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우야. 도마뱀 말이야.”
“도마뱀? 어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인우의 팔을 세진이 가볍게 잡아당겼다.
“아니. 너, 도마뱀처럼 괜찮아질 거라고. 위급할 땐 꼬리를 끊고 도망가는 도마뱀, 끊어 버린 자리에 새로운 꼬리가 돋는 도마뱀처럼.”
잘라낸 마음자리에 언젠가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자랄 거라고.
등을 다독이는 세진에게 인우는 희미하게 쌉싸래한 미소를 보였다.
세진의 말처럼 도마뱀의 꼬리는 재생된다. 그러나 본디의 것과 같을 순 없다. 새로 자란 꼬리에는 뼈가 없다. 힘줄이 뼈를 대신하고 형태 역시 이전과는 달라진다.
그건 재생을 위한 불가항력의 변형이다. 꼬리를 잘라낸 도마뱀이 감수해야만 하는 몫이다. 그 또한 인우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네 표정이 어떤지 아니?”
뒷짐을 진 세진이 인우를 마주보고 뒷걸음질하면서 물었다.
“어떤데?”
“한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표정.”
그렇다면 그 시대는 다시없는 찬란함의 시대일 거야. 인우는 속으로 답했다.
* * *
어디선가 매미가 울었다. 아침의 매미 소리는 어쩐지 바지런하고 경쾌하게 들린다.
“사분의 이박자 춤곡쯤 될 것 같아요. 저 매미소리.”
깨금이와 눈을 맞추고 턱짓으로 매미 소리에 박자를 맞추던 문비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떠오르는 곡이 있어요. 피치카토 폴카. 요한 슈트라우스 이세가 동생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같이 만든 곡. 정말 저 매미 소리하고 닮았네요.”
라한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피치카토 폴카를 찾아 들려주려는 모양이었다.
“그 곡을 직접 듣는 즐거움은 조금 미뤄 둘래요. 상상하는 즐거움도 있고.”
문비가 머리를 저었다.
“그래요. 지금은 매미 소리로 충분하기도 하고.”
산뜻하게 수긍하며 라한이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어려서 이 소나무 처음 보러 왔던 날 엄마한테 혼났어요. 인우도 채선 이모한테 혼나고. 말씀을 안 드리고 나선 길이었거든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도 너무 많이 지체됐고.”
한겨울이었고, 해는 짧았고. 낮에 말도 없이 사라진 아이들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에야 돌아왔으니.
“혼날 만했네요.”
소나무의 아름드리 둥치를 쓰다듬으며 라한이 말을 덧붙였다. 문비가 끄덕이면서 나무둥치를 돌아갔다. 두 사람은 사이에 둔 나무에 각자 등을 기댔다.
“처음이었어요. 엄마가 나를 그렇게 호되게 꾸중한 건. 그땐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엄마는 무서웠던 거예요. 내가 잘못됐을까 봐.”
문비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골랐다.
“고등학교 때 굉장히 엄격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수학 선생님이 계셨어요. 애들이 별로 좋아하진 않았는데 욕하는 애들도 없었어요. 기준과 규칙이 명확한 분이었거든요.”
라한은 나무 너머에서 잠자코 들었다. 문비가 말을 끊으면 가만하게 기다리면서.
“이학년 가을,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어요. 수학 선생님께서 풀라고 하신 문제를 다들 풀고 있는데 느닷없이, 여러분 같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아, 항상 높임말로 수업을 하시는 분이었죠.”
학생들이 슬몃슬몃 고개를 들어 수학 선생님을 바라봤다. 문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쑥색 토시를 낀 양팔을 벌려 교탁의 좌우 가장자리를 꽉 잡은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교탁을 잡은 마른 손마디에서 뼈가 하얗게 두드러졌다. 학생들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질문을 이어서 마저 하시더라고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부모님이 친부모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말입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라고.”
수학 선생님에 대해서는 약간의 가십성 소문이 있었다. 사모님이 같은 동네 후배인데 하도 가난한 집 딸이라 사모님 대학 공부 뒷바라지를 선생님이 하셨다더라. 속된 표현으로 하면 키워서 잡아먹은 경우다, 뭐 그런 소문.
돌연하고도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내놓는 학생은 없었다. 다만 문제를 푸느라 사각거리던 연필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을 허물어뜨린 것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종소리였다. 수업은 끝났고 수학 선생님은 교실을 나갔다.
그 일은 공식적으로는 철저히 묻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소문들이 수학 선생님에게 따라 붙었다. 그 얘기가 알고 보니 사모님 얘기였더라 혹은 선생님과 사모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입양을 고려하고 계신다더라. 그런 것들이었다.
“그 질문의 답을…… 이제 제가 알아요. 알게 돼 버렸어요.”
차분하게 절제된 어조로 이어지던 문비의 말이 그치자 라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천천히 나무를 돌아 문비의 앞으로 갔다.
문비는 그 옛날 학생들에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던 수학 선생님이 그랬듯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해맑은 얼굴에 표정이 없어 오히려 먹먹하다.
때로는 질문이 답이고 목적이고 전부인 질문도 있는 것이구나, 문득 문비는 깨달았다. 학생들에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던 수학 선생님도 반드시 답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음을.
라한은 그녀의 어깨를 담백하게 안고 무던한 뒤통수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말해 줘서.”
당신의 아픔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그늘로부터 나를 소외시키지 않아 줘서. 나눌 수 있게 해 줘서.
이 가녀린 어깨에 자꾸만 쌓이는 괴로움을, 생의 어두운 짐을 어쩌면 좋을까. 라한은 그녀의 짐을 대신 져 줄 수 없는 비탄을 조용히 억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