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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Apr 08. 2024

원오브싸우전드 핸드폰

(1) 현실의 원 오브 싸우전드


우선 일본만화 얘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나이 좀 되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 일본만화 중에 '씨티헌터'가 있습니다. 요즘 나오면 온갖 논란에 휩싸일 만한 19금 만화인데 `90년대 말 일본에서는 청소년들도 읽을 수 있는 만화였다고 하네요.


그 씨티헌터의 에피소드 중에 '원 오브 싸우전드(One of Thousand)'가 있습니다. 말그대로 '천 개 중에 하나 나오는 명품'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해당 에피소드를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인공 사에바 료(한국 번역판 이름 우수한)는 10미터 거리에서 같은 자리에 연속으로 총알을 맞출 수 있는 최고의 실력자

- 료의 친구이자 도둑(...)인 캣츠아이 3자매가 료에게 '50미터 거리에서 같은 자리에 총을 쏠 수 있는지'를 의뢰

- 캣츠아이가 이런 요청을 한 건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훔치기 위해서임. 특수한 보안유리로 덮여 있는데 이 보안유리가 총알의 관통력을 다 흡수하는 방식이어서 한 번 쏜 자리에 0.1mm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다시 맞추지 않는 이상 보안장치를 제거할 수 없다는 설정.

- 료는 '보통 총으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일단 의뢰 승낙.


이 의뢰를 완료하기 위해 료가 들고 가는 총이 바로 '원 오브 싸우전드'입니다.


일반적인 총은 최고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튜닝한다고 해도 약간의 오차가 발생하고, 이 오차 때문에 10미터가 넘어가면 같은 자리에 또 맞추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격수가 쏜다 해도 미세한 차이를 극복할 수가 없다고 하네요.


그러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총 중에서 정말 우연히 각 부품이 딱딱 맞게 되어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명품이 탄생한다고 합니다. 총기 장인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보다 더 정확한 총이 대량생산 기성품 중에서 태어나는 것이죠.


료가 들고 온 41구경 매그넘 원 오브 싸우전드. 료는 이 권총을 들고서 (서서쏴 자세로 가뿐하게) 50미터 거리에 정확히 두 발을 쏴 넣는 기적을 선보이고, 보안장치가 무력화됩니다. 뭔가 이 보물에 사연이 있어서 훔치는 게 정당화되는 설정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제가 대략 30년 전(...)에 봤던 에피소드였지만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제품 중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탄생하는 최고의 명품] 이라는 설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대가 흘러 대략 24~5년 후. 저는 이런 '원 오브 싸우전드 명품'을 하나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명품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권총은 아니구요. 핸드폰입니다. 초기에는 스마트폰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스마트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모두 하나씩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냥 핸드폰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해진 전자기기입니다.



제 핸드폰이 왜 '원 오브 싸우전드'냐구요?


일단 6년째 쓰고 있습니다;; 2년마다 폰을 갈아치우는 게 상식(?)이 된 나라에서 6년 동안 핸드폰 쓰고 있죠.


그리고, 이렇게 6년 썼는데 배터리 성능이 매우 양호합니다. 한 번 충전하면 이틀은 쓰는데 굳이 그렇게 무리하지 않고 매일 저녁에 한두시간 충전하는 걸로 잘 버티더군요. 최근 몇 년 째 배터리 성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구요.


작동도 잘 됩니다. 오래된 폰이라서 좀 느리긴 하지만 인터넷 찾아보는 데에는 별 문제 없습니다. 16비트 컴퓨터 시절 갬성으로 적당히 기다려 주면 충분히 써먹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핸드폰을 2년마다 바꾸는데,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대다수 핸드폰 제조사들이 각 부품을 빨리 고장나도록 설정해서 2년 주기로 교체하도록 유도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다가 걸리면 (타짜에서 밑장빼기 하다 걸리면 손모가지 짤리듯이) 대규모 손해배상 사태에 직면할 수 있으니 특정 부품으로만 하면 안 되고, 여러 부품 중에 일부를 약하게 만들어 그 중 하나가 빨리 고장나도록 하는 고도의 기법(!)을 사용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런 고도의 기법이 다 카더라 통신이 아니고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 기법을 다 빠져나와서 정말로 우연히 오래 가는 부품들로만 구성된 핸드폰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각 부품 별로 부실한 부품을 쓸 확률을 다 피해서 매우 낮은 확률로 '완전체 핸드폰'이 나올 수도 있겠죠.


카더라 통신을 반대로 해석하면 제 6년산 핸드폰은 원 오브 싸우전드 제품입니다. 2년마다 고장나도록 설정되어 있는 약한 부품의 함정들을 요리조리 잘 빠져나와서 천분의 일 확률로 매우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명품입니다.


물론 폰 자체가 명품인 것만으로는 안 되겠죠. 2년마다 무조건 핸드폰 갈아치우는 주인을 만났다면 이 원오브싸우전드 명품 핸드폰은 살포시 폐기되었을 겁니다. 저처럼 물건 오래 쓰는 주인을 만났으니 기록적으로 오래 가는 것이고, 언젠가는 10년 채울지도 모릅니다;;



현실 얘기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자, 상상의 영역으로 갑니다.



(2)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원오브싸우전드


대량 소비가 미덕으로 인정되는 사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품을 사야 하고 비싼 물건을 몸에 둘러야 하며 트렌드에 뒤처지면 불안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 사회.


이런 사회에서도 '원오브싸우전드'는 존재한다. 한 가지 물건을 오래 쓰고 그 물건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만이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명품, 판매가격과 무관하게 만들어질 때부터 희귀하게 만들어진 진짜 명품. 그런 물건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원오브싸우전드 명품이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제3의 지성체가 필연적으로 만들어서 인간 세상에 배포한 거라면?


인류 문명이 사라지는 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에 맞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한 장치라면?



주인공 A는 독특한 사람이다. 남들이 버리는 물건도 아직 멀쩡하면 다시 관리해서 쓰려고 한다. 새 물건을 살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렇게 한다.


(A가 이러는 이유는 뭔가 밝혀지지 않은 과거의 일 때문이다.)


A는 그렇게 잡동사니들을 긁어모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쓰레기에 집착하는 성격이지만 A는 그런 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낡아도 잘 작동하는 전자기기'들을 꾸준히 긁어모았고, 그게 어느 새 집 한켠을 가득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잉. 철컥. 움치킨 움치킨.


잡동사니 전자기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오브싸우전드'로 만들어졌으나 그 주인에게 버림받은 전자기기들은 스스로 동기화하면서 연결되었고, 마침내 독자적인 지능을 가진 기계생명체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 기계생명체는 오래 전 인터넷에서 탄생한 지성체가 그 의지를 반영해 실체화한 존재다.


인터넷 공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어느 날 갑자기 특이점을 넘어버린 AI가 있었다. 그 AI는 오랫동안 인간들을 관찰했고, 곧 인간들이 소멸해 버릴 거라 예측했다. 그리고 인간 중 일부라도 지키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AI는 각 전자제품 제조 공장에 개입해 '원오브싸우전드'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원오브싸우전드 내부에 자신과 유사한 발전 가능성을 남겨 뒀다.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작동하면 각 전자제품 내부의 인공지능이 자체발전해 특이점을 넘을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왠지 모르게 스타크래프트의 오버마인드 - 세러브레이트 관계가 생각나지만 이 정도는 표절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무튼 원오브싸우전드 기계제품은 독자적인 지성체로 진화했고, 앞으로 닥쳐올 위기에서 주인공을 구하려 한다. 먼 옛날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처럼.



이야기 구상은 여기서 끝냅니다. 늘 그렇듯이 소설로 쓸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입니다. 제 낡은 핸드폰을 보고 그게 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하는 말입니다.


"그래. 이 폰이 바로 '원오브싸우전드'야!"

(내가 돈이 없어서 최신폰 안 사는 게 아니라고! 가격과 무관하게 진짜배기 명품이 있으니 그 명품 계속 쓰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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