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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아 Nov 15. 2024

갱년기의 사랑법

T남편이 운다.

띠.띠.띠.띠.띡. 띠리링.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남편 왔다."

"누가 왔다고?"



누구나 진한 연애스토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듯이 우리도 눈물 한 바가지 쏟을 뻔하다 만 연애사를 가지고 있다. 먼 옛날, 동성동본이 해제되기 몇 년 전이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덕선이 언니 성보라와 성선우처럼 우리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동성동본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친정아버지가 장로님이시라 불신자와의 결혼은 생각할 수 없었고, 결정적 이유는  남자가 백수였다는 것이다. 동성동본, 불신자, 백수. 결혼하지 못할 필요충분조건을 충분히 갖춘 그런 남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사랑에 눈이 멀어도 한참 먼 세상 순진한 여자였다.


여자의 백수 남친은 5급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고시원에 들어갔다. 연애 중인데 공부는 제대로 했을려나?몇달 지나지 않아 동성동본 결혼을 한시적으로 허용한다는 기사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입사 원서를 냈고 서울 모 기업에 취직을 했다.

양반 운운하시며 동성동본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던 아버지는 인사하러 온 싹싹한 남편에 홀라당 반해 싱겁게 결혼을 허하셨고, 그해 12월 혼인신고, 다음 해 결혼식을 올렸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갈등은 없었으니 대가문 집 자손이 아닌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던 서로 죽고 못 산다며 결혼한 남자와 지지고 볶으며 20년 넘게 잘 살고 있다. 이혼한 적은 결코 없다.

"으이그, 전남편 아니고 전남친!"


*'전남친'이란 : 결혼 후 일과 육아에 지친 피곤한 모습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후덕한 아저씨로 변해 버린 남편, 결혼  준수하고 멋진 청년이었던 남편을 전남친이라 부른다.


분명 설명해 줬건만. 그걸 제대로 못 써먹네. 저녁 차리다 말고 아이들과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런데 현남편이자 전남친이 요즘 이상하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피고 또 지는 꽃잎처럼...."

밤 11시 조용히 잘 준비를 하는 시간.거실에서 70,80 노래가 메들리로 흘러나온다. 술 한 잔 걸치고 들어와 분위기 쫙 깔고 소파에 앉아 유튜브 음악 감상 중이시다. 시끄럽다. 기다려줬더니 1시간째 저러고 있다.

'저 인간이...'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얼굴에 팩을 붙이다가 한 마디 하려고 거실로 나갔더니, 아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지 않은가?


 술주정이 의심되기도 했지 최근 들어 드라마를 보면서 눈이 벌게지는 것을 종종 본지라 갱년기 증상으로 진단을 내렸다. 평소 나는 F라 드라마를 보며 자주 펑펑 울지만 T인 남편은 그런 나를 신기하게 보는 편이었으니까.


*남자들의 갱년기는 여성의 갱년기와 달리 서서히 오며 에너지 저하, 근육량 감소 및 체중 증가, 감정 변화와 우울감, 성욕저하, 수면장애, 집중력저하와 기억력감퇴, 골밀도감소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네이버 참고)


그래 그거, 감정 변화와 우울감. 해당 사항이

많지는 않은 거 보니 중증은 아닌 듯하다.

'자기 요즘 힘든가 보네.'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 속은 왜 부글거리나?

'잘 밤에 왜 청승을 떨고 그래?'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꾹 쑤셔 넣었다.

소크라테스 부인처럼 나도 악처인가?


아니,

나도 갱년기거든?




벚꽃이 눈꽃처럼 휘날리고 파릇파릇 온 세상이 연둣빛이던 어느 봄날,  산부인과에 갔다.

"난소가 기능을 다한 것 같네요. 특별한 증상은 없으세요?"

"네, 목디스크랑 어깨 석회 때문에 아픈 거 말고 특별히 힘든 건 없어요."

"무던히 잘 넘어가시네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로 옆으로 늘어서있는 가로수 잎들은 어찌나 싱그럽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갱년기 증상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손이 뻣뻣해서 흔들흔들 잼잼 손가락 운동을 해야 했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던 나는 에어컨 없이 살 수가 없었다. 밤이고 낮이고 리모컨을 끼고 살았고 원래 더위를 많이 던 남편은 반대로 에어컨 바람을 피해다녔다. 밤새 켜대는 에어컨 때문에 덜덜 떨던 남편은 결국 이불을 들고 거실로 나가 잠을 자야 했다.



호르몬 너 뭐야?

나는 나날이 씩씩해지고 목소리도 더 커진다. 남편은 센티해지고 눈물이 많아졌다. 갱년기 증상은 있지만 3월부터 시작한 수영과 라인댄스 덕분에  나는 이전보다 훨씬 활력있어졌다.

남편도 등 떠밀어 수영 기초반에 등록시켰다.가기 싫다더니 초등학생 마냥 새 수영복과 새 수영모를 쓰고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음파음파 숨쉬기만 했다길래 

"너무 지겹지 않아? 키판 잡고 발차기라도 해야지." 했더니 재미있다며 열심히 음파음파를 외친다.



가을이 무르익어 간다.

푸르디푸른 진초록의 여름을 지나

단풍으로 황홀하게 물들어가는 시간.

나무들이 옷을 갈아 입듯, 

우리도 새로운 색깔의 옷을 준비해야 하나보다. 



우리가 할 일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가 주는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중년의 나를 위한 심리학, 바바라셰르 -



그 옛날 죽고 못살던 연애 시절을 기억하며,

남편의 눈물을 사랑할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씩씩해져가는 아내의 K 기상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야, 근데 술 마시고  울지는 마.

술주정 같애.




*모든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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