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형태

by 화진


늦여름 숲속에 여명이 스며들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떠도는 새벽 냄새는 파랗게 싸하면서 습하고 청량했다. 희미하게 주저앉는 어스름과 희붐하게 일어서는 빛이 뒤섞여 안개가 없는데도 안개 속을 걷는 듯했다.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은 말이 없었지만 눈빛과 얼굴에는 숲에서 목격하는 동틀 녘의 신비롭고 경건한 감회가 넘쳐났다. 밤사이 함초롬해진 땅이 푸근하게 발걸음을 받아 안는 소리와 나뭇가지나 풀이 스쳐 스적대는 소리, 이름 모를 새소리가 침묵을 향긋하게 채색했다.


삼십여 분 남짓을 걸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날이 완전히 밝았다. 산꼭대기였다. 인우네 별장을 기준으로는 뒷산, 라한의 집을 기준으로는 앞산임 셈이었다. 몇백 년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킨 아름드리 소나무가 품을 활짝 열고 방문객을 맞았다.


산행은 급작스레 결정됐다. 어제 무와 배추 심는 일을 마치고 한실댁네에서 저녁을 먹던 도중 인우가 제안한 것이었다.


산 아래에서 봐도 봉우리의 윤곽 위로 돌올하게 솟아 있는 까닭에 동네 사람들이 이름삼아 큰소나무라고 부르는 그 나무를 인우는 누구보다 진중하게 쳐다봤다. 무언의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맡겨뒀던 무언가를 돌려받거나 맡고 있던 무언가를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옛날엔 무지 멀고 가파르게 느껴졌는데.”


인우는 여기에 와 본 적이 있었다. 열 살 남짓 먹었던 무렵, 문비와 함께였다. 겨울방학이었고 전날 내린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졌지만 제법 포근한 날이었다.


수분이 많아 잘 뭉쳐지는 눈을 굴려 여기저기에 눈사람을 만들어 세우며 놀던 두 아이의 눈에 불현듯 산꼭대기의 소나무가 들어왔다. 눈꽃이 흐드러진 소나무는 짙푸르게 갠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우뚝 빛났다. 겨울의 정령이 있다면 저런 자태일 것만 같았다.


두 아이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 큰소나무까지 올라가 보는 거야!


뭉치던 눈덩이를 두고 두 아이는 곧장 출발했다. 길도 모르고, 아니 애초에 길이 따로 있지 않은 행로였다. 아래에서 가늠하여 작정한 경로는 직선. 무작정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과하고 풀숲이 나오면 풀숲을 헤치고 절벽이 나오면 우회하면서 둘은 산을 올랐다.


약간의 두려움과 커다란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얼마간의 흥분을 안고 감행한 그것은 모험이었다. 두 아이 생애 최초의 모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고 험한 길, 서로를 격려해 가며 끈기 있게 산을 오른 끝에 두 아이는 큰소나무와 대면할 수 있었다.


그날, 수다스럽게도 깍깍대던 때까치 우짖음을 잊은 적 없다. 눈옷을 입은 숲속 하얀 눈밭에 찍힌 노루며 토끼 발자국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빛나던 문비의 이마를. 인우는 잊은 적 없다.


털실로 짠 비니 모자 아래로 비죽 나와 있던 땀에 젖은 잔 머리칼. 그 이마의 땀을 닦고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주고 싶었던 순간. 그러나 차마 손을 뻗을 수 없게 만들었던, 간질거리면서도 아슬한 예감.


기억 속 가장 환하고 보드랍고 아늑한 자리에 간직했던 장면을 인우는 큰소나무 아래에 가만히 내려놓는다. 그래야 하는 때가 오고 말았기에.


“저쪽 길로 가면 뭐가 나오냐?”


세진이 인우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별 건 없어. 그냥 산에 닦아 놓은 임도.”


시선을 큰소나무 옆으로 난 오솔길이 아니라 문비에게로 옮기는 인우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문비는 저쪽 너럭바위 위 조망이 확 트인 곳에서 라한, 깨금이와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쪽 길로 한 번 가 보자.”


인우의 귀를 당기며 세진이 졸랐다. 인우는 의외로 불평 없이 세진을 따라 나섰다. 문비 일행과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을 때 세진이 기습적으로 속삭였다.


“그러게 진작 고백을 하지 그랬어.”


허탈한 웃음이 인우의 얼굴에 조용히 번졌다.


“왜 안 했다고 생각해?”


했었다. 중학생이었을 때,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에. 그렇게 두 번.


“아…… 미안.”


세진은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스스로를 비난했다. 멍청한 것, 경솔한 것. 가만히 있음 중간이나 가지.


“야, 한세진. 안 어울리게 진지하지 말고 그냥 평소대로 해라.”


오히려 인우 쪽이 무덤덤했다. 하지만 세진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걸 보면 영 덤덤하기만 한 건 아닐 테다.

“알았어, 알았어. 마지막으로 잠깐만 더 진지하고 눈치 없는 인간이고 나서.”


“왜, 왜?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남인우, 너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이 돼?”


“몰라 묻냐? 인격이 잘생겨서 그렇지 뭐.”


직감하고 있었다. 고백하던 그 순간에도. 그보다 앞서 땀에 젖은 이마로 손을 뻗지 못하던 그 순간에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자신이 가문비라는 한 여자를 위해 만들어진 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영혼에 형태라는 게 있다면 인우가 보는 문비의 영혼은 오각형이었다. 내선을 모두 그으면 별이 되는, 그러니까 안에 별을 품은 오각형. 인우 자신의 영혼은 그 오각형이 빈틈없이 꼭 맞게 들어올 수 있는 원은 아니었다. 원은 원이되 문비의 영혼에 모자라거나 헐거울 것이 틀림없는 원임을 인우는 스스로 알았다.


하지만 인우는 또 다른 사실도 알고 있었다. 세상 모든 연인이나 부부가 모두 다 서로에게 꼭 맞는 영혼의 형태를 지닌 건 아니라는 사실. 영혼이 꼭 들어맞지 않아도 노력과 품성의 보완에 힘입어 원만한 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렇기에 인우는 섣불리 낙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의 고백을 문비가 따스하지만 경쾌하게, 조심스럽지만 명확하게 웃어 넘겼어도.


낙망은 라한의 등장에서 시작됐다.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인우는 내심으로 인정했다.


라한의 영혼이야말로 온전히 문비를 위해 예비된 원이라는 걸. 두 영혼이 서로를 아주 오래 전부터 불러왔을 것이며 마침내는 만나고 말았다는 걸. 저 두 사람이 서로의 영혼의 모양에 꼭 맞는 상대를 제때에 찾아낼 보기 드문 행운을 쥐고 이 세상에 왔다는 걸.


인우는 쓸쓸하지만 기껍게 낙망했다. 인생이라는 오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레나데가 그렇게 고요히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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