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가 된 기억

by 화진


“왜 저렇게 횡설수설하나 싶죠? 참아 주기 힘들죠?”


“아니,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 하기 힘든 말을 하려나 보다 싶은데, 오늘 처음 본 사이에 하기 힘든 말이 왜 있을 것이며, 있다면 어떤 말일까, 모르겠다.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솔직담백한 문비를 보며 은세의 눈이 웃었다. 내심 흠을 잡아 보려 진종일 애썼으나 허사였다. 문비는 은세가 보기에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남자의 눈에 충분히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자일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밤만 참아 줘요. 내가 나를 봐도 나답지 않은 밤이지만. 문비씨 말대로 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라서 자꾸 이러는 거 맞으니까.”


그러면서도 꼭 말해야겠는,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겠는 마음보가 은세는 스스로 우습고 질리는 기분이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


“한 번 상상해 볼래요? 아버지 재혼을 앞두고 마련된 상견례 자리에서, 남몰래 좋아하던 남자애를 마주치는 장면.”


녹차 잔 표면에 맺힌 습기를 문지르던 문비의 손가락이 딱 멈췄다. 이것이었다. 아까 낮에 문비가 라한과 함께 있다 은세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석연찮은 예감 혹은 직감. 하도 터무니없어서 실소와 함께 날려 버렸던.


“사실은 라한이한테 말할 생각으로 여기 왔던 거예요. 나, 해외 어디 먼 나라에 가서 잠적해 버리겠다고. 그렇게 가족들이랑 연 다 끊고 너 기다리겠다고. 나한테 올 거라는 희망 같은 거 없이, 영영 오지 않을 거라는 절망도 없이, 그저 기다리는 거 하나만 하면서 살 거라고.”


문비를 보는 순간, 문비와 함께 있는 라한을 보는 순간, 은세는 깨달았다. 이미 절망에게 덜미를 낚아채였다는 걸. 그가 다른 한 여자의 한 남자가 돼 있다는 걸.


타인이었던 세월 그 이상을 가족이라는 틀에 묶여 살아오는 동안 은세는 단 한 순간도 라한을 가족으로 인정한 적 없었다. 이것은 그를 향한 은세의 감정이 옅어지거나 다른 빛깔로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부러 지킨 마음이 아니었다. 차라리 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 집에서 그를 가족으로 여기기를 요구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만큼 그에 대한 감정과 마음은 도리어 명백해지고 확고해졌던 것이다.


풀라 아레나 얘기를 하면서 은세가 라한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같이 갈래? 장난처럼 던졌던 그 말이 은세로서는 최선을 다한 단 한 번의 고백인 셈이었다.


“왜 저한테…….”


문비는 조용조용 떼어 놓던 말끝을 흐렸다. 얼떨결에 떠맡은 처연한 비밀이 조심스러웠고, 은세가 원하는 게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아니라는 정도는 가늠하고 있었다.


“알았으면 해서요. 문비씨가 뭘 가졌는지.”


얼마나 귀한 마음을 가졌는지.


라한을 따르는 여자들은 항상 넘쳐났고 간혹 가벼운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은세는 동요한 적 없었다. 은세는 그가 단 한 여자만을 사랑하도록 태어난 남자임을 알 수 있었고, 그런 그를 각성시킬 만한 여자는 그의 주변에 보이지 않았었다.


“상처 주지 말아요. 상처 주면 내가 용서 안 해요.”


눈빛으로 문비가 물었다. 어째서 나만 그에게 상처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죠? 상처 주는 사람이 그일 수도, 그래서 내가 상처 받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라한이 쟤는 절대로 문비씨 상처 못 줘요. 아니, 안 줘요. 내가 알아요. 문비씨도 막연히 느끼고 있죠? 쟤 그런 면에서 바보라는 거. 많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문비는 은세의 감정을 존중했고 자신의 감정과 자신들만의 관계성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엄밀한 잣대로는 지금 은세의 말들이 월권이었지만 문비는 불쾌해 하지 않았다.


이런 말들을 하기 위해 은세가 자신의 가장 깊고 연약한 속내를 선뜻 내보였다는 사실과 그 용기를 마찬가지로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문비는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짜로 나, 기분 좋아서 마신 거예요. 라한이가 행복해서, 작은 언니한테 친구가 생겨서, 그래서 기분이 무지 좋거든요. 아, 화장실 잠깐 써도 되죠?”


“네, 저쪽이에요.”


은세의 걸음걸이는 반듯했다. 술이 세든가 생각보다 덜 마셨든가, 그런 모양이었다. 혼자 남은 문비는 은세가 한사코 응시했던 만다라 문양을 눈으로 따라가 봤다. 그러다 불현듯 언젠가 술 한 잔 걸친 엄마가 들려준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라는 시였다. 혼자 남은 화자가 그 사이 눈물을 훔치고는 친구가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는다는 내용의 그 시를 읊조리고 나서 엄마는 말했었다. 모르는 일이잖니? 친구도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고 왔을지도.


문비가 주방으로 가 소형 와인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왔다.


와인을 채워 놓은 사람은 채선이모였다. 잠들기 힘든 밤에 한두 잔씩 마시라고 했지만 아직 한 병도 따지 않고 그대로였다. 엄마에 대한 회상에서 비롯되는 불면이라면 애초에 와인 한두 잔으로는 어림없는 것이었고, 만취하여 자아가 흐릿해진 상태로 곯아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은세의 얼굴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이마 언저리의 잔머리도 젖었다.


“세수를 했더니…….”


은세가 웃음 지었다.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수건 드릴게요.”


일어서려는 문비를 은세가 도로 주저앉혔다.


“아니에요. 시원하고 좋아요. 아, 와인. 안 그래도 술이 깨는 것 같아서 몇 잔 더 마셔야 잠 오겠다 싶었는데, 마음이 통했네요?”


“그러게요. 여기, 받으세요.”


문비가 경쾌하게 화이트 와인을 따라 줬다. 속마음을 엿본 적 없는 사람처럼.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와인 한 병을 비웠다.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쓸데없이 진지한 잡담도 나눴다.


이를테면 현대인이 1에서 4퍼센트 사이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갖고 있다든가, 열대 우림에 서식하는 크리코펠리아 파라디시라는 뱀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백 미터나 날아다닐 수 있다든가 하는. 뜬금없고 사소한 이야기, 속뜻은 없고 사실만 있어 부담 없는 이야기.


돌아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선 은세의 두 눈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고 수없는 별이 와락 쏟아졌다.


은세는 자신의 안에서 별자리가 된 기억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랑했던 소년, 그 소년의 상흔, 소년이 상흔을 딛고 근사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 그런 기억은 누가 뭐래도 은세만의 것, 다른 누군가가 아무리 깊이 라한을 사랑해도 가져갈 수 없는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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