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작용을 중단하는 식물들처럼

by 화진


그러나 문비는 이내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번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존의 틀을 유지하기로. 작업도 일상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지금 문비에게 중요한 건 의미가 아니라 은폐. 남들이 자신에게서 어떠한 변화도 낌새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밤이면 호흡작용을 중단하는 식물들처럼, 문비는 적어도 당분간은 바깥의 공허한 희망 따위를 흡수하지도 내부의 절망과 눈물을 내보내지도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실명 이후의 삶에 대해 마음먹은 바도 아직은 거의 없었다. 다만 질환의 진행과 시력의 상실을 최대한 늦춰 보자는 티거 의사의 조언과 처방은 따르기로 했다. 진행 중인 그림 때문이었다. 문비는 마지막이 될 식물학 그림 작업을 무사히 끝내고 싶었다.


적어도 올겨울까지는 시력에 큰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 들 때면, 그나마 진행 속도가 빨라 보이지는 않는다던 의사의 말이 어느 정도는 다행스럽게 다가왔다.


“점심 후에 커피 마시러 가겠다고 은성 언니한테 전해 줘요.”


다리목에서 각자의 길로 갈라지기 전에 문비가 말했다.


“그럴게요. 그림 열심히 그리고, 그때 봐요.”


“라한씨는 바이올린 열심히 만들고요.”


문비는 밝은 얼굴을 보이고 돌아섰다. 산머리에 걸친 햇살의 눈부심을 멀리 올려다보며 걷던 그녀의 표정이 차츰 가라앉았다.


오전의 그림 작업을 끝낸 문비는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얼마 전 한실댁이 가져다 준 더덕지고추장무침이 입에 착 감겼다.


설거지를 끝낸 문비가 냉장고에서 찹쌀가루를 꺼냈다. 커피에 곁들일 간식을 만들어 가려는 것이었다. 문비는 요리에 취미가 없었지 손맛이나 솜씨가 형편없지는 않았다.


한참을 바지런 떤 문비의 손끝에서 유자청의 건지를 팥소 대신 넣고 샛노란 달맞이꽃을 모양 살려 얹어 기름에 노릇노릇 지져낸 찹쌀부꾸미가 완성됐다. 달맞이꽃유자찹쌀부꾸미. 이름도 긴 이 간식은 달맞이꽃과 관련된 남교수의 글에 등장하는 추억의 맛을 재현해 본 것이었다.


접시를 잘 싸서 들고 문비는 건넛집으로 향했다.


“어머나, 부꾸미가 너무 예뻐. 이 노란 꽃 좀 봐. 문비씨, 이런 솜씨를 숨기고 있었구나.”


부꾸미 접시를 받아 든 은성이 감탄했다. 라한 역시 놀라움과 찬탄이 섞인 낯빛으로 문비에게 미소를 보냈다. 문비는 쑥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그 부꾸미에 얽힌 남교수의 사연을 두 사람에게 들려 줬다.


오래 전 어느 비 내리는 여름날, 지난 제사에 쓰고 남은 찹쌀가루로 부꾸미를 부쳐 내면서 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따 두었던 달맞이꽃을 하나씩 하나씩 곱게 얹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날따라 좀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남교수는 썼다. 어머니라는 외피 아래에 늘 숨겨져만 있던 여자가 혹은 소녀가 그 순간 설핏 엿보였기 때문이라고.


“아, 뭔가 찡한 얘기. 오늘이 비 오는 날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말하는 은성이야말로 감수성 풍부한 소녀 같았다. 문비는 그런 은성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런 누나를 포용과 애정이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라한을 보는 것 역시.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은성을 보고 있다가 그와 살짝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이 좋았다.


사랑을 담은 눈빛과 눈빛이 부딪칠 때 쏟아지는 보이지 않는 불티는 그 얼마나 찬란한가.


문비는 집중하려 애썼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으려고. 지금은 오롯이 눈앞의 아름다움과 좋은 것들, 좋은 사람들에게만 집중하자고.


라한이 바이올린 작업을 하러 간 뒤에도 문비는 남아서 은성과 시간을 더 보냈다.


“갔던 일은 잘 보고 왔고?”


물푸레나무 잿물로 염색해 푸른 기가 미미하게 도는 회색 실로 코바늘뜨기를 하면서 은성이 지나는 말로 물었다.


네 하고 짧게 얼버무려도 될 것을 문비는 말없이 은성의 뜨개질만 보고 있었다.


“그게요, 엄마 아버지 이혼 전에 사셨던 집인 것 같아서요.”


무슨 일로 집에 다녀왔는지 미리 언질을 줬던 것도 아니면서 문비는 머리 떼고 꼬리 떼고 몸통만 툭 던져 놓았다. 은성은 잠시 손을 멈추고 문비를 보면서 느리게 머리를 끄덕였다. 문비는 은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옳았음을 알았다.


“물론 저한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어째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기실 집을 파느냐 마느냐 같은 문제와는 차원부터 다른 고통스러운 고뇌가 문비에게는 있었다. 출생에 대한 의문. 그 의문의 열쇠를 쥔 사람은 아버지였고,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문비가 진정으로 하소연하고 싶었던 건 이런 고충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또한 끝내 말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만나는 일을 문비는 인우와 세진의 방문 이후로 미뤘다. 자신을 둘러싼 비밀을 어서 빨리 알고 싶은 조급증만큼이나 두려움이 컸다. 문비의 엄마 정인은 정신적으로 결벽한 사람이었고 그 손에서 자란 문비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문비를 두렵게 하는 건 자신의 출생에 대한 전모를 알고 나면 자신이 스스로를 어떤 각도 어떤 온도로 바라보게 될 것인가였다. 오래지 않아 맹인이 되리라는 예고만으로 이미 충분히 비관적인 상태였다.


“언니, 지금 뜨는 거 그거 바쁜 거예요?”


“아니야. 왜?”


“언니 노래가 듣고 싶어요. 피아노랑 같이.”


“그래? 어려울 것 없지. 신청곡 있어?”


은성이 뜨개질하던 걸 냉큼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아뇨. 그냥 언니 노래면 돼요.”


문비가 소파 등받이에 옆으로 몸을 기대고 팔을 올려 턱을 괸 채로 시선을 은성에게 두었다.


“뭐가 좋을까…….”


잠시 궁리하던 은성이 피아노 건반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노래하기 시작했다. ‘Oh Mary was a maiden.’으로 시작하는 올드팝이었다.


은성의 노래를 들으면서 문비는 편안했다. 마음껏 슬픈 얼굴을 할 수 있어서. Joan Baez의 The river in the pines는 그런 노래였다. 비애가 배어나는 선율, 비극적인 가사.


이전 09화드러내고 싶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