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22
이제는 온전히 우리의 일상이 된 뉴욕 생활
우리가 미국에 온 지도 8개월이 넘어간다. 어리바리하며 좌충우돌하는 시절은 이미 지났고 이제는 먹고 지내는데 별 문제는 없다. 대부분의 상황이 예측되고 생활이 안정되니 세은이도 아내도 나도 온전히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여유가 생기자 동네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동네 맛집도 찾아다녔다. 미국 음식을 많이 먹어봐야 무엇이 어떤 맛인지도 알게 되고,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경험하게 되고... 그래야 세은이에게도 권해볼 수 있다. 맛없는 건 피할 수도 있고.
아내에게 돈 쓰는 걸 너무 겁내지 말자고 했다. 현지인의 일상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도서관이나 동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도움이 된다. 돈은 한국 가서 다시 모으면 되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마당 넓은 2층집은 낭만적이긴 했지만 처음 가졌던 만족감은 어느새 무뎌지고 이제는 불편함도 눈에 들어온다. 주말마다 마당이나 집 관리로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뒷마당 나무를 딱따구리가 쪼아대서 결국 쓰러지고, 2층 화장실에선 1층으로 물이 샜고, 외벽 환기구로 벌집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일도 있었다.
집주인에게 사진과 PPT로 잘 설명해서 이메일로 보냈는데 텍사스에 살고 있는 집주인은 늘 친절하게 답해주어서 참 고마웠다. 집주인이 관리를 위탁한 Tim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따져보면 집주인용 월세 보험에 들어있을 테니 우리가 일부러 파손한 게 아니라면 서로 얼굴 붉히거나 부담될 일도 없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주재원들 중에는 귀찮다는 이유로 집주인이 세입자의 연락을 무시하거나 '대충 좀 살아봐요'라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미국에서 만난 좋은 이웃, 좋은 집주인. 이것도 참 행운이다.
미국 직장 업무 문화 : 자유로운 출퇴근의 이면
이젠 회사 생활도 한국에서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다. 첫날엔 말 한마디 걸기 어려웠던 파트너와의 주간 미팅도 한국에서처럼 자연스럽다.
"애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해? 일 그만하고 얼른 퇴근해. 근데 내일 아침엔 자료 줘야 해" 이런 식이랄까?
물론 큰일이 생기면 양해받을 수 있긴 하지만 업무 일정에 결국 문제가 생기면 "누구의 무엇 때문에 지연되었다."라고 책임소재도 분명히 하는 분위기다.
일단 업무를 주고 나면 완전히 맡긴다. 잘하기만 하면 당연히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개인 일상에 대한 자유를 누리려면 회사일을 반드시 잘 '완성'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파트너들은 완전히 늦은 밤에 메일을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마 낮에는 아이 학교나 병원에 다녀왔겠지. 아니면 주말에 가족여행을 가야 하니 업무를 미리 다 해 두려는 것 일수도 있고.
이런 걸 보면 미국에서 일상을 유지하는데 이런 근무 문화가 좋다는 생각이 들긴 해도 한편으로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 본사에서는 사내에서만 시스템 접속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록 퇴근이 늦는 날은 많았어도 일단 퇴근을 하기만 하면 일에서는 벗어났다. 그런데 여기서는 언제 어디서든 업무 환경에 접속하는 것이 가능했다. 집에서든 여행을 가서든 아무 때나 어느 곳에서나 회사일을 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모습으로 살았다. 연초에는 일이 많고 바빴다.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날도 많았는데 정말 한국에선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12시 넘어서 그것도 내 집에서 회사 일을 하고 있다니.
그렇게 주중에 일을 열심히 하고 나면 주말을 오롯이 가족과 보낼 수 있었다. 아내와 세은이에게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가기로 했으니 나는 평일에 더 많이 일을 해 둬야 한다.
휴식을 법으로 강제하는 한국, 업무와 휴식의 경계가 모호한 미국. 제도상 차이는 크지만 실제 월 근무 시간을 따져보면 차이가 크게 있지도 않았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 처럼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되나 보다.
멀리서 보면, 결국 남의 돈 받아서 먹고사는 사람의 삶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큰 차이는 없는 것이 아닐까?
아직은 재택근무 중이니 실제로 출근하면 뭔가 다른 걸 보고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음 달이면 재택근무가 곧 끝납니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해.
미국 전역에 코비드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어서, Jason은 다음 달부터는 각자 요일을 정해서 주 3회 출근을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회사 한국 본사에서 모든 미국 지사로 내려온 방침이란다.
소식을 듣고, 파트너들은 어떤지 파트너 주간 미팅에서 물어보니 매니저는 매일 출근하지만 실무자들은 개인 선택에 맡긴다고 한다. 우리는 일괄 출근인데.
'한국 회사는 직원들이 재택 근무하는 걸 참지를 못하는구나. 파트너가 재택 근무하는데 나 혼자 사무실 나가면 뭐 하지?' 한 공간에 있어도 미국 회사는 미국 문화고 우리는 한국 회사라 한국 문화인가?
한국 직장문화의 유명한 격언 대로, 'SSKK : 시(S)키면 시(S)키는 대로. 까(K)라면 깐(K)다.' 그냥 하면 된다.
한국 본사는 코비드가 한창이어도 재택근무를 하지 않았다는데, 그래도 여기선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면 되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자.
하지만 나의 업무 동료는 주재원들이 아니고 파트너들이다. 파트너들이 출근 안 하는데 나 혼자 휘발유값 들여서 사무실 가고 하루종일 혼자 온라인으로 미팅하다 집에 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 궁금해하지 말자. 그냥 정말 'SSKK' 하는 거다. 한국 회사 다니고 있으니까.
아내에게도 올 것이 왔다고 통보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대비해서 운전 훈련을 열심히 해왔다.
아내는,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초보운전을 갓 벗어난 상태라서 20분 거리인 출퇴근 연습을 미리 여러 번 해야 했다. 몇 번 잔소리를 하고 나니 그나마 출근 준비가 된 것 같다.
세은이 영어 과외나 도서관 수업 같은 아내가 차를 쓰는 일정을 고려해서 나의 출근 요일을 정하고, 아내가 나를 회사로 데려다주고 퇴근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오는 것으로 했다.
주재원 생활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상황에서라면 차를 한대 더 살 수도 있겠으나 매일 출근도 아닌 데다 남은 시간은 1년 남짓이니 최대한 버티기로 한다.
출근이 시작되는 건 당장은 조금 불편해도 진짜 미국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미국사람들의 평범한 삶에 우리도 녹아들어 가는 것 같다.
다음 달이 되면 미팅에서만 보던 사람들도 직접 만날 수 있겠네. 잘 되었다.
미국 회사 속의 나, '나는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동료가 되고 싶어'
올해 초에 실무를 같이 할 파트너가 바뀌게 되었다. 갓 박사학위 받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결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인도 출신 Ushik와 주간미팅에서 인사를 나눴다.
아직은 온라인에서만 미팅을 하니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것에 꽤나 의욕이 느껴져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같은 부서 사람이라 해도 고과 경쟁상대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굉장히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 '계산'이 이해는 되지만 그다지 멋지지는 않다.
새로 온 이 파트너 친구는 나랑 같은 일을 나누어하게 되었으니 한국에서라면 경쟁관계다. 한국 본사 문화대로면 연말 평가받을 것 계산해서 서로 밟아 죽여야 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도 그러지 않았고 여기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소속이 다르고, 고과로 경쟁하고 있는 사이도 아니고, 진급도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내가 Ushik를 그런 식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Ushik에게 최대한으로 협력하고 도와줘야 할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잘 안 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미국에서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박사 신입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이 친구가 잘 되어 확실히 자리도 잡고 좋은 평가까지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어차피 내 평가는 고객사에서 하는 게 아니고 한국 본사에서 지들 맘대로 하는 거니까.
여기까지 와서 고작 한국 회사에서 주는 업무 평가 점수 같은, 눈앞의 짧은 이익에 집중하는 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럴 거면 미국까지 와야 할 이유가 없다.
주재원들 중에는 파트너와의 업무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에서 하던 것과 동일한 업무라고는 해도 아무래도 업무 환경이나 구체적 내용이 다를 테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주재원 전체 미팅 시간에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서 하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하고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에 반해 어떤 이들은 그것을 핑계 삼아 방어적으로 행동하고 파트너 탓을 입에 달고 있었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 중 극히 일부는, 심지어 한국 직장 문화 특유의 '빠른 계산'을 통해, 소극적 업무 대응을 하더라도 어차피 미국 파트너 직원이 해결책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계속 핑계 또는 모르쇠로 일관하더라도 한국 본사에서와는 달리, 실무 경험이 적은 Jason이 구체적인 업무 진척 확인을 하기 어렵다는 것도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잠깐의 시간을 버티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순간, 미국에서의 모든 업무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의 본업은 한국에 있고 돌아갔을 때 한국 직원들은 미국에서의 업적, 태도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들의 계산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을 하려 해도, 한국 본사에서라면 소위 씨알도 안 먹힐 변명들이 주간보고로 올라오는 걸 보면 내 짐작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씁쓸하고 서글픈 일이었다. 그들은 본사 각 팀에서 유능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미국으로 선발되어 온 사람들인데 그 유능함이 이런 식으로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굳이 남을 비난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어쨌든 남들은 남들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나는 '파견 와서 임시로 있다가 돌아갈 사람'이 아니라 '미국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민을 왔고 미국 회사로 완전히 이직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거에 상관없이 말 그대로 올인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미국 직장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런 '빠른 계산'의 결과물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한국 본사의 보호막을 걷고 나만의 나력(裸力, 지위와 권위를 벗어던진 오롯한 자신의 능력을 뜻함)으로 미국 회사에서도 살아남는 것이다. 어설프게 발 걸쳐서는 죽도 밥도 안된다.
나와 일 하는 파트너들은 Yale, Brown, Perdue, MIT, UCLA 등 명문대학 출신이 많다. 내가 학교 다닐 땐 언감생심 유학 같은 건 꿈도 꿔보지 못한 학교들이다.
지금의 내가 그들과 대등하게 서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내가 과연 오롯이 실력만으로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 진짜로 이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만약 나중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다시 겪어야 되겠지? 그렇다면 더욱 진짜처럼 살아야 그 연습이 되고 그때는 지금보다는 훨씬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이직 계획도 없고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계약 조항이 있지만 혹시 아는가? 진짜로 해외 이직에 도전하게 될지. 우연처럼 잡게 된 이 기회가 최대한 가치 있는 경험이 되도록 활용하고 싶다.
일정기간 현재의 회사에서 주는 돈을 쉽게 받아가는 행동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진심을 다해 얻어가는 성과와 인맥이 더욱 값지고 영원하지 않을까? 세은이에게도 그 무용담을 떳떳하게 전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회사에선 손님이 아닌 동료가 되도록, 나는 Ushik 같은 사람들과 최대한 협조하며 가깝게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내가 떠나는 날엔 우리가 친구가 되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달 뒤 출근하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