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허무는 밭일

by 화진


세진은 인우의 눈을 피해 문비에게 은근한 눈짓을 했다. 만약 널 순화시킨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사랑일 텐데, 네가 사랑에 빠진 걸 인우놈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세진은 즐거워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청소하자, 청소. 내일 아침 일찍 배추 심으러 가려면 얼른 자야 해.”


바쁜 척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문비가 재촉했다.


이튿날이 옅은 구름하늘 그리고 신선한 공기와 함께 찾아왔다. 산골짜기의 처서 무렵 새벽은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옛말이 무색치 않게 사늘했다.


문비 일행이 흰돌댁네 밭에 도착하니 벌써 일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인사는 거의 생략되다시피 간단히 건성건성 오가고 새참이 나오기 전까지 다들 맡은 일에 매진했다.


이쪽에서는 손바닥보다 작은 배추 모종을 도독한 이랑을 따라 심어 나가고, 밭의 반대편에서는 무 종자를 심어 나왔다.


배추 편과 무 편을 갈라 지정한 건 밭 주인인 흰돌댁이었는데 둘 중 그나마 더 수월하달 수 있는 무씨 뿌리는 일을 배당받은 일꾼은 라한과 은성, 세진이었다. 요컨대 농사일에 손이 좀 더 서툰 이들에 대한 흰돌댁의 배려였다.


흰돌댁은 새참을 하러 들어가고 내앞댁과 한실댁은 문비, 인우와 더불어 배추 모종을 심었다. 내앞댁은 모종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문비와 한실댁은 모종을 심고, 인우는 물을 줬다. 흰돌댁네 밭을 시작으로 내앞댁네 밭, 한실댁네 밭을 차례로 해치울 예정이었다.


산골인 데다 절기도 절기고 모시 휘장 같은 순백의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 더위가 심하지 않았기에 점심 식사 후 삼십 분 정도만 휴식하고 일을 서두르기로 했다. 초면인 사람들끼리의 보다 심도 있는 낯익히기가 그 휴식 시간 동안에 이뤄졌다.


세진은 일을 하는 동안 이미 은성 남매와 친근해져 있었다. 타고난 붙임성도 붙임성이거니와 그들에 대한 문비의 마음에 미리부터 충분히 동화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한과 은성 쪽에서도 세진의 스스럼없는 태도가 편안했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문비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일 터였다. 문비에게서 형체 없는 그늘과 슬픔 같은 것들을 다 걷어내고 나면 세진이 될 것 같았다.


후식으로 아이스커피가 나왔다. 내앞댁이 커피믹스를 아낌없이 넣고 탄 커피를 식힌 다음 페트병에 부어 냉동실에 얼렸다가 점심과 함께 내온 커피였다. 인우가 내앞댁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커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젊은이들이 저마다 동감의 말이나 제스처를 내놓아 노인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땀 흘리며 밭일을 하고 들밥을 먹고 나서 소나무 그늘에 앉아 마시는 달달하고 차가운 커피는 그 어떤 고급스러운 원두커피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떤 계기로 현악기 제작을 업으로 삼을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은 아니잖습니까.”


훌쩍 비운 커피 잔을 옆에 있는 납작한 돌 위에 내려놓고 인우가 물었다.


“어렸을 때 안네 소피 무터의 내한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저도 바이올린 연주 감상은 무터로 길을 텄어요. 무터야 뭐 두말 필요 없는 바이올린의 여제, 지금도 최고죠.”


약간의 동류의식에 고무된 인우가 이제야 악수를 청했다.


“솔직히 그땐 너무 어려서 연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는데 아무튼 무터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만은 입이 안 다물어지게 근사했습니다.”


악수에 응하며 라한이 말했다. 곡선의 동체와 직선의 현과 오래된 나무 특유의 결이 조화를 이룬 올드 바이올린의 섬세하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어린 꼬마의 눈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 바이올린이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건 그날 친부에게서 들었다. 하지만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무게와 빛이 진정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세월이 꽤 흐르고 나서였다.


“본능적으로 올드 바이올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꼬맹이라…….”


인우가 인정한다는 뜻으로 진지하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둘의 대화는 좀 더 이어졌다. 화제는 운동과 군대 시절과 축구와 축구선수를 넘나들었다.


이야기 도중 자신을 보는 은성의 시선을 느낀 인우가 미소를 띠며 목례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편인 은성은 마주 까닥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멋쩍어 하던 인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저만치로 가서 무슨 풀인가를 조금 꺾어들더니 그걸 다른 쪽 손바닥에 몇 번 내리쳤다. 그러고는 은성에게 다가갔다.


“저어, 누님.”


은성이 화들짝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인우가 풀을 들어 은성의 코앞에 내밀었다. 굳어 있던 은성의 표정이 차츰 말랑해지더니 마침내 인우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수박…… 냄새?”


웃으며 끄덕인 인우가 감추고 있던 손에 들고 있던 풀 한 포기를 또 다시 은성에게 건넸다. 같은 풀이지만 손바닥에 내리치지 않아 깨끗하고 꽃까지 한 송이 매달린 것이었다.


“상처를 내면 싱그러운 향이 나는데 어떤 사람은 수박 냄새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이 냄새라고 해요. 수박풀이라고도 하지만 진짜 이름은 오이풀, 옛날 말로는 외나물인 거 보면 오이 냄새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나 봅니다, 누님.”


“저는 수박풀로 부를래요. 꽃도 참 예뻐요.”


약간 길쭉하게 동글동글한 짙은 자주색 꽃은 얼핏 보면 꽃집에서 파는 천일홍과 비슷하다.


“나물로도 먹고, 차로도 마시고, 꽃에서는 염료도 얻는 아주 유익한 풀이라고 합니다.”


식물학자인 아버지에게서 주워들은 풍월을 인우가 유용하게 써먹는다.


“이 꽃에서 염료를요?”


은성의 눈이 반짝 빛났다. 천연염색의 좋은 재료와 빛깔을 얻었다는 기쁨의 빛이었다.


“예.”


“고마워요, 고마워요.”


인우는 은성이 왜 그렇게 고마워하는지 알 수 없어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뭔가 벽이 허물어진 것 같아서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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