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저 자신은 쇼츠 영상 같은 걸 거의 안 보는 편입니다만, 제 딸들은 잘 봅니다. 아무래도 어리고 젊은 사람들이 최신 트렌드에 잘 적응하긴 하는 것 같아요.
휴일에 쉬는데 큰딸이 쇼츠 영상 하나를 보여 주더군요. 파이어족 남친 vs 욜로족 여친 간의 의견대립을 다룬 내용이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 파이어(FIRE) 족 :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경제적 독립을 이뤄 일찍 은퇴하겠다는 사람들. 주로 30대에 빡세게 벌어 40대에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함.
- 욜로(YOLO)족 : You Only Live Once. 한 번 사는 인생 뭐 있어. 당장 원하는 거 사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이라고 합니다.
파이어족은 미래에 편하게 돈을 쓰려고 당장은 돈을 아낍니다. 은퇴한 후에도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려면 종자돈을 마련해야 하니 20~30대에는 최대한 지출을 줄여야죠. 은퇴할 정도로 돈을 모은 다음에는 좀 여유롭게 살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구두쇠로 살아야 합니다.
욜로족은 당장 가진 돈을 다 쓰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걸 얻으려 합니다. 명품백을 갖고 싶으면 사야 하고, 자동차를 바꾸고 싶으면 바꿔야 하며, 골프 배우고 싶으면 배워야 합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고 일단은 하고 싶은 걸 해야 합니다.
뭐 개념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게 극단적으로 나뉘지 않고 적절히 오락가락하면서 살겠지만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면 이해하기 편하잖아요. 쇼츠 영상에서는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게 좋으니 그 정도로 이해합시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파이어족/욜로족 비교를 보고 제가 생각한 건 좀 다른 지점이었습니다. [왜 둘 다 돈 쓰는 일에만 신경을 쓰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제 생각은 항을 바꾸어 서술하겠습니다.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야죠.
2. 본론
(1) 대부분의 취미는 돈을 쓰는 것
당장 돈 쓰자는 욜로 / 당장은 돈을 아끼고 노후에 편하게 돈 쓰자는 파이어.
양 쪽 입장이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양 쪽 모두 '언젠가는 돈을 쓰면서 원하는 걸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됩니다. 돈을 쓰는 시기가 다를 뿐 '취미를 즐기면서 살려면 돈을 써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뭐,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게 맞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취미활동은 돈을 쓰는 것이죠. 몇몇 취미활동은 돈을 꽤 많이 씁니다.
대표적인 취미활동을 손꼽아 보면...
골프, 여행, 테니스, 낚시, 등산 정도가 나오겠네요. 조금 더 나가면 자동차 수집(교체)이나 명품가방/구두 사는 것도 취미로 볼 수 있겠죠.
골프는 한 번 시작하면 월 100만원 우습게 사라집니다. 여행은 비행기 표 가격만 해도 후덜덜하죠. 테니스는 어디 관공서 테니스장 이용할 수 있는 분들 아니면 골프 급으로 비싸고, 낚시는 작은 배 한 척 빌려서 1박2일 다녀오면 몇백만원 씁니다.
등산은 원래 돈 안 드는 취미였습니다만... 언젠가부터 이 Hell조선의 등산 문화는 '패션쇼'로 바뀌었습니다. 해발 1500미터도 안 되는 산에 올라가는데 다들 풀셋 장비 착용해야 해요. 제가 대학생 때는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설악산 지리산 종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모두 풀셋 장비가 기본입니다.
자동차 수집(교체)나 명품가방/구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건 평균적인 사람들의 월급으로 감당이 안 됩니다. 몇 달 동안 착실하게 돈 모아서 한 방에 지르거나, 아니면 대출 땡겨서 도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술'이 취미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돈만 쓰는 게 아니라 몸도 망가집니다. 망가진 몸을 회복하느라 나이들어서 의료비 꼬라박기 시작하면 답 없습니다...
제목에 썼듯이 우리가 취미활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돈을 쓰는 활동'입니다. 몇몇 유튜버나 연예인들은 그걸로 돈을 벌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쓰죠.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돈 들어가는 취미활동을 위해 당장 돈을 쓰느냐 (욜로) / 당장은 참고 버티면서 미래에 돈을 쓰느냐 (파이어). 현실에서 일반인들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휴일에 쇼츠 영상을 시청했던 제 큰딸도 같은 고민을 했구요.
그런데... 진짜 선택지가 둘 밖에 없을까요? 다른 선택은 없을까요?
저는 나름대로 '제3의 선택'을 했습니다. 제 큰딸에게도 그 제3의 선택을 추천했죠.
제3의 선택. 바로 [돈 안 드는 취미]입니다.
(2) 돈 안 드는 취미 1 : 게임 (그것도 고전게임)
돈 안 드는 취미 1순위로 게임(Game)을 들고 나왔습니다. 제가 고시생을 가장한 백수 시절에 즐겨 했던 취미활동이죠. 너무 즐기다 보니 본말전도가 일어나 하루에 14시간씩 게임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뭐 다 지나간 얘기입니다.
'게임은 돈 안 든다.'고 하면 가끔 반박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최신 게임은 현질해야 해!"라는 신념(!)을 가지신 분들이죠. 심지어 제 딸들도 가끔 그런 신념을 보여 줍니다.
그 신념에 딱히 반박하진 않습니다. 모바일 게임 하다 보면 캐릭터를 예쁘게 꾸미고 싶어지고, Pay to Win으로 설계된 게임에서는 현질파워로 다른 유저들을 박살내고 싶어집니다. 게임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대리충족하기 위해 탄생했는데, 그 대리충족을 좀 더 잘하는 수단으로 돈을 쓰는 게 잘못된 건 아니죠.
그런데 말입니다.
게임의 본질이 '욕망의 대리충족'이라면... 굳이 더 높은 수준의 대리충족을 이룰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대리충족은 어차피 현실이 아닙니다. 게임에서 Player Kill 성공한다고 해서 현실에서 사람 죽이는 게 아니듯이, 게임에서 현질파워로 갑질한다고 해서 현실에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즉, 게임 내에서 NPC를 상대로 승리하는 거나 / 모니터 너머에 있는 다른 유저를 상대로 승리하는 거나 별 차이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대리충족'이에요. 현실의 승리와 무관하게 각 개인 컴퓨터와 게임회사 서버에서 숫자로만 이루어지는 승리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이렇게 '대리충족'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시작한다면, 각각의 게임 유저들은 자신의 상황과 취향에 맞는 개별적인 목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꼭 현질파워로 짱 먹는 것 말고도 다양한 목표가 나오겠죠. 예를 들어, 게임을 할 때 처음부터 '돈 안 쓰는 라이트유저 중 가장 뛰어난 유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도 있는 거죠.
저는 20여 년 전부터 게임을 즐겨 했습니다만, 현질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돈 안 쓰는 범위에서 온라인게임을 했던 시절이 있고 또 그 때에는 시간을 꽤 많이 들이긴 했지만 돈을 쓴 적은 없었어요.
(물론 PC방에서 게임했으니 PC방 사장님이 대신 사용료 내 줬긴 했습니다만 그건 뭐 논외로 하고.)
당시에 현질할 능력이 없긴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안 하고 백수고시생인 상태에서 게임하는 거니 현질을 할 수가 없죠. 아무리 놀고먹는 막장 고시생이라고 해도 생활비로 현질하면서 게임하는 단계까지 가면 안 됩니다;;
그렇게 "절대 현질 불가!" 상태로 게임을 하다 보니, 결국 자기합리화(!)를 거쳐 '굳이 현질 안 해도 라이트유저 중 가장 뛰어나면 되는 거 아냐?'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론 이후 계속 무과금 게임 유저로 살아 왔죠. 지금도 그렇구요.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은 계속 발전했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고전게임은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저작권 문제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검색만 해 보면 `90년대 명작 고전게임들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연식이 된 게임은 장기/바둑 수준으로 고전게임이 되어 사실상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시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온라인 게임들도 목표를 '라이트 유저 중 효율적으로 캐릭터 운용하는 사람'으로 잡으면 무과금으로 게속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시대. 또 그런 무과금 중심 게임을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는 시대.
2024년 대한민국은 '무료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현질 안 해도 충분히 즐겁게 게임할 수 있어요. 애당초 1990년대에 즐겁게 했던 게임이 2020년대에 무료로 풀렸다고 해서 재미 없을 리가 없잖아요.
젊었을 때에는 게임으로 시간 날린 게 아쉬웠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저는 아주 만족합니다. 그 덕분에 돈 안 드는 취미가 생겼거든요.
자식들에게 게임을 금지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저는 제 딸들이 게임하는 걸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적당히 즐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취미생활 한두개는 갖고 있어야 하고, 계속 막아 놨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들여 통제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게 낫죠.
돈 안 드는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게 된다면 욜로 활동으로 돈 쓸 일도 없고, 은퇴 후에 과도한 생활비 지출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딱 의식주 해결할 돈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여기에 더해, 돈 안 드는 취미가 하나 더 있으면 조금 더 좋겠죠. 그 돈 안 드는 취미로 약간이나마 돈을 벌 수 있다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겁니다.
제 두 번째 취미. '웹소설 쓰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3) 돈 안 드는 취미 2 : 웹소설 쓰기 (심지어 돈을 벌 수도 있음)
다른 글에서도 조금씩 언급했었는데, 저는 원래 23살 무렵에 SF소설 하나를 구상했었습니다. 27살에 늦게 간 군대 시절에 행정병 지위를 남용(!)하여 29살 병장으로 전역할 당시 200화 정도까지 쓰기도 했었죠.
이 소설 후반부를 다 집필하고 총 314화 분량으로 연재하기 시작했던 건 45살 때였습니다. 처음 구상했던 때로부터 약 20여 년이 흘렀고, 절반 넘는 분량을 썼던 때부터 계산해도 16년이 지난 시점에 처음으로 소설을 공개했습니다.
결과는... 폭망. 한 때 한 달에 100원 벌었습니다. 하루가 아니고 한 달에 100원.
그런데 말입니다.
이 소설을 내놓고 나니 또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아이디어가 샘솟았습니다. 49살 후반부가 된 지금은 쓰고 싶은 소설 시나리오만 50개 가까이 되고 완결한 소설이 15편입니다.
지금은 월 10만원 ~ 20만원 사이의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낸 신작이 폭망하면서(;;) 수익이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완결작을 읽어 주시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얼추 월 10만원은 벌고 있습니다.
제가 구상하는 50개의 시나리오를 다 쓴다면 월 50만원은 벌 수 있겠죠. 신작 없이 완결작만으로도 그 정도는 될 겁니다. 노후에 국민연금은 고갈되어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웹소설 수익은 조금이나마 들어올 겁니다.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상업적 시도도 했었고, 그 결과 19금 장르를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아직 미성년자인 제 딸들에게 아빠가 뭘 쓰는지 공개할 수는 없죠. 솔직히 성인이 된 다음에도 공개하기 민망합니다;;
다만, 오로지 상업적 시도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제 마음에 안 들더군요. 19금으로 도배하는 와중에도 저 자신의 생각과 사회적 판단 기준이 반영되긴 합니다. 그걸 싫어하시는 독자님들이 이탈하시더라도 그냥 밀어붙이게 되긴 합니다.
어느 정도는 상업적 요소를 고려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제가 원하는 소설'을 쓰는 것. 그게 저의 두 번째 취미입니다. 그렇게 5년 간 끌고 왔고, 가능하다면 앞으로 50년 간 (50년은 쪼큼 무리인 것 같고 대충 살아 있는 동안에만) 이어 나가고 싶은 취미이기도 합니다.
몇몇 작품이 잘 뜨면 좋겠지만 그냥 지금 수준으로만 가도 충분합니다. 소설 쓰는 동안에 제가 '돈을 안 쓴다'는 것도 무척 중요하거든요. 40대 후반 ~ 50대 후반 사이의 사람들이 흔히 즐기는 골프 / 테니스 / 술 등을 안 하고 남는 시간에 소설 쓴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돈을 아끼고 있거든요.
저는 욜로냐 파이어냐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남는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있으면 직장생활로 번 돈을 자동빵으로(!) 아끼게 됩니다. 의식주에 필요한 기본 생활비는 써야겠지만 그것 빼고 나머지는 다 저축 가능합니다.
저는 제 딸들도 욜로냐 파이어냐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3의 선택'으로 돈 안 드는 취미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취미가 직업이 된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거기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각자의 삶에서 평생 추구할 수 있는 작은 목표가 있고 실제로 그 목표를 향해 평생 노력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죠.
그래서 제 큰딸에게 '소설 쓰기'를 추천했습니다. 꽤 잘 쓰더군요. 저처럼 올드(Old)한 만연체 방식이 아니라 나름 1020 세대에 맞는 시크(Chic)한 문제로 빠르게 잘 씁니다.
언젠가는 제 큰딸이 웹소설 작가로 이름을 올릴 수도 있겠죠. 전업작가가 될지 / 취미로만 즐길지 모르겠지만 일단 100화 연재 분량은 작성하도록 격려해 줄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작품에서 신(神)의 지위를 갖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될 겁니다. 그 느낌을 알면 본격적으로 작가(作家)라 불릴 수 있겠죠.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안한 Hell조선. 하지만 결국 지옥 또한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고 각자의 꿈을 꿀 수 있는 곳입니다.
남들과 같은 꿈을 꿀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이 돈 펑펑 쓰면서 취미활동을 즐긴다고 해서 그걸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돈을 안 쓰는 것'이 취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돈 드는 취미에 몰려다닐 때 혼자서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러합니다. 제 딸이 저처럼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추천해 주려 합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직장에서 딴 짓 하며 잡설 풀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