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조아라'에서 '웹소설 쓰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대략 2022년 하반기에 등록했던 글이네요.
가끔은 다른 데에 올린 글을 퍼나르겠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작가 본인이 쓴 글을 여러 곳에 옮기는 건 표절이 아닙니다^^.>
1. 서론
제목도 뜬금없지만 그 전에 우선 잡설을 좀 풀고 시작하겠습니다.
이 글 ‘웹소설 쓰는 법’을 거의 3달 가량 안 썼었습니다. 원래 소설 쓰다 글이 잘 안 나갈 때 개인적인 생각들을 정리하는 게 주요 목적이었는데, 한동안 멈춰 있었네요.
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제 인생 자체로 보면 꽤 좋은 상황이었죠. ‘이직’을 했거든요.
현실 직장을 옮기는 건 좋은 건데, 웹소설 작가 활동에서는 상당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회사는 보안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일과시간 중에 딴짓하기 어렵거든요;;
결국 소설 재고분 쌓는 게 예전 1/3로 줄어버렸습니다... 토~일요일에 4편 정도 보완해도 1주에 6~7편이 한계더군요. 예전 직장에서는 낮에도 조금씩 써서 평일 5일만에 14편 채울 수 있었고 주말까지 하면 18편 가량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됩니다.
그렇게 소설 재고분 쌓는 것도 허덕이다 보니, ‘웹소설 쓰는 법’을 써 나갈 여력이 없었습니다. 나름 생각 정리해야 할 테마가 많아지는데도 계속 미루게 되었구요.
그래도 정리해 둘 건 정리해야 하겠죠. 언젠가 ‘전업 소설가’가 되려 한다면, 쓰고 싶은 소설 소재들은 챙겨 둬야 할 것 같구요.
그래서, 오늘 주제는 [유선방송업]으로 정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삼국지 가후’를 현대인으로 내세운 19금 기업물을 써 볼 생각인데, 거기에 들어갈 만한 소재로 써먹으려구요.
제 직장 생활 경험 중 일부를 차지하는 유선방송업. 이 업종은 한국에서 나름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고수익 사업이었는데, 그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유선방송협회 쪽 대관업무를 했던 사람들 / 방송통신위원회 실무자들 정도만 알고 있고, 그 숫자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차분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명기 / 태동기 / 성장기 및 전성기 / 쇠퇴기 정도로 나눠서 써 보죠.
2. 본론
(1) 여명기 : 유선방송업 탄생 이전 상황
유선방송. 흔히 케이블(Cable)이라고 합니다. 구리 통신선이나 광섬유 통신선을 유선으로 TV에 연결해 ‘깨끗한 방송 화면’을 송출해 주는 게 주된 사업이죠.
대한민국에 본격적인 유선방송업이 출현하는 것은 `90년대 초반부터입니다. 미국에서는 `60년대부터 유선방송업이 있었던 것 같은데,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업이 그리 활성화되지 않았었죠. 일단 대한민국 전체 TV보급률이 올라간 게 `70년대 중반부터였으니 그 전에는 유선방송업이 들어오기도 어려웠구요.
대신, 대한민국에는 ‘전송망사업자’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후 방통위에서 분류하기로는 NO(엔오. 네트워크 오퍼레이터. 전송망사업자)라고 부르게 되는데, 주로 지상파 방송 신호를 받아 재전송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50년대 후반부터 지상파 방송을 시작했지만, 워낙 산이 많고 중간기지국도 부족해서 지방 쪽은 고질적인 난시청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도 `90년대 초반까지 TV 틀면 늘 지직거렸던 것 같아요. 옥상에 대형 안테나 달아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구요.
이 난시청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상파 중간기지국을 많이 늘려야 하는데, (수신료 처묵처묵 하면서도) 지상파 방송사들이 기지국을 별로 안 만들었죠. 결국 대다수 국민들은 지직거리는 화면 보면서 살았습니다.
대도시 쪽은 그나마 지직거리는 정도로 그쳤는데, 지방 쪽은 정말 심각하게 난시청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상파 전파 자체가 건물 하나만 있어도 막히는 수준인데, 국토의 2/3가 산으로 되어 있는 나라에서 산골짜기에 TV 들여 놓으면 제대로 영상 나오기 어려웠겠죠.
NO(전송망사업자)는 이런 지방 난시청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구리선 끌어 와서 난시청 TV에 연결하면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으로 방송 시청할 수 있으니, 나름 고마운 사람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만, `80년대까지의 NO는 단순히 [지상파 재전송]에 그칠 뿐 그 이상의 사업으로 나아가진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TV틀면 200개 이상의 채널이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죠.
본격적인 유선방송업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 태동기 : 원양어선 선원의 대활약
소제목에 ‘원양어선 선원’이라고 썼습니다. 네, 진짜로 원양어선 선원 맞습니다.
유선방송업도 나름 ‘방송’인데 왜 ‘원양어선’이 나오는지 선뜻 이해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진짜로 원양어선과 연관됩니다. 대한민국의 유선방송은 한 원양어선 선원이 직업 바꾸면서 본격화된 것입니다.
(이 글은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므로 바로 실명 거론하겠습니다) ‘이인석’이라는 원양어선 선원이 있었습니다. `80년대 원양어선 선원이었으면 꽤 돈 많이 버는 직업이었고, 나름 해외 많이 다니면서 면세품도 사 오는 직업이었죠. 괜츈했습니다.
이 ‘이인석’이라는 분이 해외 항구 숙박시설에 묵을 때. 그는 TV를 틀어 보고 깜짝 놀랍니다. [세상에, 채널이 몇백개라니! 대한민국 TV는 끽 해봐야 채널 4개 나오는데, 이 나라 TV는 도대체 뭔 마법을 부리길래 채널이 이렇게 많은가! 게다가 영화도 겁나 많이 나오잖아!]
이인석 씨는 케이블 사업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게 기본적인 방송장비만 갖추면 꽤 쉬운 사업이라는 것도 알게 되죠. 방송신호를 송출하는 시설에 구리선만 연결하면 된다는 것, 초기에 구리선 통신망만 갖추면 그 다음에는 요금만 걷으면 그만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이인석 씨는 원양어선 선원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유선방송사업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대한민국에 ‘유선방송업’이 탄생한 거죠.
`90년대 초반에 유선방송 가입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극초반 시기의 유선방송업은 무슨 저작권 같은 거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청소년보호 이딴것도 없었구요. 밤에 유선방송 틀면 소위 ‘빨강비디오’가 밤새도록 상영되었었습니다.
이건 나름 사회적 충격이었습니다. 만성적으로 난시청에 시달리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잡티 하나 없는 영상이 뙇! 그것도 밤에 틀면 성인방송이 줄줄이 뽷!
대박났습니다. 너도나도 유선방송 가입했죠. 당시 월 요금이 2만원 가량 되어서 그리 싼 편이 아니었지만, 비디오 대여점에서 1편 빌리면 1000원~1500원 내던 시절이니 밤에 성인방송 20편만 보면 본전 메꾸고도 남았습니다. 유선방송 가입자가 폭증했습니다.
이인석 씨 본인이 선원 출신이었고 그 동료들도 선원 출신이었으므로, 초기의 유선방송업은 항구도시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울산/창원/목포 등 항구도시에서 가입자를 늘려 나가면서 점점 더 내륙으로 뻗어 나가는 형국이었죠.
그런데, 이 유선방송업이 엄청난 고수익 사업이라는 게 알려지자 [경쟁자]가 생깁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죠. 어디든 돈 되면 사람이 모이니까요.
(여기서 카더라 소문이 추가되는데) 유선방송업에 개입한 사람들이 ‘조직폭력배’였다고 합니다. 각 지역 조폭들이 돈냄새를 맡고 몰려들었고, 기존의 NO(전송망사업자)들과 연계하여 우후죽순처럼 유선방송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조폭들 간 나와바리 싸움도 끊이지 않았구요.
그렇다면, 이인석 씨를 비롯한 초기 원양어선 멤버들은 밀려났느냐? 전혀 아닙니다. 원양어선 선원 출신이면 나름 깡 좋고, 또 고등학교 동창들 중심으로 찾아보면 만만찮은 사람 꽤 모을 수 있거든요.
(카더라 소문에 의하면) 이인석 씨는 목포 출신 선원이었다고 합니다. `90년대 초 전국구 수준으로 발전했던 목포 조폭들이 이인석 씨를 지원했다고 하네요. 그 맹렬한 힘을 바탕으로 이인석 씨는 전국 유선방송사업 상당수를 장악했었습니다.
(이 또한 카더라 소문에 의하면) 이인석 씨는 자신과 함께 초기 사업을 진행했던 동료들에게 각 지역 유선방송업 대표 자리를 맡겼다고 합니다. 일종의 명의신탁을 한 거죠. 부산, 경남(마산창원), 전남, 전북 등이 그렇게 ‘동료 대표’들이었고, 이인석 씨 본인은 대전-광주 쪽 유선방송 대표만 맡습니다.
(이러한 명의신탁 구조가 깨지는 건 다음 챕터에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유선방송업이 이렇게 급성장하는 동안 정부는 뭐 했느냐? 그냥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했느냐?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부도 나름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무단으로 저작권 침해하면서 마구잡이로 영화 틀어대는 것부터 제재해야 했고, 유선방송사업자 간 힘겨루기에 대해서도 적절히 개입해야 했습니다. ‘방송법’으로 규율해야 했죠.
유선방송사업자는 방송법의 적용을 받으면서 정식 사업 체계로 편입됩니다. 기존 NO와 다른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시스템 오퍼레이터)가 탄생한 거죠.
과거 NO가 단순 재전송만 했던 것과 달리, 종합유선방송사업자들은 지상파 재전송 외에 다양한 방송들을 전송할 수 있고 / 지역방송채널에서는 자체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도 있습니다. 40개 ~ 100개 가량의 다양한 채널을 보유하고 온갖 방송을 다 내보낼 수 있죠.
그리고, 유선방송사업자들은 ‘허가받은 방송 권역’에서만 사업을 해야 합니다. (마치 삼국지 땅따먹기 하듯이) 전국을 77개 권역(처음에는 76개였다가 이후 세종시 생기면서 1개 추가되었다고 합니다)으로 나누어 놓고 각 권역별로 허가권을 내어 주는데, (카더라 소문에 의하면) 이 권역 제도가 바로 조폭들 힘겨루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종합유선방송사업(SO)이 정식으로 자리매김 하면서, 기존의 NO들은 SO 밑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지상파만 재전송하던 NO들이 이제는 SO와 계약을 체결하고 SO의 방송신호를 재전송하게 된 거죠.
이와 같이 SO 신호를 재전송하는 전송망사업자를 RO(알오. 리트랜스미션 오퍼레이터. 통진당 사건 때 혁명조직 RO와 다릅니다. 머릿글자만 같은 뿐 완전 다른 조직이에요)라고 합니다. RO와 SO 간 다툼이 공정위로 갈 때도 있지만 그건 뭐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유선방송 사업이 어엿한 산업으로 발돋움했습니다. 자체 지역방송을 제작하고 다양한 PP(프로그램 프로바이더. 낚시채널, 영화채널, 가요채널 등등 다양한 PP가 있습니다)들로부터 방송콘텐츠를 공급받으며 RO들을 통해 산간지방까지 깨끗한 방송을 보내 주는 산업. 나름 삐까뻔쩍한 산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선방송업은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한 거죠.
(3) 성장기와 전성기 : 대기업 자본 유입, 홈쇼핑수수료, 문제점
이 ‘성장기와 전성기’ 챕터는 3개로 나누어 서술하겠습니다. 앞 여명기-태동기보다 쓸 말이 많겠네요.
① 대기업 자본 유입 : MSO의 등장, 재벌들의 관심
항구도시에서 시작된 유선방송사업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 전국을 77개 권역으로 나눴고, 유선방송 가입한 가구가 1000만을 넘었습니다. 유선방송업은 ‘황금알을 낳는 알짜사업’으로 완전히 자리잡았죠.
유선방송의 영업이익률은 최대 40%에 달했다고 합니다. 회사 다니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건 엄청난 거죠. 해당 권역 내에서 사실상 독점이 보장되고, 구리선만 설치해서 TV에 연결해 주면 되니 거의 돈복사 수준으로 돈을 벌어들인 겁니다.
그리고, 초기 조폭들 간 나와바리 싸움이 끝나고 ‘권역’이 확정되자, 이 때부터는 새로운 싸움이 전개됩니다. [쩐의 전쟁]으로 넘어가죠.
케이블 선만 꽂으면 돈이 복사되는 마법의 신사업, 유선방송. 돈 잘 버는 사업에는 투자자가 몰립니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써서 사업자를 인수하는 분위기. 유선방송 사업에 대규모 ‘M&A 시장’이 형성됩니다.
각 권역별 SO들은 각자의 권역 사업권을 사고팔기 시작합니다. 영업이익률 30~40% 나오는 최신사업을 운영하며 매년 돈을 버느냐 / 아니면 한 방에 팔아치워 목돈 쥐고 나가느냐 하는 상황에서, 누구는 팔고 나가고 누구는 다른 SO를 인수해 덩치를 키우죠.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초기 유선방송사업자 간 M&A는 거의 ‘오야붕 들 간 협상’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법률실사 재무실사 따위는 아웃오브안중. 그냥 대표들끼리 만나서 ‘100억에 퉁칩시다.’라고 하면 계약성사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테이블에 칼 꽂아 놓고 계약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제가 실제로 본 건 아니고, 유선방송에 오래 몸 담은 사람들끼리 레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죠.
아무튼 이렇게 SO들 간 흡수합병이 일어나면서, 유선방송사업자는 덩치를 키워 갑니다. 여러 개의 권역을 보유한 대형 SO – ‘MSO(멀티 시스템 오퍼레이터)’가 탄생하는 겁니다.
거기에 더해, 기존 재벌들이 이 새로운 사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름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집단들이 MSO를 인수해 유선방송 시장으로 진출하려 하죠.
초기에는 GS나 롯데 등도 관심을 보였고 일부 SO 주식을 사들이기도 했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MSO의 최대주주가 되어 이를 본격적으로 경영한 사업자는 3~4개 정도로 압축됩니다.
CJ, 태광, 현대백화점그룹, MBK 사모펀드. 이들이 각각 CJ헬로비전 / 태광티브로드 / 현대HCN / C&M(이후 ‘딜라이브’) 이라는 MSO를 보유하게 되죠.
그리고 여기에 하나 추가할 얘기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이인석 회장이 각 지역 유선방송을 명의신탁 형식으로 동료들에게 맡겼고, 그 동료들이 각 지역별로 대표가 되었다’라는 얘기를 잠깐 했었죠? 그게 이때쯤 문제됩니다. 즉, [이인석 회장의 동료들이 자기 지분을 대기업에 팔았다]는 문제가 나오죠.
MSO 시장에 뛰어든 대기업집단들은 계속 SO를 인수하면서 덩치를 키워 갑니다. 그 과정에서, 이인석 회장의 동료들은 자신의 SO를 1개 권역 당 몇백억원으로 팔아넘깁니다. 전체 M&A 규모를 합산하면 2조 넘을 정도였습니다.
이인석 회장 측 주장대로 이게 ‘명의신탁’이었던 걸로 인정되었다면, 이인석 회장은 각 권역 매각대금만으로도 몇 조 규모의 자산을 일궜을 겁니다. 다만, 현실은 약간 달랐죠. 초기 사업 동료들 간에는 이게 명의신탁인지 / 공동투자인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거든요.
뭐, 이인석 회장이 무일푼으로 된 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대전-광주 지역에 MSO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MSO에서도 매년 몇백억 수익을 올렸어요. 조 단위 재산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몇천억 수준의 자산은 남았습니다.
이 이인석 회장 직속의 MSO가 ‘CMB’입니다. 대기업집단 소속 MSO가 덩치를 불려 가는 와중에도 유선방송 최초 창업자의 회사는 살아남은 거죠.
이리하여, 유선방송사업은 크게 5개의 MSO가 차지하게 됩니다. 소규모 SO들이 남아 있었지만 이들은 차례차례 MSO에 인수되었구요. 각 지역에 남아 있던 RO(재전송사업자)들도 MSO의 협력업체로 편입됩니다.
헬로비전, 티브로드, C&M, HCN, CMB. 5개의 MSO는 ‘유선방송협회’를 설립하고 공동으로 방통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원양어선선원-조폭 시대를 거쳐 이제 완전히 사업화된 거죠. 이게 대략 2000년대 초반 상황입니다.
다만, 여기서 서서히 문제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을 뛰어넘을 새로운 사업수단이 등장하는데, 그 사업수단이 오히려 역으로 기존 문제점을 악화시키기도 하죠.
그 얘기는 다음 연재로 돌리겠습니다. 이미 분량이 많아졌으니 중간에 한 번 끊고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