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이미지 : 마이애미 사우스 비치에서 정신을 놓아버리게 된 아내와 세은이. 전혀 춥지 않은 2월이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Miami 여행기 (1/4)에서 계속
넷째 날 : 마이애미 비치 그리고 예술 동네 윈우드
(1편의 설명대로 마이애미 비치(City of Miami Beach)는 섬의 이름입니다. 이 섬엔 마이애매의 유명한 해변들이 여럿 있습니다.)
(사진) 마이애미 지도
마이애미 비치의 겨울바다 : South Beach
어제는 저녁에 살짝 비가 왔는데, 다행히 아침부터 화창하다. 오늘은 호텔에서 한 블록 앞에 있는 사우스 비치(South Beach)를 갔다 다리를 건너서 시내를 구경하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긴 마이애미 비치 섬의 동쪽 전체 해변 구간은 전체 길이는 9마일(=15km)에 달하는데 그 폭도 100m 정도 되는 정말 광활한 해변이다. 해운대 해변을 10개 정도 합친 크기이다.
마이애미 비치엔 해변이 여러 개 있는데, 우리 숙소에서 가까운 사우스 비치는 젊은 느낌으로 북적거리며 활발한 곳이다. (그래서 숙박비가 비쌌지만...)
(미국에선 이 정도 해변이라도 큰 해변이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Long Beach라는 지명이 붙은 곳을 지도에서 찾아봤는데, 25마일=40km 이상의 해변이 있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무려 서울에서 동탄까지의 거리가 통째로 해변인 셈이다.)
아침에 호텔을 나와 해변 구경을 나섰다. 어젯밤 북적거리던 거리엔 청소차가 다니고 있고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노숙자들 모습도 간혹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면 마치 병풍처럼 바다를 바라보고 줄을 지어 있는 고급 호텔들이 있고 그 사이로 바나나 나무와 야자수가 있는 산책로까지 지나면 사우스 비치다.
폭이 엄청 넓은 해변엔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겨울 바다를 즐기러 나와 있었다. 오늘 기온이 섭씨 27도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해변엔 비치파라솔이 빼곡히 설치되어 있고, 월요일 아침인데도 사람들은 한가롭게 선탠을 하고 있다. 결혼사진을 찍으러 온 커플도 있다.
쓰레기도 없고, 떠밀려 온 해조류도 없고,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발을 담가보니 따듯하다. 파도는 조금 높고 물이 깊어 보인다. 마치 우리나라 동해 같다. 따뜻한 동해바다 느낌.
우리는 오후 일정 마치고 저녁때 제대로 챙겨 와서 물놀이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바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새 세은이와 아내는 신발을 벗고 파도를 따라 장난을 치고 있다. 나는 해변을 따라 걸어보았다.
띄엄띄엄 배들이 보인다. 거대한 크루즈도 있고 개인 요트 같은 배들도 여럿이다. 이런 곳에 살면 저런 배가 자동차처럼 필요할 수도 있겠다. 호수가 많은 뉴욕에도 자기 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광고를 하고 있는 배가 있었다. 커다란 디스플레이를 싣고 해변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고속도로에는 비행선이 광고를 했는데 바다에서도 광고를 피할 수가 없다.
항공사, 식당, 공연 등 별의별 광고가 나오고 있다. 광고선(船) 위로 경비행기가 꼬리에 배너를 달고 날아다니면서 부동산 광고를 하고 있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엔...
이 넓은 해변에서도 미국식 자본주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에겐 유쾌한 장면이다.
그렇게 미국식 자본주의를 깨치고 있던 그 순간, 여자 비명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누군가 "Oh, Mommy Fails."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소리 난 쪽을 돌아보니, 세은이는 허리춤까지 이미 젖어있고 그 옆에 아내는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아내가 넘어졌나 보다. 너무 웃겼지만, 나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괜찮아? 어디 아프게 된 건 아니고?" > '오! 재밌는 장면 감사! 아쉽게도 사진을 못 찍었네. ㅋ'
나를 위아래로 째려 훑어보던 아내는, "그래 결국 나는 이렇게 됐네. 세은아, 엄마랑 가자."
라고 하고선 아이를 데리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와는 달리 아내와 세은이는 수영을 잘한다. 아까 "Mommy Fails"이라 하며 놀랐던 아저씨도 흐뭇하게 보고 있다. 나는 살짝 손을 들어 인사했다. 'Thank you, Man. 보다시피 나는 괜찮아.'
호텔이 가까우니 씻고 옷 갈아입으면 된다. 해변 곳곳에 노천 샤워기도 있고 일정은 좀 바꾸면 되지. 지금을 신나게 즐기자. 둘 다 엄청 즐거워한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물놀이를 한참하고 호텔로 돌아와 재정비를 하고 다시 나왔다.
(사진) 마이애미 사우스 비치의 아침. 따사로운 2월의 햇살에 사람들은 아침부터 선탠을 한다. (왼쪽) 윈우드 월스엔 야외 작품, 조경, 실내 작품 등 볼거리가 많았다. (오른쪽) 튀긴 악어를 메뉴로 파는 식당의 맥주 탭. 오른쪽 상단엔 짖궂은 농담이 쓰여있다. 마이애미 예술 지구 : Wynwood Walls
오후엔 마이애미 시내로 가야 하는데, 대도시는 항상 주차 걱정을 해야 한다. 주차 자리 찾는 것도 문제고 길에 주차하면 차가 무사할지도 걱정된다.
차는 호텔에 놔두고 우버(Uber)를 부르기로 했다. 걱정하느니 주차비 내는 셈 치고 우버 타는 게 속편 할 것 같다. 우버는 한국에 없는 서비스여서 좀 어색했는데 카카오 택시와 비슷한 면이 많아서 어렵지는 않았다.
30분 정도 우버를 타고 도착한 곳은 윈우드 월스(Wynwood Walls)라는 미술관이다.
마이애미 다운타운 근처에 있는 윈우드는 과거엔 거대한 의류 산업 단지였다. 시간이 지나 공장들이 낙후되어 지역 전체를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지금은 패션 및 예술 관광지로 거듭났다.
이곳에 10여 년 전에 세워진 독특한 미술관인 윈우드 월스를 찾아왔다. '월스(Walls)'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러 가지 벽화가 이곳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윈우드 월스는 주변 건물 벽과 인도 바닥에도 여러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예술의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다.
QR로 입장권 체크를 하고 미술관에 들어가면 넓은 마당 군데군데 세워진 벽마다 꽉 차게 그려진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러 조형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마당 큰 나무 옆에는 버려진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만든 커다란 두 마리의 원숭이 작품이 있었는데 '어른용 장난감'도 포함되어 있어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이런 것도 현대 미술인 건가? 미국 감성인 건가?'
요즘 미술을 이해할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구경하고 세은이랑 벽화와 같은 포즈로 사진 찍는 것으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실내 전시장에도 여러 작품들이 있어서 볼 만했고, 전시장에서 기념품점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이곳의 벽화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에 대한 설명과 작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다양함, 자유분방함, 짓궂음이 있는 작품들을 보고 나서, 미술관을 나와 윈우드 거리를 좀 걸어가기로 했다. 예술 동네라서 그런지 원색계통 강렬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는 많은 건물과 상점들이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을 심심하지 않게 해 주었다.
바에서 먹는 악어 튀김, 마이애미 비치의 밤 풍경
플로리다 반도의 남쪽은 거대한 습지로 되어 있어서 악어(주로 민물악어, Alligator)가 많다. 악어는 보호종이라 함부로 사냥하면 안 되지만 양식장이 따로 있기 때문에 식용으로 팔리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마이애미엔 악어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아내는 질색했지만). 구글에서 'Alligator restaurant in Miami'를 쳐보니 많지는 않은데 가까운 곳이 하나 있다.
사실 예능 방송에서 악어고기 먹는 장면은 많이 봤다. 이상한 맛은 아니고 닭고기 같다는데 대단한 별미는 아닐 거다. 그래도 악어를 직접 먹어볼 수 있다 하니 세은이랑 추억 하나 만들고 가자.
화려한 윈우드 거리를 20분쯤 걸었을까? 식당이라기보다는, 맥주 파는 평범한 동네 바(Bar)에 도착했다. 술집이라서 세은이를 데리고 가도 되는지 물었더니 괜찮단다. 애한테 술을 먹이지만 않으면 되나 보다. (미성년자 술집 출입 규정은 주마다 다르다. 단, 음주가 가능한 나이는 미국의 모든 주가 21세 이상으로 되어 있다.)
메뉴판을 받아보니 악어 튀김 메뉴 두세 개가 있다. 악어 전문 매장이라기보다는 궁금하면 맛이나 보라고 파는 정도 같다. 악어 튀김을 종류별로 시키고, 어차피 차도 놓고 왔으니 맥주도 주문했다.
악어 튀김은 방송에서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닭가슴살 맛과 굉장히 비슷했다. 아마 닭고기로 했어도 몰랐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부러 먹어본 게 어디냐. 세은이는 좀 시시하다는 표정이다. 살짝 기대했던 듯.
이렇게 술집에 와서 맥주를 먹는 것은 미국 온 이래로 처음이었는데 술맛도 좋고 분위기도 재미있다. 맥주 바 뒤에 재밌는 글귀들이 많았는데 '좋은 맥주는 싸지 않고 싼 맥주는 좋지 않습니다.'가 눈에 들어온다.
어차피 차도 놓고 왔으니 아내와 같이, 즐거운 여행을 자축하며 '좋은 맥주'를 여러 잔 마셨다.
호텔로 돌아와 마이애미 비치의 아쉬움을 달래려 밤거리 산책을 하고 가족 각자 기념품도 하나씩 샀다. 내일은 호텔을 옮겨야 해서 짐을 미리 싸고 그렇게 마이애미 바닷가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창 밖 거리엔 밤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어딘가에는 끊임없이 큰 음악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난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젊음이 넘치는 마이애미의 밤거리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이곳은 항상 여름이고 항상 축제인 걸까?
다섯째 날 : 악어 투어와 Little Havana
습지에 사는 악어를 보러 가자 : 에어 보트 투어
어제는 악어로 식사를 했으니 오늘은 살아있는 악어를 직접 보러 가려고 한다.
플로리다 반도의 서남쪽 끝은 거대한 습지로 되어있는데, 마이애미에서 서쪽으로 도시를 살짝만 벗어나도 이 습지를 만날 수 있다. (Everglades Wildlife Management Area)
야생 악어가 많이 살고 있어서 관련 투어 상품이 여러 개가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에어보트를 타고 습지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도시를 벗어나니 쭉 뻗은 길을 따라 왼쪽엔 숲이 있고 오른쪽엔 그리 넓지 않은 운하가 있다. 조금 전 도시풍경과는 완전 딴판이다. 끝없는 평지.
경치에 감탄하며 운전하고 있는데 운하 가운데에 검은색 무언가가 보인다. 이게 뭐지 지나면서 힐끗 봤는데 물속에 악어가 머리만 내밀고 있다. 그것도 두 마리.
"세은아 저기 악어!", "아빠 어디?" 하는 순간 이미 지나가 버렸다. 갓길도 없어서 세울 수도 없다. 아내도 못 보고 나만 본 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투어에서 보면 되니까. 뭔가 좋은 징조 같다.
예약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투어 사무실엔 악어 관련 기념품으로 도배되어 있고 다른 팀도 미리 와서 구경하고 있다. 다들 멀리서도 왔다. 자동차 번호판이 미시간, 켄터키, 캐나다 등등... 뉴욕에서 3일 걸려 온 우리가 평범한 거네.
우리가 타고 갈 에어보트는 스무 명 정도 타는 크기인데, 보통 배 아랫부분에 달려있는 스크루가 없고 배의 뒤편에 실려 있는 대형 송풍기로 전진하는 방식의 배다. 그래서 에어보트라고 불리는 것이고 습지를 다녀야 하니까 물속에 스크루가 있어선 안 되겠지.
투어 시간이 되어 가이드를 따라 배에 오른다. 출발하기 전에 가이드는, 소음이 심할 수 있다면서 귀마개를 하나씩 준다.
그러면서 야생 악어가 항상 나오는 것은 아니어서 약간의 행운이 있어야 하고 혹시 악어를 못 보게 되더라도 투어가 끝나면 사육하고 있는 악어를 보여주는 작은 쇼가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했다.
'아 제발,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아까 운하에 있던 놈들이라도 여기로 와야 하는데'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길게 나 있는 수로에는 부레옥잠이 가득 차 있다. 배가 물풀을 밀어내면서 천천히 수로를 빠져나간다.
악어가 있을 것 같은 곳에서는 배의 엔진을 끄고 조용히 기다린다. 사람들은 나무 숲 아래에 혹시 악어가 있는지 계속 찾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악어는 안 보이고 가끔 물 위를 지나는 새들만 보인다.
10분 정도 좁은 수로를 지나고 나니 완전히 탁 트인,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습지가 나온다. 물속에서 자라난 키 작은 갈대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아마 이 정도는 전체 습지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습지의 전체 면적은 도시 몇 개를 합한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작은 물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보인다. 가이드는 배를 잠깐 세워서 광활한 습지를 배경으로 샤진을 찍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너무 개방된 곳이라 악어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왼쪽) 습지 투어 가이드. 보트 안쪽에 4개국어로 "팁은 감사합니다."라고 쓰여있다. (오른쪽) 습지의 모습. 끝이 보이지 않는 아주 넓은 곳이다. (사진) 악어 양식장. 습지 투어를 마치고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고 나면, 야외 공연장에서 양식 악어를 가려와서 작은 공연을 한다. 여기까지 보고나선 다시 되돌아와야 했는데 결국 우리는 돌아올 때도 악어를 보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도 악어쇼(라기엔 악어 습성 설명회가 적당하다.)가 있으니 그걸로라도 세은이를 달래 봐야겠다 싶었는데... 기대가 컸던 나머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악어쇼가 시작되어 25살이나 된 커다란 언니 악어가 나와도, 악어가 가이드와 편안하게 같이 누워있는데도, 다른 집 어린이들이 새끼악어를 만져보고 사진 찍는 데도 우리 어린이는 심기불편, 요지부동이다.
저건 진짜 악어가 아니라고 한다. 저것도 진짜 악어인데... 양식이지만.
공연이 끝나고 찝찝한 기분으로 나오는데 출구 바로 옆에 있던 악어 우리를 보고는 세은이가 깜짝 놀랐다. 꽤 큰 놈들 10마리 정도는 들어있던 것 같다. "거봐 진짜 악어잖아! 근데 울다가 웃어서 너는 이제 큰일 났다."
다행히 세은이가 멋쩍게 웃는다. 이래저래 아쉬움은 있었지만 나중엔 이런 것 까지도 추억이 되겠지.
우리 어린이님 심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서둘러 다음 장소로 향했다. 아직 어린 아이다.
쿠바 이민자의 동네 : Little Havana
마이애미에서의 마지막 일정, 다운타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쿠바 이민자의 동네 '리틀 하바나 (Little Havana)'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거리 구경을 하려고 한다.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쿠바는 20세기 초반부터 미국의 식민지 우호국이 되었다.
미국 자본을 토대로 쿠바에 많은 산업이 번성했고 많은 미국인들이 휴가를 왔으며 많은 부자들의 별장이 지어졌다. 쿠바의 수도 하바나와 마이애미는 배로 12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그러다 1950년대 말 쿠바의 공산혁명으로 미국과의 수교가 중단되고, 그로 인해 하바나를 떠나야 했던 쿠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이곳 마이애미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정착촌이 바로 리틀 하바나다.
정착 초반엔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의 서글픈 동네가 아니었을까? 지금이야 이곳 젊은 친구들에겐 아주 오래된 할머니의 옛날 얘기 정도로만 여겨질 테지만.
리틀 하바나 주변 거리의 거의 모든 간판이 스페인어로 되어있다.
우리는 리틀 하바나 초기부터 있었다는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굉장히 넓은 홀에 친절한 직원들이 있는 식당은 음식도 입에 맞았다. 아내도 세은이도 만족해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리틀 하바나의 명물인 루스터(수탉, Rooster)를 보러 가야 한다. 칼레 오초(Calle Ocho)로.
(사진) 리틀 하바나 근처의 변호사 광고판. 영여는 아예 없고 스페인어로만 쓰여있는 곳이 많았다. (왼쪽) 리틀 하바나 SW 8th St. 거리 곳곳에 세워져 있는 수탉 조각상. (오른쪽) 창문이 철창으로 되어있는 리틀 하바나 거리의 식당. 칼레 오초라는 이름엔 특별한 의미는 없고 스페인 어로 '8번 거리'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사우스 웨스트 8번 거리(Southwest 8th Streeet)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쿠바가 서로 적대시하게 되어 갑자기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피난민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짐을 싸서 마이애미로 와야 했다.
그 당시 피난민들은 집집마다 키우던 닭을 가지고 미국으로 왔는데, 어느새 정착지인 리틀 하바나 거리엔 닭들이 활보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당시 미국사람들 시각에서는 '닭=쿠바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쿠바 사람들도 그런 자신들의 이미지를 지키며 살아왔던 것 같다. 큰 수탉 'Rooster'는 그렇게 쿠바 이민자를 상징하는 심벌이 되었다.
20년 전에 리틀 하바나에 있었던 쿠바인 축제를 계기로 중심거리인 칼레 오초에는 수탉 조형물이 하나둘씩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지금까지 칼레 오초 곳곳에 세워져 있는, 알록달록하고 사람 키만 한 루스터들이 리틀 하바나의 관광객들을 맞이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 수탉의 거리를 구경하러 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 도착을 해 보니 이미 상당히 어두워졌다. 우리가 미리 알아봤던 모습과 밤의 거리 풍경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서 길가에 주차를 해야 하는데, 다들 밤을 즐기러 나왔는지 아무리 돌아다녀도 주차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술집들, 그 앞엔 시거 담배를 물고 서서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있다. 유명한 관광 거리인데도 몇몇 상점들은 방범창으로 창문과 문이 되어있다.
방범창이 있는 동네는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아시아인 가족은 사람들에게 쉽게 눈에 띈다. 아무래도 지금 이 밤 시간에 세은이랑 갈 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꼭 와보고 싶어 했던 아내도 아쉽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거리를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루스터를 열심히 찍는다.
어두워서 잘 안 나온다고 불평하지만 내일도 쿠바 분위기를 살짝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으니 괜찮다.
빨리 쉬고 싶어 하는 세은이도 좋아했다.
3편에서 계속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