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자기기만일지라도

by 화진


이튿날에는 다 같이 물가로 소풍을 나갔다.


물놀이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냇물이 넓고 깊은 곳을 찾아 아랫마을까지 내려간 일행은 마침맞은 계곡에 자리를 폈다. 은성은 깨금이를 데리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천연염색에 쓸 외나물 꽃을 채취하고 나머지 네 사람은 편을 갈라 수구 경기를 했다.


물보라가 흩어진다. 햇빛은 무수한 물방울 속에 부서진다. 숲은 햇빛 너머에서 초록으로 난만하다. 절로 침이 고일 것 같이 싱그러운, 여름이었다. 여름도 늦여름. 사위어 가기 직전의, 더없이 찬란하고 무성한 여름의 끝자락.


눈부셔서, 모든 것이 눈부셔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풍경이 하나같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문비는 눈을 깜빡이는 순간조차 아깝다. 정겨운 표정들, 아름다운 풍경.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은데…….


점수를 내고는 같은 편인 세진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라한을 보며 문비는 복잡한 속내를 감추는 말간 웃음을 짓는다.


지금은 시원한 파안대소가 머무른 저 남자의 얼굴. 사색과 장난기, 고독과 유대, 진중과 다감을 넘나드는 저 얼굴을 고이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서서히 싹트던 참에 다가온 실명의 예고. 그 잔인한 불운 앞에서 하나의 인간은 얼마나 철저히 무력한 존재인가.


무참해진 문비가 자세를 낮춰 물속으로 머리끝까지 푹 잠겨들었다.


수구 경기는 라한과 세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실상 문비가 경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탓이 컸으나 인우는 개의치 않았고 모르는 척했다.


물에서 나온 일행은 미리 쳐 놓은 텐트에 번갈아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옷들은 주위의 바위와 나뭇가지에 널거나 걸쳐 놓고 그늘막 아래 돗자리에 모여 앉았다.


도시락과 마실 것, 후식 등속은 바로 먹을 수 있게 마련해서 아이스박스에 담아 온 터였다.


“요거트 만들어 놓은 거 있으면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가까운 기슭에서 산복숭아와 머루를 따 와 깨끗이 씻어 요거트에 섞는 인우를 보며 은성이 중얼거렸다. 두 눈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다.


산복숭아는 벌레 먹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지만 제법 잘 익어 불그레하고 말랑했다. 멀쩡한 쪽의 과육만 베어 쓰고 벌레 먹은 자국이 검은 선처럼 나 있는 부분은 버렸다. 머루는 과숙하여 가지에 매달린 채로 말라 가기 직전이었다.


“산복숭아도 제대로 익으면 달아요. 머루도 요맘때가 신맛이 좀 내려서 더 맛있고요.”


야생 과일들을 변호하듯 인우가 설명했다. 은성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그렇구나.’ 하고 호응해줬다.


이제 은성은 인우에게 말을 놓는다. 인우는 첫날부터 그래 달라고 청했지만 은성은 선뜻 그러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놓기 시작했다. 세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동기간이라고는 위로 형 하나뿐인 인우는 어려서부터 누나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친구 누나들에게 잘했고 따라서 그녀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았고 그 반작용으로 친구들의 원망과 타박을 샀다.


“형도 형 나름이죠. 다섯 살 차이 나는데, 제가 형아 형아 부르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 인간도 고작 여덟 살인 주제에 어찌나 어른인 체 잘난 체를 해대는지. 어디 그뿐인가요. 남신우, 인정머리와 융통성은 빈약하고 간섭과 원칙은 넘쳐나서 제가 얼마나 고달팠는지 모릅니다.”


어젯밤, 가끔씩 유성이 떨어지곤 하는 별하늘 아래의 들마루에 모여 나이트캡삼아 갈리아노 한 잔씩을 나누던 중 인우가 하소연했다. 신우가 꼼꼼하고 엄격한 면이 있어 인우를 단속하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인우의 말에 엄살이나 과장이 섞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세진과 문비가 은성과 라한에게 저 말은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는 뜻의 눈짓을 보낸 덕분에 남매는 신우를 오해하지 않는 선에서 인우의 고충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인우가 가져온 갈리아노는 이탈리아의 전쟁 영웅 갈리아노 소령에게서 이름을 따온 술인데 또 마침 유서 깊은 바이올린 제작가 가문과 그 가문에서 만든 명기 이름과도 같아서 들마루 위의 모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었다.


“저기…… 인우씨도 누님 말고 그냥 누나라고 불러. 친척 누나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산복숭아와 머루가 든 요거트를 받아 들며 은성이 말했다.


“예, 누나.”


넉살 좋은 인우가 즉답했다.


“그래, 그렇게.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누님 소리 말이야…… 오글거려서 죽는 줄.”


은성의 말에 푸학 하고 돌발 웃음이 터진 세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머루알이 인우의 맨발등을 맞히고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야, 한세발! 어우 드러.”


오만상을 찌푸린 인우는 세진의 손을 끌고 가서 제 발등을 문질러 닦기 바쁘고, 세진은 투덜투덜 버둥버둥 뻗대고. 나머지 세 사람은 웃었다. 메아리치는 웃음소리에 풀벌레들이 잠시 숨을 죽였고 산들바람이 고개를 빼 엿보고 갔다.


“내일 아침에 가신다고요?”


라한이 세진과 인우에게 차례로 시선을 줬다.


“맘 같아선 눌러 살고 싶지만 현실의 엄연함에 굴복할 밖에요.”


세진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자주 놀러 오세요.”


“두 분이 계셔서 저희가 마음 놓고 문비 두고 떠납니다. 잘 부탁드려요.”


인우의 어조가 진지해졌다.


“잘 알겠습니다.”


간결하지만 깊은 뜻을 내포한 대답이었다.


더욱 풍성해지고 드높아진 풀벌레 소리가 햇발을 흔들고 즐거운 오후가 무르익어 갔다.


문비는 끝내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자신이 지니고 태어난 병의 인자를, 자신에게 닥쳐 올 어두운, 그야말로 암흑 그 자체일 미래를.


세진과 인우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누군가의 연민과 염려와 노심초사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문비는 자신의 불운을 온 세상에 대고 광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의 영역이었다.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을 진단받았다는 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시점이 기어이 오고 말 것이다. 그때까지는 살던 대로 살고 싶었다. 이렇게 멀쩡한 사람으로. 아무 일 없고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말하자면 평온한 일상을 붙들고 있고 싶었다.


허망한 가장이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허락되는 한 조금치라도 더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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