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022
(커버이미지 : I-95를 따라 남쪽으로 이틀을 운전해서 도착한, 'The Sunshine State', 플로리다의 웰컴 센터. 눈이 쌓인 추운 날에 뉴욕을 떠나왔는데 플로리다에 도착하니 여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에서 2월 셋째 주는 1주일짜리 학교 방학이다(Midwinter Recess). 먼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또다시 왔다. 뉴욕은 아직 겨울이니 따뜻한 곳으로 가자.
몇 군데 찾아봤지만 결국 다시 한번 플로리다로 가기로 했다. 바로 미국의 최남단 도시인 마이애미(Miami).
과거에 뉴욕을 비롯한 동북부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플로리다는 스페인 식민지였다.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 마이애미는 스페인 문화권과 가깝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미국 내에서 스페인어를 많이 쓰는 곳 중 하나다.
크리스마스 때 올랜도에 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장거리 운전을 하기로 했는데, 뉴욕-플로리다 운전을 한번 해봤더니 비행기보다는 차가 확실히 마음이 편하다. 숙박비나 주유비 같은 걸 따져봐도 비교적 저렴하고 내 차를 가져가니 여행 짐도 원하는 대로 싣고 다닐 수 있다.
로드트립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인데, 잘 생각하면 이것은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다. 며칠 내내 이동하면서 주변 풍경이나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보고, 지리 공부도 하고, 아내와 얘기하는 시간도 갖게 되니 꼭 단점은 아니지 않을까?
마이애미는 미국 대도시들 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곳이다. 미국 대륙 남북을 가로지르는 고속로도 I-95의 남쪽 종점이다. 알바니에서 거리는 1650마일이고 운전 시간만 22시간. 하루 8시간 운전 기준으로 잡으면 뉴욕에서 마이애미까지 가는데만 3일이 필요하다. (로드트립 적정 운전 시간 계산은 올랜도 여행 참고)
미국인들도 이 정도 거리를 운전해서 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지.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차를 몰고 '미국의 끝'까지 운전해서 가는 것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마이애미는 미국 남쪽 땅끝마을인 키 웨스트(Key West)로 가는 입구다. 마이애미에서 플로리다 반도 남쪽에 있는 여러 섬을 이어 만든 길이 있고 여기를 따라 3시간 넘게 가면 제일 끝 섬, 키 웨스트에 닿게 된다.
이 길은 말 그대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이라서 멋진 풍광으로 여러 영화에서도 나왔던 길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한가운데 놓인 길을 따라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을까. 꼭 가 보고 싶다.
올랜도에서는 세은이 취향 따라 놀이동산을 많이 갔으니, 마이애미에서는 아내 위주로 다니는 걸 세은이도 동의했다. 아내는 해변, 미술관, 쿠바 이민자 거리, 습지 공원 등을 꼽아서 일정을 짰다.
휴가를 길게 냈기는 했지만 로드트립 특성상 긴 이동시간 그리고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휴가를 가는 기간이라 여러 제약사항이 많다.
그래도 어쨌거나 시간, 비용 등을 다 따져서 최적화를 완성했고 무려 9일 동안, 왕복 3,300마일(=5,300km)을 이동하는 일정을 완성했다.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
매일 서울에서 광주를 왕복하는 정도로 운전해야 하는 여정이다. 미국의 끝으로 가는 새로운 도전, 재밌을 것 같다.
첫째 날 : 금요일 오후에 출발 (Albany, NY -> Winchester, VA)
밤 운전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사슴 사건 참고), 이동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하니 몇 시간이라도 아끼기 위해 금요일 회사 일이 끝난 뒤, 늦은 오후에 출발했다. 아내는 차 안에서 저녁을 때울 수 있도록 김밥을 쌌다.
마이애미 가는 길은 NYC 근처에서 I-95를 타고 남쪽으로 쭈욱 가면 되는데 첫날엔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DC 등 대도시 권역을 지나야 한다.
이런 지역은 요즘 같은 성수기에 숙박비가 $300 가까이 되기 때문에 좀 피해야 한다. 경로를 아예 내륙으로 틀어서 가면 한적한 마을엔 $100 수준의 호텔이 있기 마련이다. 아내가 기어코 찾아서 예약했다. 기특해라.
우리는 뉴욕에서 이미 어둑어둑할 때 출발했기 때문에, 주변 풍경을 볼 것도 없이 내리 운전만 해서 호텔에 도착하니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고속도로 옆에서 잠만 자는 그런 목적의 호텔이다.
이번 여행은 숙소를 아내가 정했는데 대체로 저렴한 숙소를 잘 찾아 놓았다. 그동안 이름이 알려진 비싼 호텔만 다녔었는데 막상 다녀보니 관광지가 아니라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로드트립 하면서 찾게 되는 장소는 유명 호텔 브랜드라 해도 시설이나 서비스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다. 이동하다 잠시 들러 잠만 자고 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오늘 여기 정도면 우리 셋이 하루 자기에 충분하다.
둘째 날 : 하루종일 운전 (Winchester, VA -> Hardeeville, SC)
오늘은 540마일 운전이다. 운전시간만 9시간? 점심도 먹고 화장실도 가야 하니 총 11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아침 8시에 시작하면 저녁 7시에 끝난다. 출발하기 전에 일단 기름부터 가득 채워야 한다.
미국 고속도로 대부분의 휴게소(Rest Area)엔 화장실과 자판기 정도만 있고 주유소나 매점은 없다. 그래서 주유나 식사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근처 마을에 가서 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출구가 나오기 전엔 꼭 식당, 숙소, 주유소, 즐길거리 등이 로고로 표지판으로 표시되어 있다. 출구 바로 옆에 마을이 있기도 하고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도 있었다.
일단 차를 세울 일이 생기게 되면 기름이 남아 있더라도 무조건 가득 주유를 해야 했다. 시간도 아깝거니와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내 차는 기름을 가득 채우면 한 번에 400~450마일 정도 갈 수 있었다.)
호텔이 있단 버지니아 시골마을을 떠나서, 고등학교 세계지리 시간에 배웠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의 동쪽면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고 있다.
꽤나 높은 산세(山勢)나 나무의 모양이 한국 강원도와 얼핏 비슷한 느낌이 난다. 주변에 도시나 시설물이 전혀 없는 곳이라 거의 날 것의 자연이다. 코너 길에 거울이 없는 건 한국과 다른 점이긴 하다.
넓게 펼쳐진 농장이 나타나기도 한다. 소나 말을 넓은 땅에 그냥 풀어놓고 키운다. 도시는 전혀 없고 심지어 고속도로 톨비도 없는 곳이다. 아주 한적하다.
세은이는 가져온 만화책을 모두 보고도 시간이 남아서 지겨워하다 잠이 든 사이 어느덧 해가 지려고 한다. 꽤나 남쪽으로 온 건지 밖에서 더운 기운이 느껴진다. 해가 지는 시간도 길어졌다.
주변 나무들은 어느새 전부 야자수(미국 팔메토 나무, American Palmetto Tree)로 바뀌어 있었다. 야자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상징으로, 초승달과 야자수가 그려져 있는 차량 번호판은 꽤나 멋지다.
다행히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조지아 주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작은 여관(Red Roof Inn)이다. 하룻밤에 $80. 꽤 저렴하다. 이것이 진짜 미국 모텔인가?
고속도로 출구 바로 앞 마을에 있는, 외관이 조금 투박하게 생긴 이 여관은 사람도 많고 방 내부도 다른 호텔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충분히 하룻밤 잘만 하다.
대충 짐을 풀고 나서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웬만하면 로컬 식당에 가보고 싶었다. 살면서 언제 또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음식을 먹게 되겠는가.
식당이 있을 만한 곳으로 나가보니 주차장에서 바비큐를 팔고 있는 가게가 있다. 음식, 식료품, 이것저것 물건도 파는 정말 시골에 있을 법한 작은 가게다.
가게 안을 자세히 보니 온통 스페인어로 되어있다. 파는 물건들을 보니 멕시코 사람들의 가게인 듯하다. 손님들도 영어를 쓰지 않는다. 미국이 아니라 멕시코 어딘가에 와 있는 느낌이다.
손짓 발짓으로 음식을 주문해서 저녁을 가져와서 먹었다. 이것이 멕시코 음식인가, 미국 남부 음식인가? 뭔지는 몰라도 맛은 좋았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끝남에 감사하고, 내일은 드디어 마이애미로 들어간다.
셋째 날 : 마이애미 도착 (Hardeeville, SC -> Miami, FL)
'고기패티, 소시지, 감자볶음, 에그 스크램블, 셀프 와플, 토스트, 오렌지와 바나나, 과일 주스, 커피.'
미국 호텔에서 주는 무료 조식(Complimentary Breakfast)은 정말 어디나 똑같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솔직히 맛은 별로 없다. 먹지 않으면 점심때까지 굶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어제 먹은 바비큐가 계속 생각난다.
한국 호텔 조식에 나오는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는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진짜 '미국 아침 식사'에 비하면 너무나 호화스러운 것이다. 그건 그냥 '코리안 브렉퍼스트'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꾸역꾸역 먹고 커피와 바나나까지 챙겨서 나왔다. 모텔에서 하룻밤 저렴하게 잘 보내고 간다. 제일 먼저 기름부터 넣는다. 뉴욕보다 15%는 싼 것 같다. 기분 좋게 출발한다.
플로리다로 향하는 I-95는 두 달 전에 왔던 길이지만 그때는 밤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다. 지금 보니 도로 양 옆으로 빽빽한 열대나무, 하늘엔 고속도로의 차를 대상으로 광고하고 있는 비행기/비행선이 보인다.
첫 번째 휴게소, 플로리다 웰컴 센터 (Florida Welcome Center)를 들렀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는 관광지라서 그런지 웰컴 센터도 북적대고 활기찬 느낌이다.
특히 입구에서 웰컴 드링크로 플로리다 특산품인 오렌지 주스를 한잔씩 무료로 줬는데 굉장히 달고 맛있었다. 다른 웰컴센터들에 비해 관광지 소개도 잘 되어있고 주변 산책 길도 잘 되어있어서 한참을 있었다.
이윽고 오후 늦은 시간에 마이애미 시내로 접어들었다. 겨울나라에서 여름나라로 오니 낮도 꽤나 길어졌다. 아마 뉴욕은 이미 밤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이애미는 그야말로 대도시다. 뉴욕시티나 보스턴 같은 오래된 느낌을 찾기 어렵고 신도시 같은 느낌이다. 한국으로 치면 부산 해운대 같은 느낌? 시내를 운전해서 지나는데 신식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다.
마이애미 시내(City of Miami)에서 다리를 건너면, 마이애미의 대표적 이미지인 넓은 바닷가 해변이 있는데, 이곳은 '마이애미 비치(Miami Beach)'라는 섬이다. 우리 숙소는 마이애미 비치에 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서, 호텔은 건물 외벽에서부터 실내 인테리어까지 캐리비안 느낌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로비에도 엘리베이터에도 열대 지역 동물 그림과 중남미 장식품으로 한껏 꾸며져 있다.
특이하게 객실 바닥은 카펫이 아니고 타일로 되어 있었는데 아마 해변 모래 때문일 것 같다. 정말 관광지 특화 호텔이다.
객실 밖을 내다보니, 이 거리 여기저기서 파티를 즐기는 것 같았다. 3층 우리 방까지 흥에 겨워 북적거리는 음악 소리가 요란하다. 내가 어떤 곳에 와 있는지 정말 실감이 났다.
3일이나 걸려서 오기도 했고, 날도 흐리고 비도 조금 내려서 오늘은 간단히 저녁 먹고 쉬어야겠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열심히 다녀야지.
C. Parker
숙소에서 쉬면서 여행 일정과 유튜브 영상 같은 걸 찾아보고 있는데 페이스북에 눈에 띄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학부모 페이스북 그룹에 동네 도서관 사서가 올린 '미국 시민권 수업 수강생 모집'이라는 글이었다.
도서관 수업이라는 게 어떤 것을 하는 건지, 시민권 시험 자격이 없는 내가 수업을 들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영어 수준 무관'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서 일단 공지를 저장해 두었다. 뉴욕에 돌아가면 자세히 봐야겠다.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이것으로 인해 나의 미국 생활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게 될 것이었다는 걸.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이 페이스북 글에 Like를 눌렀던 그때, 바로 그 순간 시작되었던 것이다.
Thank you, A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