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인어공주라……. 노래? 악기 연주? 너무 뻔한 추측인가? 그렇다면…… 동화? 동화 구연?
몸을 벌떡 일으킨 문비가 작은방으로 갔다. 모녀가 옷방으로 쓰는 그 방에는 쓰임새를 다했지만 버리기 아깝거나 버리는 걸 잊어버린 물건들도 보관돼 있다.
문비가 찾는 것은 카세트테이프리코더였다. 예전에 엄마가 쓰던, 라디오 겸용의 카세트테이프리코더. 엄마가 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작은방 어딘가에 숨어 있을 터였다. 한쪽 벽을 따라 쌓여 있는 상자와 수납함 들을 문비는 차례로 뒤지기 시작했다.
있었다, 문비가 찾는 그것이. 모서리 쪽에 놓인 수납함의 맨 아래 칸에, 두꺼운 자주색 보자기에 꽁꽁 싸인 채로.
재생시킨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온 건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청아한 목소리가 동화 인어공주를 적당한 속도로 낭독했다. 투명하고 단단한 그러면서도 낭창거리는, 퍽 듣기 좋은 소리. 엄마 목소리는 확실히 아니었지만 문비에겐 어쩐지 서름하지 않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가 익숙하고 반가워 문비는 볼륨을 적당히 조절하고는 거실 바닥에 누워 귀를 기울였다. 바깥은 이글거리는 태양의 세상이었지만 실내는 에어컨 바람으로 선선했다. 문비는 어느 결엔가 스르르 선잠에 빠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녹음 구간이 끝났는지 빈 카세트테이프만 돌아가고 있었다. 낮잠 자는 버릇이 없는 문비가 어이 없이 실소하며 정지 버튼을 눌렀다.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괜스레 만지작거리는 동안 목소리의 주인공에 대한 문비의 궁금증은 조금씩 부피를 불려갔다.
이 날이 다 가기 전에 문비는 인어공주 카세트테이프를 한 번 더 재생시키게 됐다.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아 한 시간 넘게 뒤척거린 끝이었다. 침대맡에 카세트테이프리코더를 갖다 놓고 약 오 분 가량의 녹음 구간을 몇 번인가 되풀이 듣다 마침내 잠이 들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푸근한 풍채에 비해 깐깐한 인상이었고, 문비의 엄마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깐깐한 인상과는 달리 편안함을 주는 언동을 지닌 그녀의 사무실에서 그 집까지는 멀지 않았다.
뭉근하게 더위가 퍼지는 거리를 묵묵히 걸어 도착한 그 집 대문 옆 한 쪽 담장을 타고 덩굴장미가 무성했다. 여름이 깊어 꽃은 거의 지고 없었고 가지와 잎만 담장에 걸쳐서 혹은 담장 위로 솟아올라 푸른 윤기로 반짝였다. 살뜰한 가꿈을 받는 식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오래 묵은 식물이라는 것도 문비의 안목은 알아봤다.
“오래된 것 치고는 집이 깨끗하죠? 이정인씨가 몇 년에 한 번씩은 직접 살펴보고 보수할 데 있으면 보수해주고 그랬거든요.”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이 딸린 아담하고 예쁜 단층 주택은 구조는 좀 구식이어도 단정하고 아늑했다.
“지금 사는 사람들이 세 번째 세입자예요. 터가 좋은지 집 기운이 좋은지 하여튼 이 집 살던 사람들은 다 길게 있다가 살림살이 일어서 나갔어요. 지금 세입자도 여기 살면서 형편이 폈고, 마음에 드는 집이라고 아예 사겠다고 나선 거고.”
말을 마치고 초인종을 누르려는 그녀를 문비가 막아섰다.
“저, 마음이 바뀌었어요.”
“네?”
“안 들어가고 싶어졌어요. 죄송해요.”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심경의 변화였지만 별다른 이유나 거리낌 같은 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들어가 본들 뭣하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것뿐.
“아, 네.”
잠깐 의아해 있던 부동산 중개업자가 이내 시원시원한 태도로 끄덕이며 돌아섰다.
“세입자 분께는 기다리시게 해놓고 약속 안 지켜 죄송하다고 그리고 매매에 대해서는 제가 천천히 생각을 해보겠다고 전해 주세요. 매매하기에 앞서 상속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네, 그러죠. 저분들도 급할 건 없으니까요.”
그녀는 세입자에게 전화를 걸고 문비는 다시 한 번 집을 돌아봤다.
지난날 어느 젊은 부부가 그림처럼 살았을 집. 장미의 철이 끝나 흩어지는 꽃잎들처럼 사랑의 시간들이 흩어져 버린 집. 그 집에서 문비는 자신이 아직 이 별에 오기 전의 풍경을 더듬어 본다. 덩굴장미를 함께 심었을 부부가 장미의 철을 살던, 붉고 싱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 집의 풍경을.
문비는 가벼운 한숨에 상념을 실어 날려 보냈다. 그래 봐야 다 철 지난 풍경, 끝나 버린 설화 같은 내력.
“얘기 잘 전했고요, 저쪽에서 말하기를 충분히 생각해 보시되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십사 하네요.”
부동산 중개업자는 전달자가 아니라 당사자인 것처럼 간곡한 미소로 문비를 봤다.
“네.”
그녀와 헤어진 문비는 병원으로 갔다. 미리 예약하지 않은 탓에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기 전에 문비는 병원 로고가 붙어 있는 벽면을 찍은 사진메시지를 라한에게 보냈다. 바로 답 문자가 왔다.
-병원 로고만 있는 사진은 무효. 얼굴이 같이 나와야 유효.-
문비의 눈매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그런 사진은 함부로 보낼 수 없으니 암호를 대시오.-
그의 대답이 오기도 전에 문비는 병원 로고 옆에서 자신의 얼굴을 찍었다. 다른 대기자들의 눈치가 보였지만, 예전의 문비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그 일을 꿋꿋이 해냈다.
-보고 싶어요.-
다섯 글자가 도착하기 무섭게 문비가 사진을 전송했다. 라한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대기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문비의 차례가 왔다.
“오른쪽 눈이 가끔씩 시야가 뿌옇게 변해서요.”
의사를 향해 운을 떼는 문비의 어조는 담담하고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