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살에 대리 2년차. 40살이면 팀장이 되고 50살 즈음까지 임원이 되지 못하면 은근슬쩍 스리슬쩍 사라지는 업종의 회사에서 38살에 대리 2년차.
2013년 당시에 저는 불안했습니다. 조기진급을 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 밀려날 거라는 불안감이 상당히 강했습니다. 저보다 나이 어린 과장급, 한두살 많은 팀장급들을 보며 '나이 든 대리 2년차'라는 지위에 큰 불안감을 느꼈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조기진급을 위해 성과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M&A'라는 기회였습니다.
Merger & Acquisition. 영어 원문에으로는 '합병인수'인데 국내번역에서는 '인수합병'으로 뒤바뀐 기업활동.
M&A는 IMF 이후 대한민국에 들불처럼 번졌었고, 2013년에도 꽤 유행했었습니다. 특히 유선방송업계에서는 지속적으로 M&A가 일어나고 있었죠.
이전에 '웹소설 소재 모음집'에 따로 정리하긴 했었는데, 대한민국 유선방송업은
- 원양어선 선원이었던 분이 `90년대 초반 부산에서 처음 시작
-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조폭 나와바리 싸움과 연계됨
- 최종적으로 전국을 76개 권역(이후 세종시가 추가되면서 77개 권역)으로 나누어 권역별 독과점 인정
- 이후 대기업들이 유선방송업에 진출하면서 권역 여러 개를 인수합병한 MSO가 출현
하는 단계를 거쳤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글을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https://brunch.co.kr/@0a2c72370ba24fa/123
2013년 당시 CJ헬로비전은 이러한 MSO(멀티 시스템 오퍼레이터) 중 하나였고, 5개 MSO 중 가입자 및 권역 숫자 측면에서 가장 컸습니다. 즉, 유선방송업 중에서는 1위 사업자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의 CJ헬로비전은 "유선방송업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매우 야심찬 포부를 선보였습니다. 대외적으로 IPTV가 기존 유선방송업을 잠식해 들어오는 시기였는데, 이에 맞서기 위해 유선방송을 통합해야 한다는 전략을 내세운 거죠.
물론 단숨에 유선방송업 전체를 통합할 수는 없었습니다. 티브로드(태광 계열), HCN(현대백화점 계열), C&M(이후 딜라이브. MBK사모펀드 소속), CMB(유선방송 창업자 직속) 등 다른 MSO들은 다 입장이 달랐고 소속 그룹의 의견이 최우선이었습니다. 하나로 통합되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다들 했겠지만... 현실은 삼국지 게임이 아니니까요.
MSO들 간 대통합은 불가능했지만, 대신 헬로비전은 "일단 작은 SO들을 모조리 흡수통합하자!"는 전략을 발동했습니다. 2013년 초 기준으로 3500억원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걸 싹 쏟아부어 군소 SO들을 다 집어삼키고 '유선방송업자 중 압도적 1위를 달성한다'는 작전을 실행한 것입니다.
이 전략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전략 시행 과정에서 다른 문제는 없었는지, 그리고 이 전략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등은 다음 장에서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일단 2013년 당시의 헬로비전은 '군소SO 인수합병 작전'을 개시했고, 저는 법무팀 실무자로서 그 인수합병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M&A의 법무담당.
나름 할 일 많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미칠 듯이' 일이 많습니다.
일단 계약서 자체가 압도적으로 두껍습니다. 대륙법계 마인드에 익숙한 대한민국 법무담당자 입장에서 보면 '아니 C발 이게 말이야 방구야 대충 문제 생기면 법대로 하면 되지 뭐하러 같은 말 반복하냐?' 라는 생각이 자동빵으로 들 만큼 두껍습니다.
M&A계약(주로 주식매매계약)이 이렇게 두꺼운 건, IMF 직후 미국식 계약을 그대로 번역하여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불문법 계열이었던 영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가능한 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약에 반영한다'는 방식이라 계약서가 두꺼운 편인데, 한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계약이라면 더더욱 두껍겠죠. 처음 보면 환장합니다.
그리고 M&A에서는 기본 주식매매계약만 본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인수 대상 기업에 대해 실사를 진행해야 하죠. 회계실사가 핵심이긴 합니다만 법률실사 / 인사노무실사 또한 병행해야 합니다.
기본 계약서 검토, 인수 대상 기업 법률실사, 양 당사자 간 협의 배석. 이것만 해도 한 달은 기본으로 지나갑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쉬워지지만 처음 하면 주말근무 야간근무는 기본빵(!)이에요. 상당히 빡셉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습니다.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다 잘해야 했고 실수 없이 좋은 성과를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50페이지 넘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서 양 당사자 간 주장을 비교하여 요약 보고하고,
인수 대상 기업의 주요 사업과 계약내용과 M&A의 영향 등을 간추려 보고하고,
각종 문제 발생시 양 당사자 간 협의 진행까지. 할 일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CJ헬로비전은 그룹 내에서의 특수한 지위 때문에 M&A에 또 다른 제약사항이 있었습니다. 바로 '손자회사 지위'인데요.
대한민국 공정거래법은 예전부터 '재벌들의 문어발 확장'을 억제하려 했었습니다. 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이러한 취지는 계속 강화되었는데, 그 결과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증손자회사를 두려 할 때 '증손자회사의 지분 100%를 취득'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동일할 거예요.
즉, CJ그룹의 손자회사인 CJ헬로비전이 다른 유선방송회사를 인수하려면 '해당 유선방송사의 지분 100%를 인수'해야만 합니다. 99%도 안 되고 무조건 100%. 이게 안 되면 CJ그룹 지주회사가 과징금을 먹게 됩니다.
지역 유선방송사 오너가 지분 100%를 다 들고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런 경우가 드물죠. 대부분 소수주주가 있습니다. 그 소수주주들을 다 찾아다니면서 지분 100%를 인수해야 했습니다.
(뭐 나중에는 해당 대주주에게 '당신이 소수주주 지분 다 인수해 오면 더 비싸게 사 주겠다.'고 해서 상대방이 100% 인수를 완료해 오도록 했습니다만, 처음에는 헬로비전 쪽이 소수주주들을 만나고 다녔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업무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게 1건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헬로비전은 '군소 유선방송사를 모두 통합하여 압도적 1위가 되겠다!'라는 전략을 실행했고, 3500억원의 여유자금을 풀어 지역 유선방송사들을 매물로 사들였습니다. 자본잠식 상태의 부실한 SO도 몇백억을 줬고 건실한 SO는 1천억원 가까운 돈을 주며 사들였습니다.
2012년 말 ~ 2014년 초반까지 대략 1년 반 동안 헬로비전은 5개의 SO를 인수했습니다. 실무담당자 입장에서는 단기간에 5건의 M&A를 수행한 거죠.
뭐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나중에 가면 숙련도가 높아져서 그리 힘들진 않았습니다. M&A계약서가 아무리 두꺼워도 결국 자주 보면 익숙해지고, 법률실사도 자주 하다 보면 쟁점이 다 비슷해집니다. 결국은 '돈'인데, 내 돈 쓰는 게 아니고 회사 돈으로 처리하는 거니 비싸든 말든 아몰랑.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큰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조기진급에 성공한 거죠.
물론 저 혼자 잘해서 된 건 아닙니다. 당시 팀장님께서 크게 힘을 써 주셨고, M&A를 주도하셨던 경영지원실장님께서도 적극 지원해 주셨습니다. 단기간에 M&A 5건을 처리하고 또 모두 문제없이 마무리했던 공적을 저에게 몰빵해 주셨습니다.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39살에 과장(G5)으로 진급했습니다. 헬로비전 입사 1년4개월 만에 이직 전 직급으로 다시 올라섰습니다.
제가 한참 프로이직러(...)로 활동하던 시절, 이력서 자기소개 란의 첫 줄을 장식하는 문장이 완성되었습니다. [건설과 방송이라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업종에서 각각 2년 조기진급을 했습니다.] 라는 문장이 39살에 완성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기뻤습니다. 뭐, 기분 나쁠 건 없죠. 당연히 좋았습니다.
고시공부를 가장한 게임방 죽돌이 생활로 날려먹은 7년을 이제야 좀 만회하는구나 싶었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긴 한데...
회사생활이라는 게 몇몇 개인만 잘 되는 걸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뭐 직장생활 5년만 더 하면 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최소 15년 이상 더 다녀야 하는 회사에서 단기간의 성과만 얻고 끝나는 건 영 좋지 않겠죠.
저에게는 나름 큰 성과였던 5건의 M&A. 헬로비전의 여유자금 3500억원에 추가로 벌어들인 돈까지 더해 약 4000억원을 쏟아부었던 군소 유선방송사 인수 불꽃 쇼(Show).
이 쇼는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을까요? 당시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정말로 긍정적이고 좋은 일이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꽃 M&A의 부작용이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면 잘못된 전략이었고, 그 외에 다른 성장전략들도 영 좋지 않았었습니다.
M&A를 비롯한 성장전략들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챕터를 바꿔서 서술하겠습니다. 대외요인과 CJ내부요인을 각각 살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