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제언(계속)
우리의 소중한 자연과 환경을 더 망치지 않고 개선하여 안전하고 행복한 터전으로 살려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삶의 방식의 문제, 개발과 정책의 문제, 그리고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한 기술의 문제를 짚어보고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삶의 가치와 방식의 문제
지금 우리의 가치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쓰고 사는 것이다.
왜? 무엇을 위하여? 그것은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행복을 위하여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행복한 것으로 알고서.
없을 때는 없기 때문에 그것이 생존이 달린 명제였었고, 이제 빈곤의 다급함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가 곁에 있음에도 과거의 쓰라린 기억에서 증폭된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것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외길로 길들여진 것은 가치의식뿐만이 아니었다. 삶의 방식, 라이프스타일도 과소비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것도, 탄소와 오염물질의 과다한 배출로 숨쉬기가 힘들고 기후변화의 위기에 와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과소비에 기인한다는 것마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과소비를 멈출 생각은 없다. 그렇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여기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 이유는 파국을 염려하기 때문이고 지속성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모든 원인을 단순화하면 “길들여졌기 때문”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길들이면 된다. 크게 나누어 자라나는 세대와 기성세대를 분리하여 자라나는 세대는 교육을 통해서 삶의 가치와 행복추구의 다양성을 습득하게 해 주고, 기성세대는 증폭된 미래에의 걱정을 덜게 해주어야 한다.
말이 쉽지 가능한 일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국가차원의 인식과 지혜와 노력이 결집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모든 것은 경제성장에 달려있다는 좁고 포퓰리즘적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국민의 안전과 행복증진을 실현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고자 한다면 길은 있다. 무엇보다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경제중심의 사회구조, 그리하여 무한경쟁을 불러오는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용뿐만이 아니라 미꾸라지도 행복한 사회”가 가능하도록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이제는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투자를 할 만한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선택의 문제이다.
과소비가 초래하는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지구자원 고갈과 자연파괴 문제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쓰레기 문제 등 환경악화를 가져오며, 정신적으로는 격차로 인한 불만족과 물질중심의 사고로 인한 인성상실은 물론 과소비를 뒷받침하기 위한 모럴해저드와 범죄의 증가 등 그 폐해는 구체적이고 상상을 넘어설 만큼 크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방안의 모색은 쉽지 않다.
과소비의 문제는 어느 개인의 소비행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사회전반의 시스템적 문제라는데 어려움이 있다. 개인으로 보면 과소비는 과다한 지출을 수반하게 되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더 많이 벌어야 한다. 반면에 기업은 과소비를 기반으로 하여 성장을 추구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오래 쓰는 물건, 박리다매는 옛이야기이고 생산자와 유통과정 모두 일확천금형 구조를 형성하여 큰 수익에 길들여져 있다. 과소비는 과이익과 결부되어 있고 더구나 이제는 국제적으로 가격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적인 가격관리 정책도, 소비자 운동도 한계가 있다.
결국 시스템적 접근은 어렵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접근방식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삶의 가치와 삶의 방식의 변화가 답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많이 소비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인다. 즉 가치의 변화와 행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고 그에 길들여져야 한다. 그러면 생활의 비용은 줄어들고 덜 벌어도 되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에 더 투자할 수 있게 되어 만족의 총량은 늘어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행복을 위한 구매의 다양성도 자원과 에너지 과소비형인 물질위주에서 문화로, 서비스로 다양화될 수 있어서 그에 따른 일자리도 다양해지게 되므로 이것도 또한 선순환을 이루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의 조성이 긴요하다. 물질이 아니라도 저렴한 비용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풍부한 자연과 쾌적한 환경 그리고 문화적 인프라의 공급과 에너지 절감형 환경도시의 조성은 정부의 중요한 몫이다.
개발과 정책의 문제
다시 말하거니와 모든 제도나 시스템은 그것을 운영하는 국가의 철학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가 국가라는 ‘제3자’에게 권한을 위임한 이유는 이해당사자의 시각과 입장에서 벗어나서 멀리 보고 옳은 답을 찾고 그 힘으로 지키라는 기대에서이다. 개발과 보전, 사익과 공익, 탐욕과 억제 사이에 존재하는 밀고 당기는 힘의 메커니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재이다. 국가의 철학과 지혜에 따라 망가지기도 하고 윈윈 하기도 한다. 앞서 조선일보의 보도를 보고 우리가 느낀 것은 비단 실망의 수준이 아니라 분노의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번 훼손되면 회복이 어려운 것이 자연인데 우리 사회의 절체적 명제였던 빈곤타파를 위한 개발의 시대를 이미 지난 상황에서조차도 국토와 자연환경의 훼손이 어떤 이유에서건 아직도 난개발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서 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삶의 질이 높은 유럽의 도시들은 오랜 역사에 걸쳐 일관되게 삼림 및 자연공간을 도시 가까이에 확보해 왔으며 주민에게 높은 비율의 녹지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삶의 질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 도시면적의 50%가 녹지이며, 18%가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라츠(Graz)에서는 도시면적의 53%가 숲이나 농업용 도로 사용된다. 스위스의 취리히는 전체면적의 1/4이 숲이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는 총면적 108㎢중 단지 29㎢만이 개발이 되고 나머지는 개방된 숲(40%)과 농지이다. 베를린의 경우도 도시의 절반이 넘는 지역을 미개발지로 보호하고 있다. 특히 전체의 18%인 1만 ha가 삼림지대인데 이 지역은 베를린삼림법에 의해 강력한 보호를 받는다. 네덜란드에서는 중앙정부의 혁신적인 자연정책계획(Nature Policy Plan) 아래 국가생태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으며 이를 지방 수준에서 더 정교하게 구체화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러한 결실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국가와 대륙 전체의 차원에서 더 넓은 생태 네트워크를 구상하고 추진하고 있으며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회복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럽대륙 전체의 ‘비전’으로 진행되고 있는 범 유럽생물·경관 다양성 전략(Pan-European Biological and Ecological Network)과 유럽 생태 네트워크 개발(EECONET)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유럽이라고 개발의 이익을 독식하고 자연파괴와 환경훼손의 부작용을 사회에 남기는 탐욕적 시도가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것을 오랜 세월 동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중요성에 대한 철학과 비전이며 그를 실현하기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과 변하지 않는 집행의 엄격함인데, 그 결과물을 높은 삶의 질로 향유하고 공유하는 까닭에 사회적 합의가 단단해지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힘과 지속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도시는 많은 인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이다. 또한 국가적 수준에서 당면한 탄소배출, 즉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부문이기도 하다. 미국 도시학자 피터 칼소프는 미국의 경우 탄소 배출원이 산업부문 29%, 수송 및 항공부문 9%, 농업 및 기타 분야 9%인데 비해 건축물과 개인교통시스템을 포함하는 도시부문은 무려 53% 임을 밝히고 압축도시의 좋은 계획 및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녹색기술 등의 합작으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탄소저감 목표를 도시부문에서 단기간에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봤다. 실제로 산업부문이나 운송부문 또는 농업부문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은 그로 인한 경제의 위축 때문에 에너지 절감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이 새로운 어바니즘은 예컨대 석유의존도를 줄이는 지역을 만듦으로써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중산층의 생활비를 줄이고 노인들에게는 건강하고 통합된 장소를 제공하는 다양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으로써 다양한 도전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유럽의 지속적인 자연확보의 노력 중에 많은 도시에서 도시녹화와 도시생태 계획으로 도시를 재구상하는 긍정적 창조적 사례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개발 또는 재개발 사업에서 수준 높은 녹지 및 자연환경 개선책을 포함시키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인구와 개발의 밀도를 비교적 높게 유지하면서도 대규모의 자연지역을 확보하는 것인데 공공부문이 신개발 및 재개발 사업의 계획과 설계과정에 강력한 통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가능성을 저버리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하여 반성해 봐야 한다. 그것은 국토를 제대로 쓰는 지혜에 관한 것이며 탐욕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키는 자각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국토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자연의 보전과 자원의 미래가치에 대하여 뼈저린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길고 크게 보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도시개발과 지역개발의 철학과 디테일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아파트형 주거문화에 있어서 고층화와 고밀화의 이득은 극소수 시행자의 탐욕의 제물이 되고 그로 인한 부담은 우리 사회의 몫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고밀화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고층화로 높아진 것 중 일부는 공공녹지를 늘리는데 투자되어야하고 수요자는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에너지 효율이 높고 안전한 주택에 입주할 수 있어야 압축도시의 혜택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심지어 그 탄생의 전략부터 그린어바니즘을 전략으로 하고 있는 전략적 계획도시 송도국제도시마저도 최근의 개발내용을 보면 기존의 아파트단지 개발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내용이 변질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도시개발의 철학이 유지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공공과 개인,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이익이 균형을 이룰 수 있게 관리되어야 하는 개발과 정책에서『깨어 있는 사회시스템』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탐욕의 도구로 전락한 기술의 문제
기술발전이 없었다면 자연의 파괴도, 환경의 오염도, 인구의 폭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회복과, 환경의 개선과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 인류가 유일하게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기술이다. 이제 기술은 탐욕의 도구에서 인류와 자연, 지구를 구하는 구원의 수단으로 쓰여야 한다.
기술이 어떻게 탐욕의 도구로 전락하였을까? 그것은 거대한 힘을 가진 기계가 자연의 조절능력을 망가뜨리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의 순환이 지켜질 때까지는 사람들은 자연의 공급범위 안에서 쓰고 살았다. 기다리기도 하고 참기도 했다. 그러나 기계의 힘으로 대단위 개발이 가능해지면서 공급은 수요의 창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필요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과소비의 구조가 철옹성처럼 자리 잡게 된다. 아마존의 거대한 열대우림이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되고 그 목재로 필요 이상으로 큰집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과시용이다. 사람들은 그런 큰집을 부러워했다. 거기에 드는 천문학적인 돈은 아마존을 망가뜨린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그 집주인들은 더 많은 나무를 베기 위하여 더 큰 기계를 만들고 다른 열대우림을 찾느라 바빠서 그 집에 머물 수가 없다. 그것만 보면 마치 세상은 공평한듯하지만 쓸데없이 열대우림만 파괴되고 그 대가는 인류 생존의 위기로, 삶의 질 저하로 남게 되었다.
기술은 생각이 없지만 그를 쓰는 사람의 생각에 너무도 쉽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기술을 어떻게 하면 구원의 수단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일에 기계를 부리는 사람들이 동참해야 하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은 공급과 수요의 싸움이다. 수요가 공급이 원하는 바와 "다르게" 움직이면 변화는 시작된다. 즉 수요가 줄어드는 순간 공급은 시장의 눈치를 살피고 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 즉 시장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때 수요가 장악한 시장은 공급자들이 내구성 경쟁, 효율성 경쟁, 대체성 경쟁, 가격경쟁 등 그들끼리의 경쟁에 나서도록 힘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필요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내구성 있고 효율성이 크며 값이 싼 것을 찾아 조금 "천천히", 그리고 "주관을 가지고" 구매하면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기술은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지구를 구하는 구원의 수단이 되기 위해 스스로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오로지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 더 많이 벌어야 하는 악순환에 빠져 들어 공급자의 탐욕의 제물이 되어 자신의 행복과 인생을 희생하고 더 나아가서 인류의 공멸을 앞당기는 촉매가 되지 않는 길은 『검소함을 찾고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나아가서 우리의 자연과 환경을 지키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