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그물

by 화진


산골 마을의 시간에서 중요한 건 날짜보다 절기였다. 세 노파는 달력에서 절기를 찾아 동그라미를 치고 그 아래에 삐뚤빼뚤 큰 글씨로 그 즈음에 해야 할 농사일을 적어 놓았다. 그들의 팔월 달력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는 처서, 가을 무배추를 심는 시기였다.


인우와 세진은 바로 그 처서를 하루 앞둔 밤에 도착했다. 문비는 인우에게, 인우는 문비에게 문비는 인우에게 ‘여전하네.’라는 말을 건네며 서로 주먹과 어깨를 차례로 부딪쳤다.


여전하네. ‘하나도 안 변했구나.’와 더불어 주로 어리거나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이 오랜만에 만났을 때 흔히 하는 인사말. 그건 세월이 필연적으로 새겨 놓고 가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흔적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능히 그 흔적을 꿰뚫어 아직도 그 시절의 너를 볼 수 있다는, 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와인과 맥주를 홀짝거리며 각자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둘러앉은 주위로 밀린 담소가 실처럼 풀려 쌓였다. 세 친구는 너나 할 것 없이 구르는 실타래를 쫓는 새끼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바지런히 이야기를 뒤쫓고 말꼬리를 물었다.


문비가 라한을 화제에 올리지 않았으므로 세진도 굳이 그를 들먹이지 않았다. 라한에 대해 먼저 언급한 건 인우였다.


“건넛집에 현악기 제작하는 사람이 산다며?”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웃에 대한 호기심인 듯했다.


“어, 맞아. 누나랑 둘이. 아, 나 그 누나랑 친해.”


덤덤하게 받는 문비를 보며 세진은 인우 몰래 웃음을 삼켰다. 솜구름 같은 비밀의 간지러움 때문이었다. 세진은 당사자인 문비가 운을 떼기 전까지는 아무리 간지러워도 비밀 주머니를 꽁꽁 여미고 있을 작정이었다.


“현악기 제작은 어디서 배웠대? 혹시 크레모나?”


이탈리아의 크레모나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만들었던 곳이면서 아마티와 과르네리 같은 현악기 명가를 배출한, 가히 현악기 제작의 메카라 할 만한 도시였다.


“미텐발트라던데.”


세진이 대신 대답하면서 기어이 풋 웃음을 흘렸고 세진과 눈길이 마주친 문비도 설핏한 미소를 내비쳤다.


“아아, 독일…….”


중얼거리던 인우가 세진과 문비가 웃는 걸 보고는 따라서 웃었다. 숲의 우듬지를 둥글게 어루만지는 햇귀 같은 웃음이 반듯한 이목구비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내일 건넛집 사람들도 나오는 거야?”


문비를 향해 세진이 물었다. 내일은 세 할머니의 배추 심기를 거들기로 일찌감치 얘기가 돼 있었다. 인우는 별장에 다녀갈 때면 항상 따로 시간을 내어 조금치라도 세 할머니의 일을 거들어 드렸고, 언제인가부터는 세 할머니의 편의를 위해 전화로 미리 일정을 의논하곤 했다.


“당연히 나오지.”


“흠, 뭘 좀 아는 사람들이네.”


인우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너나 잘해, 너나. 인우놈아.”


세진이 취한 척 발을 뻗어 인우의 종아리를 툭툭 차며 타박했다.


“어허, 놈이라니? 남의 집 귀한 자식한테.”


인우가 방어 자세를 취하고 항변하자 세진이 ‘그래, 남의 집 귀한 자식아. 허브솔트, 허브솔트으!’ 외치면서 뜯지 않은 과자봉지를 냅다 집어 던졌다. 인우는 ‘한세발, 쪼잔하게 그런 걸 가지고.’ 하면서 옆에 놓인 쿠션으로 응수했다. 뒤이어 큐브치즈가 허공을 날고 초코볼이 그 궤적을 되짚어 날아갔다.


실없는 승강이질과 장난이 반반인 익숙한 난장판을 문비는 느긋하게 관망했다. 이제껏 자신의 삶을 지지해준 안전망 하나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 아이들이 -이제는 아이들이 아니지만- 있어 삶의 공중그네도 무섭지 않았구나. 손을 놓쳐도 괜찮다고, 떨어져도 괜찮다고, 우리가 네 안전그물이라고. 무언의 말로 끊임없이 속삭여준 너희들 덕분에 나 여기까지 무사하게, 공중그네를 타고 왔구나.


그런데. 그런데 나…….


낯빛이 흐려지기 전에 문비는 감정을 단속하고 씩씩한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얘들아, 이제 그만들 좀 하지?”


온건한 만류의 말은 육포와 바나나 껍데기의 비행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세진과 인우는 얼굴을 맞댔다 하면 꼭 한바탕씩 저런 푸닥거리 아닌 푸닥거리를 하는 아이들이었다. 이십 년째 한결같다.


이번에도 역시 말로는 안 되겠군, 문비가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문간으로 향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놓은 무언가가 문간 옆 키 큰 장 안에 들어 있었다.


“어?”


“와아.”


인우와 세진이 동작을 멈추고 동심 가득한 감탄사를 토했다. 문비가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스프레이에서 분사된 새하얀 눈이 그들먹하니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다!”


눈 스프레이가 이 손 저 손 옮겨 다니고 세 친구는 눈 속에서 유치원생으로 돌아가 뛰놀았다. 눈을 소재로 한 노래를 부르고, 리듬을 타며 몸을 흔들고, 환호하면서. 한참을 정신없이 놀다가 셋은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마주봤다.


“놀 땐 좋았는데 청소할 생각을 하니…….”


엉망이 된 거실을 휘둘러보다가 세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셋이 같이 하면 금방이지 뭐. 그것보다 세발아, 가문비 쟤 여기 와 살더니 정서가 엄청 순화됐지 않냐? 눈 스프레이라니, 눈 스프레이라니.”


세발은 인우가 붙인 세진의 별명이다. 그 옛날 꼬꼬마 인우와 문비가 동시에 세발자전거를 떼고 보조바퀴 달린 두발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을 때 세진은 혼자 몇 달을 더 세발자전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 시절 세발이라고 놀리던 것이 입에 붙어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어, 그건 그래. 옛날 같으면 과자를 퍼붓거나 물을 뿌리거나 소름 끼치게 괴상한 고음을 질러댔을 텐데. 눈 스프레이라니, 웬 낭만이래?”


언제 티격태격했느냐는 듯이 금세 죽이 척척 맞는 것도 여전한 두 친구에게 문비는 어이없는 실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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