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어 세 번째 여행이다. 남편에게 조금 미안하다. 울 집 대학생과 중학생은 주말에도 바쁘니 아빠랑 놀아줄 리 없고.
혼자 두고 나가면 더 좋아하려나?
미안하니 마지못해 가는 척해야겠다.
"아 진짜~ 무슨 독립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주말마다 너무 피곤하다. 왜 얘들은 다 가을에 여행을 잡아가지고. 안 간다고 회비를 돌려주는
것도 아니니 안 갈 수도 없고."
뭐라 그러지도 않는데 혼자 찔려서 말이 길어진다.
"그러게? 주부이기를 포기한 거지?"
말은 그렇게 해도 웃는 걸 보니 통과. 다행인 것은 천성이 부지런한 데다 몇 년 사이 요리 솜씨가 늘어 집 나설 때 밥걱정은 안 해도 된다. 요건 좀 자랑할 만하다. 하기야 요리 좀 못 한다한들 어떠랴. 밀키트만으로도 근사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급하면 우리의 배민, 쿠팡잇츠도 있고. 우리 엄마 세대땐 꿈도 못 꿨던 살기 좋은 세상이다.
아이들 어릴 때는 잘 떠나지 못했다. 둘째를 늦게 낳은지라 남들보다 양육 기간이 길었다. 아주 가끔 친구들과 1박 여행이라도 할라치면
"여보, 짜장면 시켜 먹어도 돼."
"엄마, 아빠가 나보고 뭐라 그래."
"엄마, 보고 싶어. 언제 와?"
번갈아가며 걸려오는 전화에 친구들과의 대화가 끊기기 일쑤였다. 으이그 안 간다 안 가!
이젠 맘 편히 떠나도 된다. 아이들은 다 컸고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 친구 아이들은 대부분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한 아이들도 있다. 나는 아직 중학생 딸이 있지만 중학생이 되면 아이들은 '엄마 좀 나갔다 올게.'라는 말을 제일 좋아하니 걱정 안 해도 된다.며칠 여행은 쿨하게 다녀올 수 있다.
그래도 자주 나가면 혼자 남겨진 남편이 신경 쓰이는 건 사실. 갱년기 남자는 잘 삐진다. 조심해야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주제넘게 조언을 하자면 여행을 공식화하라는 것이다. 말만 거창하지그냥 친한 친구 모임이나 함께 할 사람들과의 모임을 공식적으로 만들라는 것이다.모임명도 만들고 회비도 내고 규칙도 만든다. 여행 갈 횟수를 정하고 언제 갈지 대략적인 월도 정해 둔다. 나의 경우 계획적인 꼼수는 아니었지만, 남편에게 내세우기 좋은 명분이 되었다. 갈 때마다 시시콜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나 이때 이때 갈 거다. 알고 있으시오.'
혼자 남겨두고 여행 가는 걸 못마땅해하던, 대학친구 남편도 공식화된 여행에 더 이상 딴지를 걸지 않는다. 이제는 친절하게 마중까지 나온다. 다만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니 안 통할 수도 있음에 유의하시길.
설렘은 목적지가 아닌,
우리가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 자체에서 비롯된다.
- 알랑 드 보통 <여행의 기술> -
서울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은 늘 설렌다.
책임과 의무를 던져버리고 훌훌 집 떠나는 즐거움. 시인 정지용도 여행을 '이가락(移家樂)'이라 하지 않았나?
권태로움이 나를 지배하기 전에 떠나라. 열심히 일한 자나 열심히 일하지 않은 자나 누구든지.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풍경처럼 펼쳐지는 이 시를 좋아하지만 속세를 떠난 유유자적의 나그네를 바라는 건 아니다.
어디든 자주 떠났다가 돌아오고 싶을 뿐. 낯선 곳이면 충분하다. 그 길의 끝에 그리운 친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요즘 나의 여행은 주로 이런 형태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과 1년에 한두 번 여행지에서 만나는 것. 그런 모임이 서너 개 있다.
이번 여행은 대전, 컨셉은 호캉스. 얼마 전 친정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낸 모임의 리더 친구는 죽으면 아무 소용없다며 숙소를 100만 원 훌쩍 넘는 펜트하우스로 잡았다. 후덜덜했지만 8명 회원의 숙소라 생각하면 갈만하다 싶어 모두들 오케이를 외쳤다.
"룸 안에 수영장도 있어. 이용료 추가하면 미리 물 받아 준다니까 수영복 필참이다." 토요일 오후에 만나 점심을 먹고 계족산 맨발 걷기를 하고 펜트하우스로 간다. 나는 토요일 하루 종일 일정이 있어 저녁 늦게 호텔에 도착했다. 처음 가보는 펜트하우스의 기대에 잔뜩 부풀어 마음이 급했다. 2002호 '띵똥' 벨을 눌렀다.
바로크 양식의 우아한 식탁, 천장에 달린 유럽풍 샹들리에가 눈부시다. 왼쪽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수영장 존이다. 근데 이 냄새는?수영장 냄새가 아니다. 대중목욕탕 냄새다. 따뜻한 수증기가 만들어낸 희뿌연 연기 속에 어푸어푸 헤엄치는 아낙네들. 수경을 끼고 수영복을 입었으되영락없이목욕탕 온 아낙네들모습이로세. 맞아. 여기는 유성이잖아. 그 유명한 유성온천!
안개를 헤치고 나온 그녀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먹었다. 배달시켰다길래 내심 기대해 본다. 도착한 것은 BHC 치킨 2마리 , 점심 먹으며 나를 위해 포장해 온 파스타, 그리고 컵라면. 으흐흐 얘들아~ 여기 펜트하우스 맞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깔깔거리며 컵라면을 먹는다.
펜트하우스의 기대감은 여지없이 무너졌지만 1년 만에 만난 어릴 적 친구들과의 정담은 역시나 따뜻했다.편의점 알바를 하는 친구는 피곤했는지 일찍 잠자리에 들어 고롱고롱 코를 곤다. 그 옆에 우리는 둘, 셋 모여 앉아 부모님 이야기, 남편 이야기를 나눈다.
전화로 방해하는 아이들은 이제 없다. 아장아장 걷던 아기도, 하루에 열두 번 엄마를 부르던 초등학생도, 사춘기 아이들 때문에 눈물짓던 엄마도 없다. 든든하게 잘 키워냈다.(나는 아직 덜 키웠군) 아이들 이야기는 전보다 줄었고 우리들 이야기는 늘었다. 제대로 여행을 즐길 때가 온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호텔 근처 골목길을 산책했다. 온천 도시답게 공원 길에는 발 담글 수 있는 곳도 있다. 우리는 단풍 든 나무 옆에서 사진을 찍고 대전의 명소 성심당에 들러 가족들에게 줄 빵을 사고 커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