 공터 옆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건네며 은세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를요?”


이상하게도 문비의 귓전에 은세가 연주했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조급하고 불안정한 동시에 과감하고 열정적이던 선율.


“네. 문비씨를요.”


은세에게서 향긋하면서도 시금한 내음이 났다. 와인 냄새였다.


“무슨 일로요?”


“나 뭐 시원한 거 한 잔 줄래요? 와인을 많이 마셨더니…….”


문비가 묵는 별장 방향으로 앞장 서 걷는 은세를 문비는 말없이 따라갔다. 외등이 빚어낸 빛과 음영이 어른거리는 은세의 뒷모습이 어쩐지 스산해 보였다.


“알로에 에이드도 있고 차가운 녹차도 있어요. 아님 시원한 물 드려요?”


은세를 거실에 앉힌 문비가 물었다.


“녹차 괜찮겠네요.”


문비가 차가운 녹차 두 잔을 들고 돌아왔을 때 은세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실 탁자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로 거기 장식된 타일의 만다라 문양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다라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기라도 하는 듯이.


문비도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드세요.”


투명한 잔에 담긴 녹차가 만다라와 시선 사이를 가로막고서야 은세는 자신이 어디에 누구와 있는지 상기한 듯했다.


“아, 고마워요. 오늘의 와인은 기분 좋아서 마신 거예요. 좋아서…….”


말과는 달리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은세는 제풀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기다리셨어요?”


은세가 문비를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취기가 오른 낯빛은 아니었다.


“원래는 이번에 나가면 안 돌아올 생각이었죠.”


무슨 말인지 문비는 알 수 없었다. 은세의 말이 짧거나 간단하지 않으리라는, 재촉이나 추임새가 없어도 끝까지 이어지리라는 짐작은 들었다.


“근데 그냥 몇 달 방랑하다 돌아오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그렇게 됐어요.”


마치 너 때문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은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드리아해의 일몰 그 붉고 푸른 절경이 주는 쓸쓸함에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돌아올 것이다.


단순한 술주정은 아닌 것 같고. 이런 얘기를 하필 나를 찾아와 늘어놓는 까닭이 무엇일까, 문비는 궁금해졌다. 그래도 난처하거나 싫지는 않았는데 그건 은세에게서 배어나는 분위기에 모른 체하지 못할 비장함 같은 게 서려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