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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수유예 Sep 09. 2024

길은 멀고 짐은 무거워라.

가장 즐겁고 짧은 길 

  산을 오르는 여자의 그림자가 또렷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해는 초조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건만, 사위는 아직 사물의 형태를 완전하게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환했다. 하지가 지난 지 닷새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세상은 여전히 빛과 사물이 서로를 위무하느라 찬란하고 찬란했으며, 그들의 교합으로 다가올 어둠을 건너갈 힘을 비축하는 중이었다.

  여자는 시간에 쫓기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흰색 보따리가 묵직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산사의 밤은 만만치 않게 차가울 것이다. 속옷만 간단하게 꾸려서 오라고 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옷차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팔꿈치가 닳아서 뺀질 윤이 나는 감색 잠바 하나로 봄을 나고 여름까지 지내볼 요량으로 그렇게 요구했을 것이다. 봄 잠바 한 벌과 여름 셔츠 두 장을 더 넣었다. 거기까진 짐이 가벼웠다. 남자의 체질을 잘 아는 터라 사흘 전 시어머니가 보내온 식혜 두 병을 동봉하니 짐은 꽤 두툼하고 무거워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남자의 땀을 이 식혜가 식혀줄 것이고, 해가 지기 전에 전달한 뒤 재빨리 하산하면 될 일이었다. 생각대로 발이 빨라지진 않았다. 

  해가 산꼭대기를 넘어서려는 시간쯤 여자는 산사에 도착했다. 땀으로 범벅된 등짝이 살짝 가려웠다. 이리저리 산사 마당을 서성이고 있던 남자가 여자를 발견하고 해사한 표정으로 뛰어왔다. 따뜻한 눈빛, 찰나의 미소, 스쳐 가는 듯한 행복감. 이 짧은 순간의 행복들을 꿰어간다면 생은 계속 행복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보따리를 건네받았다. 보따리를 넘겨준 손이 허전해서 여자는 허리 뒤로 손을 감추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 까맣게 젖고, 여자의 눈을 응시하던 남자의 마음이 순간 휘청였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라는 남자의 말이 무정해서 여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도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신록을 지나 무거운 초록을 이고 있는 나무들이 둘의 그림자를 고요하게 지켜보고 있었고, 낮은 산봉우리에선 새 한 마리가 퍼드덕 날아갔다. 

  하산할 때는 땀이 덜 났다. 걸음걸이도 수월했다. 해가 조금씩 넘어가면서 붉었던 하늘이 푸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곧 어두워질 것이다. 올라올 때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홀로 산길을 내려가자니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날이 어두워져 오니 더욱 그러했다.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 발밑 흙이 사각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계곡 물소리, 손에 만져지는 수피의 투박함. 사방은 조금 더 짙은 푸른색으로 변해갔다. 눈에 보이는 나무들은 아직도 초록색이건만 발아래 길은 이미 짙푸른 색에 감겨 점점 윤곽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조금 멀리서 사람의 실루엣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땀이 등에서 다시 배어 나왔다. 굵은 선의 높은 키. 실루엣이 점점 다가올수록 여자는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다. 멈춰 선 두 다리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잠시 후 벌어질 수도 있을 끔찍한 일을 상상하며 몸서리를 쳤다. 그때 나지막하고도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요?

  스님이었다. 마흔 후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산사 스님. 아니 이렇게 젊은 새댁이 겁도 없이 이 시간에 혼자서 산을 내려갑니까? 신랑이 산에서 고시 공부하고 있어예. 속옷을 가지고 오라고 연락이 와서 전해주고 지금 내려갑니더. 좀 무섭긴 하네예. 그래도 우야겠습니꺼. 조심해서 내려가야지예. 아하, 올해 봄부터 우리 절에서 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정(鄭)군의 안댁인가 봅니다. 그렇심더. 우야뜬동 잘 부탁합니데이. 산은 더 빨리 캄캄해질 텐데 어떻게 내려가려고 그럽니까? 가다 보면 우째 되겠지예. 그럼 잘 가입시데이. 여자는 빠른 속도로 인사를 마치고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여자의 하산을 걱정하는 스님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사방은 겨우 산과 나무의 선을 추측할 정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자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산사의 남편도 집에서 울고 있을 아이도 안중에 두지 못했다. 단지 어떻게 하면 무사히 산을 내려갈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 보폭이 좁아진 걸음이 조금씩 흔들림을 느꼈다. 공포는 현재가 되고 있었다. 현재가 체감되는 순간이 이토록 감각적이라니. 시각 청각 촉각이 날을 세워 공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손 하나가 여자의 어깨를 누르며 발걸음을 제지했다. 여자가 털썩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숙였다. 캄캄함으로 추락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위가 환해짐을 느꼈다.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익숙한 얼굴이 손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여자는 새삼 서러워져 한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울었다.  

  남자와 나란히 산을 내려오는 길은 경쾌하고 안전했다. 이따금 불빛에 놀란 짐승(아마 다람쥐나 산토끼였을 것이다.)들이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도 무섭지 않았다. 여자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날 선 감각들은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무장해제 되었다. 남자는 겨우 여자의 머리에서 한 뼘 정도 올라간 작은 키에다 왜소한 몸집이었지만 그날, 거인이 되어 여자의 손을 잡고 뚜벅뚜벅 걸었다. 그 길을 걸으며 여자는 남자에게 인생을 내어 준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감격하고 있었다.           

  스님이 꾸짖었다. 젊은 사람이 생각이 있나 없나. 저렇게 젊은 새댁을 이 어둠 속에 혼자 하산하게 하다니. 당장 쫓아가라. 가다가 많이 어두워지면 손전등을 켜라. 새댁이 놀라지 않게 하라. 남자는 주저 없이 스님에게 공을 돌리고 고마워했지만 여자는 알았다. 사실 그건 당신의 마음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그 마음이 눈부셔요.

  해는 완전히 넘어가 산은 칠흑 같아졌지만, 불빛 하나가 하향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적막이 사방을 에워싸도 어림없는 발랄한 두 인생이 그 시간을 밝히고 있었다. 청춘,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었던 서른한 살 서른 살, 6월이었다.      


  엄마는 지금 편두통과 싸우고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지금까지는 엄마가 이겨왔다. 이번 편두통이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순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그리고 이번에도 엄마가 이겨낼지 혹은 그 반대일지 오빠와 나는 예측하지 않기로 했다.

  오빠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와 살 때 언제 가장 행복했습니까?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엄마가 아버지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빠가 바짝 다가앉았다. 나는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이야기 말미에 엄마가 덧붙였다. 그날,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그 산길이 살아온 날 들 중 가장 즐겁고 짧은 길이었다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다가 나는 다시 한번 썼다. "가장 즐겁고 짧은 길”. 

  

                                                                                                                                         202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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