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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Apr 26. 2024

찬호형님에 대한 기억 : 하이브-어도어 사태에 덧붙여

최근 브런치스토리 글은 1주일에 1편 정도 쓰고 있었는데, 하이브-어도어 사태 터지면서 좀 많이 쓰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고 하니 딱히 회사일도 없고 기왕 필 받은 김에 한 편 더 쓰겠습니다.


어도어 민희진 대표 (이제 조만간 前 대표)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로 글 2편을 썼었는데, 오늘 인터넷 기사에 좀 황당한 얘기가 올라왔습니다. 민희진 대표 인터뷰를 놓고 '투머치토커 성향이 박찬호 형님 급이다!'라는 기사네요.


순간 좀 열받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찬호형님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포츠신문 기사로만 봤던 사람이지만 감히 이런 일에 찬호형님을 비교한다는 게 상당히 거슬렸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회사 대표 자리 꿰차고 돈 몇백억 땡겨먹다가 회사핵심자산 빼돌리려던 계획이 들통날 것 같으니 '이거 다 농담인데 왜 오버하고 지X랄이세요 개저씨들아 웅앵웅.' 시전하면서 일개직원 코스프레 하는 인간. 이런 저열한 인간을 감히 찬호형님에 비교해? 찬호형님이 이런 밑바닥 종자와 비교될 만한 분이야?


언론기사를 통해 드러난 인성만 갖고 따져도 찬호형님은 이런 밑바닥 딴따라와 비교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IMF 직후 암울한 나라에서 작은 희망이 되어 준 공적을 빼고 봐도 그러합니다.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말하고 하나씩 되짚어 보겠습니다. 지금은 야구 전혀 안 보고 운동경기에도 관심 없게 된 중년아재가 '한 때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는 남자 박찬호, 그의 인생역정을 언론에 보도된 기사 중심으로 짚어 보겠습니다.



1. 미국의 신참 투수 ~ 국민영웅으로 불리기까지


하이킥 이후 전력을 다해 던지는 파이어볼. 시속 155km를 넘어 가끔 160까지 찍히는 강속구 투수. 다만 제구가 불안함. 미국에 처음으로 진출할 박찬호에 대한 평가입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당시 한국에서 박찬호보다는 임선동/조성민 선수를 더 높게 평가했었다고 하네요. 물론 두 선수 모두 매우 뛰어난 투수긴 합니다만, 미국야구에서는 박찬호 선수를 픽업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구가 불안하긴 했습니다. 투구폼이 워낙 컸죠. 하이킥을 하면서 온 몸의 힘을 실어 공을 던지니 빠르긴 빨랐지만 그만큼 정확성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투구폼을 교정하면서 대박이 납니다. 최고시속은 약간 떨어졌지만 그래도 150km는 넘었고, 거기에 제구가 안정되니 실력이 확 올라온 겁니다. 일취월장, 괄목상대. 눈을 씻고 다시 쳐다봐야 할 만큼 성장합니다.


찬호형님은 한 해 10승을 넘겼고, 이내 14승 / 15승 / 18승 까지 올라갑니다. 18승 투수면 거의 팀 내에서 에이스 급인데 그 수준까지 올라간 겁니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LA 다저스가 국내 야구팀보다 더 유명할 정도였어요. 당시 IMF를 겪고 모두가 힘들 때라 더더욱 찬호형님의 성공스토리에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FA 대박을 터뜨리죠. 총액 6500만 달러에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 전통의 강팀에서 에이스가 됩니다.


다만... 인생사 새옹지마. 좋은 날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찬호형님도 그랬었죠.



2. 부상에 시달리는 에이스


팀 내에서 손꼽히는 연봉을 받고 사실상 1선발로 이적해 온 FA 투수. 연봉에 걸맞는 활약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을 겁니다. 특히 (나중에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정신이 투철한 찬호형님에게는 그런 부담감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과도한 부담감은 독(毒)이 됩니다. 부상을 입었는데도 무리하게 던지다 보면 더 탈이 납니다.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찬호형님은 부상과 질병 사이를 오갔습니다. 장출혈에 시달렸고 부상도 많았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컸던 것 같구요.


당시 찬호형님은 실패한 FA 명단 상위권에 들었습니다. 영 좋지 않았죠.


그리고... 찬호형님에게 환호하던 팬들과 기자들도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IMF 이후 암울한 시대에 희망이 되어 준 영웅은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저 또한 그 중 한 명이었죠. 스포츠 영웅에 열광하다 생업에 치여 잊어버리는 일반인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랬었습니다.



3. 행복한 마이너리거


챕터 제목의 글자색을 바꿨습니다. 제가 팬으로서 기억하는 찬호형님의 일화 중 가장 감명 깊었고, 지금 돌이켜봐도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입니다.


찬호형님 전성기 시절에 미국으로 특파된 기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오로지 박찬호 한 사람을 전담 취재하는 기자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스포츠신문들은 박찬호 취재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텍사스 이적 후 슬럼프가 길어지고 인기가 줄어들자, 스포츠신문들도 관심을 끊었습니다. 특파 기자들 상당수가 귀국했고 남아 있는 기자들도 찬호형님에게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민훈기 기자님'이 찬호형님을 찾아갑니다. 텍사스 레인저스 1선발이었다가 마이너리거로 내려간 선수를 오래간만에 인터뷰하러 갑니다.


민훈기 기자님의 인터뷰에 나온 문구. "얼굴이 엄청 밝고 편안해 보였다."



미국 야구에서는 메이저리거와 마이너리거의 대우가 천지차이라고 합니다. 메이저리거들은 구단 전용 제트기로 이동하고 특급 호텔 식사와 숙소를 이용하는 반면, 마이너리거들은 고속버스를 타고 햄버거를 먹는다고 합니다.


지방 사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 고속버스 5시간 정도 타면 몸이 엄청 뻐근합니다. 매일 타면 관절에 물 차는 느낌일 겁니다. 몸 써야 하는 운동선수들에게는 더 힘들겠죠.


햄버거로 식사 때우는 것도 계속 먹으면 질립니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운동선수들에게는 더 괴로운 일일 겁니다.


하물며 찬호형님은 메이저리거 중에서도 최상급 생활을 누렸던 선수입니다. 실패한 FA, 심하게 말해서 먹튀 논란이 있긴 했지만 이미 번 돈이 몇백억원이고 적절한 재테크로 천억원대 부자가 된 상태였으니 굳이 고속버스 타고 햄버거 먹을 이유가 없기도 했죠.


그런데... '얼굴이 엄청 밝고 편안했다'. 구단 전용 제트기, 특급 호텔 숙소와 식사가 싹 사라지고 없는데도 편안했답니다. 24시간 버스를 타고 햄버거 먹는데도 행복해 보였답니다.


민훈기 기자님은 '박찬호가 다시 재기할 거다.'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운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야구가 좋고 마이너리거든 뭐든 계속 야구를 하고 싶어하며 프로정신이 넘친다는 걸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부담감을 떨치고 다시 시작하면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기자님의 촉이 정확했습니다. 박찬호 시즌2가 시작됩니다.



4. 돌아온 코리안 특급 : 우승반지는 없었지만


한국 사람들마저 찬호형님을 잊어 갈 때. 그는 소리소문 없이 돌아왔습니다. 선발에서 중간계투로, 마무리로. 그리고 다시 '메이저리거'로.


박찬호가 부활했습니다. IMF의 영웅이 불꽃처럼 되살아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최전성기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찬호형님은 코리안 특급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 줍니다. 강팀 1선발의 부담을 내려 놓았기 때문인지 기대 이상으로 크게 활약합니다. 그리고 강팀 of 강팀이었던 '뉴욕 양키스'로 이적합니다.


뉴욕 양키스는 언제나 우승후보 0순위입니다. 실제로 우승도 많이 했죠. 우승반지를 노리는 선수들이 마지막 팀으로 양키스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찬호형님이 우승까지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는 안 됐습니다. 그 해의 양키스는 좀 비실비실했던 것 같네요. 결국 찬호형님은 우승반지를 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한국 야구선수로 한화 유니폼을 입어 주긴 했었죠. 역시 돈은 별 의미 없었고, 한국 팬들에게 보답한다는 차원이었을 겁니다.


한국야구 개막전 선발로 올랐을 때 상대 팀 두산 1번타자가 찬호형님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TV화면으로 봤지만 찬호형님 쪽에서 더 당황하더군요. 그래서인지 볼넷인가 안타로 1번타자를 내보내 줬습니다만...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 날 자체가 축제인데요.


언제 은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이너리거로 내려가 며칠씩 버스를 타고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끝까지 진심을 다해 노력했고 결국 다시 메이저리거로 올라왔다는 것, 그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합니다.



5. 이후의 평가 : 불꽃의 박찬호, 얼음의 류현진


한화의 또 다른 레전설 류현진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로 이적했을 때, 어떤 기자 분이 박찬호-류현진을 비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박찬호는 불꽃. 류현진은 얼음.


찬호형님은 마운드에서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습니다. 일구일혼(一球一魂), 공 하나에 영혼을 실어 던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로 있는 힘을 다 짜내 던지는 것 같았습니다.


기자 분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 같았다. 한순간 한순간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놀이(Play)가 아니라 전쟁(War)을 하는 느낌. 찬호형님의 플레이는 전쟁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뭐, 저는 개인적으로 전쟁처럼 경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쟁 같은 경기에 특화된 성큰옹(김성근 감독님)이 말년에 딱히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 같고, 그 전쟁의 와중에 희생된 선수들도 꽤 많았습니다. 어차피 즐기자고 하는 스포츠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별로더군요.


그렇긴 한데, 찬호형님의 불꽃 같은 전쟁플레이는 좀 달랐습니다. '진심을 다한다'는 게 느껴졌고 실제 본인의 삶으로 그 진심을 증명했으니까요.


가난하고 이름 없는 시절에만 전쟁처럼 싸웠던 게 아니라 몇백억 자산가가 된 후에도 버스를 타고 햄버거를 먹으며 진심을 다해 노력했었으니까요.



물론 '얼음의 류현진'을 깎아내리는 건 아닙니다. 한화의 소년가장(...)으로서 혼자 마운드를 지켜 온 정신력, 어떤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과 자신감. 그 냉정함이 류현진의 장점이고 대단한 가치입니다.


야구선수 자체로서는 류현진이 더 높게 평가받을 것 같습니다. 실제 메이저리그에서의 성적, 최저자책점 등 지표를 봐도 류현진이 더 낫긴 하죠. 찬호형님은 '최초의 10승 메이저리거'지만 최고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류현진 쪽에 한 표 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임팩트(Impact)는 찬호형님이죠. 이를 악물고 금방이라도 '으악!' 소리를 지를 것 같은 표정으로 온 몸의 힘을 짜내 던지는 모습, 그것만큼은 따라갈 선수가 없습니다.



6. 투머치토커 하나만으로 그를 깎아내리지 마라.


찬호형님을 만난 적은 없고 그냥 카더라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찬호형님은 '투머치토커'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다 보면 귀에서 피가 난다는 얘기도 있죠. 이 컨셉으로 광고까지 찍었다고 합니다.


만리타향 미국에서 하루하루 전쟁 같은 삶을 살다가 한국말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투머치토커 될 겁니다. 이건 단점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찬호형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받아들일 겁니다.


그러나... 오늘 기사처럼 하찮은 밑바닥 딴따라 언론플레이에 찬호형님을 끌어들인다면...


저는 화 낼 겁니다. 어디 감히 밑바닥 잡것들에게 찬호형님을 갖다붙이냐고 발끈할 겁니다.


저는 평소 사람을 전혀 존경하지 않고 주위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소시오패스지만, 찬호형님 정도로 한 분야에서 최고의 열정을 보여 준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존중을 해 드려야 하고 또 가급적이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대표이사로 몇백억 땡겨먹고 회사에 손해 끼치려던 시도는 농담으로 두리뭉실 넘기려 하면서 일개 직원 코스프레 어쩌고 웅앵웅거리는 인생에게 찬호형님을 갖다붙이면 안 됩니다. 그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를 모욕하는 짓입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웹소설 소재 모음집'에서 주제와 거리가 있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해 버린 것 같네요. 스포츠 소설을 쓸 만한 역량은 안 되는데...


그래도 능력이 된다면 찬호형님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고 싶긴 합니다. 물론 거기서는 메이저리그 우승반지 끼게 되겠죠. 기왕이면 메이저리그 7차전에 마무리 투수로 올라가 구원승을 하는 게 더 나을 거구요.


아니, 제가 아닌 다른 소설가 분이 써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필력 좋고 스포츠에 대해 잘 아시는 작가 분이 찬호형님과 얘기 잘 하시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네요. 물론 귀에서 피 좀 나는 건 감수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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