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의 수줍고 빛났던청춘을내 청춘이 한참 지나고서야 제대로 듣게 되었다. 심지어 잘못 알고 있었다니 나의 무심함이 참으로 부끄럽다. 연애로 결혼했다는 것이 자식에게 비밀로 할 일이었나 우습기도 하지만 그땐 60년대였으니까.
이번 엄마 기일엔 큰딸과 둘만 친정에 내려갔다. 엄마 얼굴이 자꾸 희미해져 어릴 적 엄마랑 찍은 사진을 화장대에 올려놓았더니 그걸 본 딸이 이번에 내려가면 앨범 꼭 보고 와야지 한다. 도착하자마자 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던 제일
오래된 앨범을 꺼내왔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랜 앨범, 흑백사진들 속에 어리고 젊은 엄마 아빠가 있다.
교복을 입은 엄마와 아빠, 복고풍 정장 미니 스커트에 올림머리를 한 엄마, 각진 공군 모자에 제복을 입은 아빠가 옛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낯설다. 어릴 때 또 커서도 몇 번이나 봤을 터인데 볼 때마다 새롭다.
친정 아빠(왼쪽 아래)와 엄마
"외할머니 이 사진은 엄마랑 똑같애."
나는 속쌍꺼풀에 눈이 옆으로 길고 작다. 웃으면 초승달눈이 된다. 엄마의 눈을 꼭 닮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엄마의 지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엄마랑 똑 닮았다며 내 얼굴에서 엄마를 찾으며 엄마를 그리워했다.
"이건 할아버지 사진이야? 진짜 잘 생기셨다."
지금의 주름지고 동그란 얼굴과는 사뭇 다른 샤프한 얼굴 때문에 두 조카와 딸은 믿기 어렵다는 듯 감탄을 연발한다.
"할아버지공군 홍보책자 표지모델로사진찍고 그랬다." 오빠가 소파에 앉아있다가 한 마디 거든다. 지금은 보통 키에 속하지만 그 당시에는 175cm가 큰 키였다고.
"아빠, 엄마랑 어떻게 만났어요?"
사촌 누나의 소개로 만났다 정도만 알고 있어 자세히 듣고 싶었다.
"나중에 니한테만 얘기해 주께."
"왜요?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있어요?
큰고모가 소개해줘서 만났다 캤는데?"
방으로 들어가시려다20살이 훌쩍 넘은 손자 손녀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식탁 의자에 다시 앉으신다.교생선생님께 첫사랑 얘기해 달라고 조르는 학생들처럼 우리는 아빠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창피해서 그냥 큰고모가 소개시켜줬다 캤지.
그때 내가 서울 공군본부에 있었다. 한강에 노래자랑인가 무슨 공연이 있었거든. 그날 친구들 대여섯이서 한강에 나간 거라. 그때 니 엄마 만났지."
61년, 그때는 한강변이 넓은 모래사장이었단다. 가끔 공연이 열렸고 사병인 아빠와 아빠 친구들은 주말을 이용해 우르르 한강으로 몰려나왔다.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었을 터.
하얀 세라복을 입은 여고생들에게 말을 건넸다.
"같이 얘기 좀 나누실래요?"
으흐흐. 이건 수작인데.
친정 아빠는 경주 보문단지에서도 경운기를 타고 30~40분을 들어가야 하는 깡촌 출신이다.6.25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는 역사책에나 나오는 이야기를 줄줄 해주셨다. 그 마을에서 여고생은 1~2명 정도였고 다들 해진 무명옷을 입고 다녔던 때라 교복입은 여고생은 다 예뻐 보였다고. 허나 연애는 언감생심. 최씨 마을 양반동네에서 연애는 말도 안될 일이었다.(아빠가 서울여자랑 연애로 결혼하겠다 할 때 동네어른들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어느 잡지에 실린 61년 거리풍경 사진
그런 아빠가 공군 사병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 사촌 누나 집으로 올라왔다. 당시에는 공군이 인기가 좋았나 보다. 3,4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시험에 합격해 공군본부에 복무하게 된 것이다. 하얀 얼굴에 훤칠하니 공군 제복까지 입어 서울 양반 같아 보였지만 시골 출신 순진한 아빠가 말을 걸었을 리는 만무하다. 중대 1학년을 다니다 온 동갑내기 걸걸한 친구가 여고생 대여섯에게 수작을 건 것이지.
"어머, 그럼 할머니가 고등학생 때요?"
"헌팅이다. 헌팅."
애들이 더 난리다.얘들아~뭘 상상하니?
고딩엄빠 그런 거 아니다.연애해서 결혼한 걸 비밀인 듯 말씀하시니 그러잖아요 .
엄마 아빠는 한 살 차이였고 엄마는 26살에 결혼하셨다. 아빠는 갓 스무살, 엄마는 고3이었으면 그럼6년을넘게 연애를 하셨네.
이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도대체 나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뭔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걸로 생각했었나? 내가 서른이 넘어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그런 것도 몰랐다.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명자 씨와 친구들은 건장한 청년들의 대시에 잠시 당황했지만 신분도 확실해 보였고 무엇보다 멋진 제복에 끌렸으리라.
어떻게 둘이 눈이 맞았나 궁금해했더니 엄마가 먼저 말을 걸었다고 하신다. 엄마가 안 계시니 아빠 말을 믿을 수밖에.
하얀 세라복에 잘 웃고 웃으면 눈이 초승달이 되는 서울말 쓰는 여고생. 경상도 시골 청년이 반하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 같다.
그날부터 엄마 아빠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삼각지의유명한 빵집에서 곰보빵이라 불리던 소보로빵을 먹으면서 일요일마다 데이트를 했다.둘은 부끄러워 친구 커플이랑 넷이서.곰보빵도 비쌌기에때로는 친구에게 빵값을 빌려 나가기도 했다.매번 같은 공군 제복을 입고 항상삼각지 빵집에서. 날이 좋으면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한강변을 끝도없이걷기도 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