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022
** Key West 여행기 (3/4)에서 계속
플로리다에서 뉴욕 돌아간다. 올 때 3일 걸렸으니 갈 때도 3일 걸려 가야 한다.
갈길이 멀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플로리다를 그냥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 아내는 중간에 잠깐이라도 들를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아보고 있었다.
"여기, 트럼프 별장 있는데 아니야? 팜 비치. 뉴스에도 나왔었잖아."
도널드 트럼프는 2021년에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면서 정말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여러 뉴스 사진을 남겼다. 그중 하나는 팜 비치(Palm Beach, FL)에 있는 자신의 리조트로 헬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었다.
'그래, 팜 비치에 가보자. 혹시나 트럼프를 만나면 인사정도는 할 수 있으려나?'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팜 비치에 진입하니, 이곳도 마이애미처럼 육지는 번화한 다운타운, 다리를 건너 기다란 섬에는 해변과 휴양지가 있는 지형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일단 시내는 지나서 섬으로 간다.
트럼프의 마러라고 리조트(Mar-a-Lago)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섬의 입구 쪽 해변에 있다. 야자수에 살짝 가려진 스페인 풍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뉴스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다.
사실 이곳은 회원제 클럽이고 입구도 닫혀 있어서 함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심지어 경찰차가 입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차를 잠깐 세운다거나 기념사진 찍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트럼프 별장을 그대로 지나쳐서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길 주변 조경이 굉장히 깨끗하고 일반 상점이나 식당 같은 건 하나도 없다. 해변에 있는 일부 고급 저택들은 private beach로 자신만의 바다를 소유하고 있다. 역시 알려진 대로 미국 진짜 부자들의 휴양지다.
혹시나 해서 주변 숙박비를 검색해 보니 하룻밤 $1,000 이하는 찾을 수가 없다. 아마 $1,000도 이곳에선 저렴한 편이겠지.
팜 비치의 야자수는 이 도시의 상징이다. 특히 해안도로에서 볼 수 있는 야자수는 플로리다 다른 곳에 비해 키가 크고 시원시원한 것 같다. (150년 전 코코넛을 싣고 가던 스페인 선박이 난파되어, 그 코코넛들이 해변에 떠밀려와 야자수 숲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팜 비치라는 이름의 유래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고급 빌라 지역을 벗어나면 시에서 운영하는 공공해변이 나온다. 간신히 도로변 주차장을 찾아서 차 안에서 세은이를 수영복으로 갈아입혔다. 미국 진짜 부자들의 해변에서 잠깐 놀다 가자.
데이토나나 마이애미의 해변처럼 아주 넓지는 않은데 한국 동해안의 작은 해변 정도는 된다. 젊은 사람들 보다는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아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2월의 따뜻한 플로리다 바다를 마지막으로 즐겼다. 세은이가 트럼프의 기운을 받아 부자가 될 수 있으려나.
한참을 놀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안녕, 언제나 여름인 플로리다 바다.
로드트립에 익숙해지다 보니 고속도로변 주유소에서 패스트푸드로 식사하는 것도 좀 지겹다. 차라리 시간을 좀 더 쓰더라도 점심을 제대로 된 곳에서 먹고 싶다.
플로리다를 벗어나서 북쪽으로 향하던 중, 지도를 열심히 보던 아내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점심을 조지아 주 서배너(Savannah, GA)에 가서 먹자고 한다.
서배너는 조지아 주의 북쪽 끝에 있는 도시인데 고속도로에서 가까운 편이라 시간상 갈 만은 하다.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data 무제한 요금을 쓰고 있는 아내는 서배너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찾아서 알려주었다.
"서배너? 학교 다닐 때 서배너 기후 할 때 거기야? 아프리카?" "아, 그냥 이름만 같고 상관없는 겁니다."
"가면 뭐 있어?" "300년 된 곳이고 유럽풍 건물이 많대.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 처음 벤치 장면이 여기야."
"톰 행크스가 버스 기다리고 초콜릿 먹던 장면? 아, 그래서 조지아 비지터 센터에 포레스트 검프가 있었네."
"응, 맞아. 강이 크고 강변에 이런저런 가게들이 많은데, 거기서 점심 먹고 산책하다가 가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서배너라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I-95 북쪽방향 조지아 99번 출구로 나간다. 뭔가 관광지가 많아 보이는 서배너 시청 근처로 가보기로 했다. 어느 나라나 큰 관공서 주변엔 좋은 식당이 있기 마련이니까.
분명히 2월인데 조지아도 플로리다 못지않게 덥다.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더니 해가 쨍하다. 주변 건물들은 오래되어 보이고 나무들도 꽤나 크다. 정말 오래된 동네에 왔구나.
굵직한 가로수 나무 가지마다 축 늘어진 무언가가 달려 있어서 더욱 예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내 말로는 '스페인 이끼'라는데 실제 이끼는 아니고 기생 식물이란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아온 서배너 시청은 큰 강 근처에 있었는데, 시청에 볼 일은 없으니 강가에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강변 번화가인 East River Street는 정말 옛날 유럽 마을 같은 느낌이다. 테라스가 있는 아기자기한 벽돌 건물도 그렇고 도로가 아스팔트가 아닌 자갈길, 코블스톤(Cobblestone, 마차 도로에 깔던 자갈돌)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히 그렇다. 1층의 상점과 식당 분위기도 유럽 느낌이 난다.
강을 따라 걸으니 거리 공연과 관광객들이 북적대는 공원이 있고 조금 더 가다 보니 강가에 옛날 유람선이 정박되어 있다. 19세기에 미국 큰 강에서 많이 타던 배다.
커다란 패들 휠이 배 뒤편 외부에 달려서 '외륜선 (Paddle Wheeler)'이라고 하는 배인데, 우리에겐 '증기선'이라는 이름이 좀 더 익숙하다.
옛날엔 증기 기관으로 패들을 돌렸을 테니 증기선, Steam Boat였겠지만, 지금은 디젤 엔진일 테니 사실 증기선은 아니다. 세은이에겐 설명해 봐야 듣는 둥 마는 둥이다. 그래, 잘 보기라도 하렴.
시간이 별로 없어서 유람선은 탈 수 없을 것 같고, 그 대신 유람선이 잘 보이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1층 사탕 가게에서 특산 캔디인 피넛 브리틀(Peanut Brittle)을 샀다. 뉴욕 가서 Gavin이네 나눠줘야지.
강변 공원을 나와서 차를 가지고 포레스트 검프 벤치(@Chippewa Square)에 갔는데, 벤치는 오래전에 치워져 있었다. 고의적인 훼손을 막기 위해 박물관으로 옮겨놨다고 하는데 좀 안타깝다.
짧은 시간 머물다가 서배너를 떠나야 했지만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상당히 인상적인 곳이었다. 다시 기회가 있다면 하루정도 온전히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미국인 관광객도 많았다.
우리는 서배너를 떠나 계속 북쪽으로 달려서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하루 자고, 그다음 날 13시간 넘게 운전해서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또다시 차고 앞에서 박수를 치고 무사한 귀환을 축하하며 서로를 안아주었다.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노스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메릴랜드, 델라웨어, 펜실베이니아, 뉴저지를 지나 뉴욕까지 미국 10개 주를 무사히 지나서 여행을 마친 것이다.
12월과 2월, 이 두 번의 초장거리 로드트립 모두를 성공시킨 경험은 나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여행은 이웃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여행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은 날 보고 미쳤다고 했다.
우리는 'Crazy 한 여행을 다니는 한국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뚜렷하고 재미있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에 상당히 흡족했다.
불편한 차 뒷자리를 잘 참아준 세은이와 운전의 조력자로 점점 자리매김하는 아내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