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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Nov 18. 2024

태권도 아이얍! (하)

(앞 편에 이어서 씁니다.)


(4) 태권도의 짤짤이발차기는 의외로 무섭습니다.


앞에서 '태권도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MMA 식 종합격투기가 뜬 이후부터는 더하죠. MMA 무대에 태권도 선수들이 거의 올라오지 않으면서 '태권도는 매우 약하다'라는 인식까지 함께 퍼지고 있는 편입니다.



그래플링, 즉 레슬링과 유도와 각종 체술을 합친 엉겨붙는 싸움에서는 태권도가 힘을 못 쓰긴 합니다. 그래플링 기술을 연습하는 사람은 덩치를 불리고 잡아당기는 힘을 키우며 그렇게 두꺼워지고 단단해진 근육을 일종의 생체갑옷으로 활용해 근접타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게 단련하는데, 장거리 발차기가 중심인 태권도 입장에서는 그래플링 수련생에게 붙잡혔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패널티를 입게 됩니다.


그렇다고 입식타격 쪽에서 태권도가 강한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최소한 일반인의 인식 수준에서는 '태권도는 킥의 위력도 약하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뭐, 킥 자체의 위력만 놓고 보면 태권도 식 발차기의 위력은 중하 수준입니다. 킥(Kick)끼리 비교한다면 태권도 발차기는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에요. 일격필살을 노릴 만 한 발차기는 아니라는 게 명확한 사실이긴 합니다.



강한 발차기의 대표주자로 '무에타이'가 있는데요. 무에타이 쪽 킥(Kick)은 태권도와 다릅니다. 단련 방식, 타격력을 내기 위해 활용하는 신체 부위, 타격 의도 모두가 명백하게 다릅니다.


무에타이 킥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압도적인 한 방'을 추구합니다. 상대가 팔로 막을 수도 있지만 그 팔의 방어까지 무너뜨리는 게 주된 목적이고 단련법입니다. 즉, 발차기하는 사람의 체중과 근육 힘을 최대한으로 실어 크고 강하게 돌려차는 킥이 핵심입니다.


(만화 '베르세르크'에 비유한다면, 상대가 방패와 갑옷으로 방어하더라도 그 전체를 무력화시키고 일격에 박살내는 방식의 대검술 컨셉입니다. 그 기술이 극한에 이른다면 가츠의 드래곤슬레이어 수준으로 활용 가능하겠죠.)


당연히 무에타이 킥은 동작이 커집니다. 상대가 바로 앞에 있다면 '상대방을 밀어내어 쓰러뜨리는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상대의 중심축을 뒤흔들어 옆으로 튕겨 내도록 킥을 구사하고, 그러려면 발차기하는 사람의 무게중심까지 무너질 정도로 크고 강하게 킥을 차야 합니다.


이 때 고려해야 할 게 작용-반작용 법칙인데요.


(만화 '바람의 검심'에서는 이중극점 삼중극점으로 반작용을 상대에게 되돌려 버립니다만 그건 만화 얘기고)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상대에게 강한 작용을 가한 만큼 시전자도 반작용을 받습니다. 전력을 다한 발차기에 반작용이 오면 발차기하는 사람도 상당한 역타격을 입는다는 거죠.


그래서 무에타이 킥은 발등으로 차지 않습니다. 발목 부위 또는 그 위쪽 정강이를 활용하고, 그 부분을 집중 단련해 반작용을 버틸 수 있게 합니다. 발에 너무 큰 부담이 가지 않도록 발목 부분으로 상대를 타격하는 '감아차기' 기술도 추가하죠.



반면 태권도의 킥은...


태권도 발차기를 '짤짤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정치인 중에 짤짤이를 ㄸㄸㅇ로 발음하면서 매우 좋은 파장을 일으킨 사람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반대였을 수도 있다는 함정이고 그게 좋긴 합니다만...) 태권도의 짤짤이발차기는 그런 것과 무관하게 원래 의미의 짤짤이와 비슷합니다.


짤짤이발차기. 저도 어릴 때 이 방식으로 연습했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짤짤이발차기를 하는데요. 이건 무에타이 킥과 반대로 '자기 몸의 균형을 잃지 않고 발차기를 빠르게 회수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무에타이 킥이 자신의 무게중심을 놓칠 정도로 강하게 차는 쪽이라면, 태권도 킥은 자신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면서 '빠르게 차는 쪽'에 집중합니다. 무에타이 킥이 감아차기라면 태권도 킥은 '끊어차기'죠.


끊어차기 방식의 킥에서는 반작용이 적기 때문에 발등으로 차도 부상 우려가 적습니다. 끊어차기 식 앞차기에서는 발가락 바로 아래를 활용하기도 하죠. 속도를 최대한 올려서 상대의 빈틈을 공략하고 곧바로 발을 회수하는 식으로 타격을 하고, 훈련도 그렇게 합니다.


물론 태권도에도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릴 만큼의 크고 강한 킥이 있습니다. 발뒤꿈치로 마빡을 찍어버리는 찍기 / 화려한 뒤돌려차기와 회축 같은 건 무에타이 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긴 합니다. 짤짤이 앞차기와 돌려차기가 워낙 많이 나올 뿐입니다.



이렇게만 쓰면 [무에타이 킥 짱! 한 방이 엄청 강하잖아!]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그건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건 역으로 [실제 상황에서는 태권도의 짤짤이발차기가 오히려 더 우월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앞에서 '베르세르크'를 잠시 언급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중장갑 기사들이 모두 가츠 수준의 활약을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피스 / 세르피코 같은 세검(細劍) 계열 캐릭터나 주도 / 밤톨머리(이름은 기억 안나네요...) 같은 쌍수(雙手) 단검 캐릭터가 인간 레벨에서는 더 크게 활약합니다.


즉, 일격필살 한방 킥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닙니다. 그 일격필살 킥을 가츠 수준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엄청 좋겠지만, 대부분의 현실 인간들은 그 정도 반열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각각의 킥(Kick)을 복싱 기술에 비유한다면, 무에타이 킥은 풀 파워 스트레이트 내지 훅(Hook) / 태권도 킥은 잽(Jab)과 비슷합니다. 스트레이트나 훅은 제대로 맞추기만 하면 한 방에 K.O를 따낼 수 있죠. 잽은 대부분의 경기에서 견제용으로 쓰이고 일격필살 용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최상급 복서 중에는 잽만 쳐서 상대를 다운시켜 버리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과거 '플리커 잽'을 창시했던 (미들급 몸무게에 헤비급보다 더 긴 팔을 가진 괴물) '헌즈'가 잽만 쳐서 다운을 뺏는 걸로 유명했죠. 정확하고 빠른 잽은 상대의 턱과 눈을 뒤흔들면서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율을 얻어냅니다.


주먹으로 잽만 날려도 사람 하나를 쓰러뜨릴 수 있는데, '발로 차는 잽'이라면 어떨까요?


사람의 다리는 팔에 비해 통상 5배 이상의 힘을 냅니다. 즉, 풀 파워의 1/5 정도로 가볍게 차는 것만으로도 발차기의 위력은 주먹 풀스윙 급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태권도 발차기가 짧게 끊어차는 짤짤이발차기라고 해도 일단은 '발'입니다. 본인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면서 풀파워의 1/5로만 날려도 주먹 스트레이트와 맞먹는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정확하고 가볍게 차면 턱이나 명치에 스트레이트 펀치 급 일격을 가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태권도 킥을 맞아 보면 상당히 무섭습니다. 특히, 제가 지난 편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선수 급으로 훈련하고 발차기가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킥을 날리는 상대에게 킥 맞아 보면 절대 '짤짤이발차기 캐허접!' 같은 소리 못 합니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눈에 불이 번쩍거리고 턱이 흔들리고 정신을 못 차리는데 그냥 빨리 바닥에 엎드려서 살려주세요 시전하고 싶어집니다;;



태권도 킥의 위력이 약하다고 폄하하시는 분들은 진짜 제대로 된 태권도 킥을 안 맞아 보신 분들입니다. 풀파워 주먹 스트레이트보다 더 강한 발차기가 / 주먹 잽과 맞먹는 속도로 날아오고 / 그것도 아래쪽 에서 후욱 치고 올라오는 걸 턱에 맞아 본다면, 더 이상 태권도 킥 약하다는 얘기 못 합니다.


무에타이 식 발차기가 '한 방의 위력'으로 따지면 더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풀 파워를 실어서 차기 때문에 강한 것 뿐이고 그 풀 파워 한 방을 시전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걸 고려해서 보셔야 합니다. 강력한 한 방이 멋지긴 하지만 실전에서는 멋진 한 방을 작렬시키기 어렵죠. 멋진 걸 추구한다면 태권도의 뒤돌려차기와 회축이 더 멋지구요.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태권도 짤짤이발차기는 상당히 뛰어난 발기술입니다. 복싱의 기본이 잽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진짜 뛰어난 특급 복서라면 그 기본 잽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태권도 짤짤이발차기만 제대로 하면 입식타격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다는 건 아니에요. 저는 3전 3패 2KO패... 운동신경은 노오오오력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5) 실전 태권도라면 하단공격이 짱!


태권도 식 (짤짤이)발차기가 상당히 강하고 빠르다는 얘길 했는데, 이걸 제 친구들(주로 한평생 싸움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는데 격투기 경기를 보면 불타오르는 이론가들;;)과 얘기하다 보면... 이런 지적이 나옵니다.


"어차피 저런 발차기 써먹을 공간이 없잖아?"


뭐, 이 지적 자체는 정당합니다. 실제로 중~고딩 때 싸움 붙으면 좁은 공간에서 레슬링 하듯이 엉겨붙는 경우가 많고, 거리를 확보해서 하이킥 날릴 만한 상황은 잘 안 나오죠.


그리고 지적 하나 더. 이건 친구들 중에서도 좀 더 이론에 치중하는 친구가 하는 얘긴데요.


"MMA 케이지 격투에서도 태권도 발차기 거의 안 쓰던데. 다들 감아차기로 차잖아?"


이 지적도 정당합니다. 케이지 격투를 하는 선수들, 즉 '맞짱으로 먹고 사는 선수들'은 태권도 식 (짤짤이)발차기를 거의 안 합니다. 제가 제목에서 강조한 하단공격을 하는 경우에도 감아차기 식으로 강하게 차고 끊어차는 방식의 발차기는 안 합니다.



발차기 써먹을 공간이 없다. MMA 뛰는 전문 격투가들이 공간을 확보하고 하단 발차기를 하는 경우에도 태권도 식 끊어차기는 거의 안 한다.


이 두 가지 지적 모두에 대해 공통적으로 답변하겠습니다. [신발 신고 싸우는 길거리 싸움에서는 태권도 식 발차기로 하단공격해도 충분히 먹힌다] 로 요약하면 되겠네요.



자, 첫 번째 공간 문제.


우리가 중고딩 때 서로 맞짱뜰 때에는 공간이 부족하긴 했습니다. 책상과 걸상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싸우면 당연히 좁죠. 태권도 체육관에서는 머리까지 올라가는 하이킥 중심으로 연습했는데 교실 책상 사이에서 이런 거 하다가는 발이 책상에 걸려서 혼자 자빠집니다;;


그러나, 학교 이외의 공간에서 시비가 붙었고 / 체육관 식 하이킥을 포기한다면, 상대의 하반신을 노리는 발차기는 상당히 위력적입니다. 특히 '신발'을 신고 싸우는 상황이라면 더하죠.


구두는 의외로 딱딱합니다. 운동화는 신는 사람 입장에서는 푹신하지만 여기에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리 푹신하지 않아요. 군인용 전투화를 신고 발차기를 하면 뭐... 이건 망치로 때리는 것과 맞먹습니다.


또한 신발을 신으면 타격하는 쪽의 발이 강하게 보호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타격하는 쪽의 발에 반작용이 오는데, 이 반작용을 상당 부분 흡수해 주죠. 안전해지는 만큼 더 강하게 찰 수 있습니다.


(복싱에서도 글러브를 끼고 때릴 때 더 강한 펀치를 내지른다고 하죠. 인간도 동물인 이상 본능적으로 자신이 다칠 상황이면 몸을 사리고, 때린 만큼 반작용이 올 것을 예상하면 힘이 덜 실립니다. '신발 신은 발차기'는 글러브를 낀 복서의 주먹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죠.)


이렇게 신발로 보호되는 발로 허벅지나 무릎을 강하게 차면, 이게 주먹으로 풀 파워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것과 맞먹는 타격을 줍니다. 특별히 하반신을 단련하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다리가 꺾이면서 쓰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다면 버티겠지만... 상대를 봐 가면서 싸워야겠죠? 육식동물이 만만한 상대만 골라서 싸우는 건 절대 비겁한 게 아닙니다^^)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신발 신은 발로 상대방의 하반신을 노려 차는 것. 이거 꽤 좋은 작전입니다. 짤짤이 끊어차기로도 충분히 효과적입니다.



다음 두 번째. MMA의 전문 격투가들은 왜 하반신 발차기를 할 때 무에타이 식 감아차기로 차느냐?


이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들은 신발을 신지 않은 채 싸우고, 둘째로 전문 격투가답게 하반신을 겁나 단련하기 때문입니다.


MMA에서 손은 특수한 글러브를 써서 펀치와 잡아채기를 다 할 수 있게 하지만, 발은 별다른 게 없습니다. 발차기 자체는 허용되지만 발 부상을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는 얘기죠.


계속 나오는 얘긴데, 발등이나 발끝으로 차면 타격하는 쪽도 동일한 반작용을 받으면서 발등/발끝을 다칠 수 있습니다. 부상 확률을 줄이면서 더 강하게 차려면 발목 내지 정강이를 타격 부위로 활용할 수 밖에 없죠. 자연히 무에타이 식 발차기로 감아차야 합니다.


그리고, 격투기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신체를 극한으로 단련합니다. 하반신 발차기가 허용되는 MMA에서 자기 다리를 단련하지 않는 격투가는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허벅지는 물론이고 무릎과 종아리도 어지간한 발차기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련해 둬야겠죠.


이렇게 '일반인보다 훨씬 더 방어력 좋은 격투가'를 상대로 해서는 태권도 식 짤짤이발차기 끊어차기로 큰 타격을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같은 자리를 몇십번 때릴 수 있으면 효과를 보겠지만 그 동안에 상대방도 가만히 있진 않겠죠;;


다만, 우리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격투전문가의 방어능력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일반인들은 '신발'이라는 보호장비(!)가 있죠. 그냥 신발 신고 까 버리면 됩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제가 엄청 싸움 잘 하는 사람 같은데요. 계속 강조하지만 저는 3전 3패 2KO패의 처참한 몸치입니다. 실전은 이론과 달라요;;



(6) 오의(奧義) 내지 극의(極義)는 소설에서나 나오는 설정


예전의 홍콩 무술영화, 각종 무협지 등등에는 비기(秘技)가 나옵니다. 흡성마공, 거세정진(!) 등의 초월적 기술도 있고, 무영각(그림자 없는 발차기) / 사자권(손가락을 사자 손톱 수준으로 딱딱하게 단련하여 손가락으로 베어버리기) 등등 잘 하면 현실에서도 될 것 같은 기술도 있습니다.


뭐, 현실에서 될 것처럼 묘사해도 결국 해 보면 안 됩니다. 물리법칙은 그냥 있는 게 아니거든요. 비기 같은 건 상상력의 산물일 뿐,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인간이 치열하게 몸을 단련해도 고릴라랑 싸우면 1분 안에 피떡 됩니다. 하다못해 인간 몸무게의 절반 수준인 침팬지와 싸워도 어지간한 인간 90%는 패배할 겁니다. 호랑이나 사자 급으로 올라가면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오의, 극의, 비기 같은 거 현실의 물리법칙 앞에서는 다 연기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현실 물리법칙에서는 속도와 힘 두 가지만 따지면 끝이에요. 상대보다 빠른가 / 상대의 방어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츰 충분히 강한가, 이 두 가지로 모든 게 결정납니다.


물론, 중국의 태극권이나 일본의 합기유술처럼 '상대의 빠르고 강한 공격을 받아넘겨 역습한다!'는 테마의 격투기도 있습니다. 가아끔 영화 등 콘텐츠에서는 이런 받아넘기기 식 격투술을 매우 띄워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태극권 최고의 고수라 해도 호랑이의 앞발치기를 받아넘길 수는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이미 호랑이와 맞짱뜬 사람이 나왔겠죠. 가상소설 수호전의 무송 외에는 아직까지 호랑이와 맨손으로 싸워 이겼다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볼 때, 태극권/합기유술의 받아넘기기 기술로도 호랑이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겠죠.



호랑이는 너무 극단적이긴 합니다만, 결국 인간 사이의 대결에서도 빠르거나 / 강하거나 둘 중 하나로 승부가 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의 차이, 운용 기술의 차이도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핵심은 '빠르거나 강하거나' 입니다. 인간의 규격 범위 내에서 최대한 빠르게 / 최대한 강하게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다 보니 21세기의 격투기는 거의 다 비슷해지고 있죠. 거의 모든 격투가들이 그래플링 기술을 연습하고, 상대의 타격을 받아낼 수 있게 맷집을 강화하며, 가볍고 빠른 움직임을 위해 복싱 스텝을 밟습니다. 발과 주먹에서 끊어치느냐 / 밀어치기 내지 감아차기 식으로 강하게 치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빠르고 강하게' 칠 수 있도록 연습합니다.



현실에서 강해지려면 '평타 최강'이 되는 게 정답입니다. 무슨 오의를 터득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평타 공격이지만 사실은 암타 공격이라 가볍게 때려도 오장육부가 뒤틀린다는 등의 설정은 창작 콘텐츠에서만 즐기면 됩니다. 현실은 평타 중심이고 '빠르고 강한 평타'가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물론 저는 그게 안 됩니다;; 운동은 재능 없으면 극복할 수가 없어요. 격투기는 특히 더 그렇죠.



(7) 그래도 소설에는 도움이 됩니다.


이것저것 격투 이론이랍시고 늘어놨는데... 현실 싸움에는 쥐뿔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들이 포물선 운동의 중력가속도와 운동 에너지 변화량과 그걸 구하기 위한 미적분 이론 따위 전혀 몰라도 공만 잘 차면 그만인 것처럼, 현실의 싸움에서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근육량과 근육 반응 속도가 모든 걸 결정합니다. 이론을 알아도 몸이 둔하면 현실에서 구현할 수가 없어요.


그렇긴 한데... 어찌됐든 태권도 7년 배웠고 그 동안 엄청 처맞았으며 나름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하긴 했습니다. 그게 중년 이후에 소설 쓰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건 미처 예상 못했었구요.


45살 이후에 소설을 쓰다가 문득 상당수 격투 장면에서 '과거에 생각했던 것'을 반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느려터진 제 몸으로는 구현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 제 상상 속 영웅들(손오공, 우마왕, 항우, 여포, 기타 그에 맞먹는 창작 영웅들)을 통해 글자로나마 형상화되고 있더군요.


결론은 '소설 짱!' 입니다. 현실의 물리법칙을 초월하여 마법과 칼이 부딪히고 만부부당의 용자들이 며칠씩 극한의 무예를 겨루는 곳. 모든 것이 가능한 곳. 그게 소설입니다.



패배율 100%의 태권도 유단자가 이것저것 읊어 봤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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