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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미 Sep 05. 2024

고등어는 좋지만 가시는 싫다.

  그래. 그만하자.

규진 언니와 마지막으로 나눈 카톡이다. 마지막 말은 내가 남겼고, 그 앞에 일이라는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규진 언니는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한 명이다. 내 말에 공감도 잘해주고 말도 유머러스하게 하는 편이어서 그녀와 대화는 재미있고 유쾌하다. 게다가 하얀 피부에 큰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눈에 띄게 화려한 데다 말랐지만 볼륨 있는 스타일로 요즘 말로 베이글녀 같은 느낌이다. 주변에서 예쁘다는 칭찬도 자주 받고, 몸매가 예뻐서 부럽다는 말도 잘 듣는 편이다. 그렇다고 성격이 내숭을 떨거나 새침한 타입도 아니어서 여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고 그녀와 친해지길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주변에서 규진 언니를 맞춰주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그녀의 말에 호응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은근히 깎아내리는 습관이 있다. 너무 티 나게 깎는 건 아니어서 뭐라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기도 그렇다. 그녀와 대화할 때면 자신의 힘든 점과 불합리한 얘기는 많이 하는데 너는 어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좀 내 얘기를 할라치면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받아치는 거다. 그럴 때마다 규진 언니에 대한 언짢은 기분이 조금씩 쌓이고 그녀와 대화할 때면 그녀가 또 날 깎아내리는 표현을 하지 않을까 괜히 조심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관심 없는 그녀의 아이돌 덕후 얘기를 들을 때면 호응은 해주고 싶은데 가끔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번에 타니 싱글앨범 나온 것 알아? 이미 나온 지 2주나 됐는데 몰랐잖아. 이번 앨범은 꼭 사야 돼. 노래 들어봤어? 정말 좋지 않아?”

  “아, 이번에 앨범 또 나왔어?”

  “야, 또라니 무슨 말이야. 일 년 만에 나온 건데 한참 만에 낸 거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 일 년 만에 나온 게 자주가 아닌가? 내가 아이돌에 관심 없어서 그런가.”

  “하긴 너는 먹는 것만 관심 있지. 내 주변에 타니 관심 없는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아. 마음의 양식인 문화생활도 좀 하고 노래도 들어. 타니 노래 얼마나 좋은데.”

  “그래, 내가 너무 문화생활을 안 하긴 하지. 이번 앨범 어떤 노래가 좋은지 나중에 알려줘.”

  “이번에 타니 굿즈샵이 성수에 팝업샵으로 오픈한대. 성수 카페 구경도 갈 겸 같이 안 갈래?”

  “그래, 요새 성수 핫하다는데 아이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겠다.”

  “거봐, 너처럼 먹는 거 좋아하는 애가 성수 좋아할 줄 알았어. 다 너 좋아할 것 같아서 내가 같이 가자고 한 거잖아.”

슬슬 기분이 꼬이기 시작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왠지 썩어가는 기분이다. 여기다 대고 언니가 가고 싶어서 가자고 해놓고 뭘 또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가자고 한 거냐고 말했다간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지 넌 말을 뭐 그렇게 하냐고 핀잔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2시 성수역 2번 출구 앞에서 규진 언니를 기다린다. 자전거를 타며 지나가는 사람들, 손잡고 웃으면 걷는 연인들, 삼삼오오 줄지어 러닝을 하는 크루들, 젊은 부부와 손잡고 걷는 아이들, 까르르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들고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 규진 언니를 기다리며 내 앞으론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지나간다. 규진 언니와 2시에 보기로 했는데 벌써 30분이 지나간다.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지하철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규진 언니가 웃으면 달려온다. 5월의 햇살에 환하게 웃는 언니는 더 빛났다. 예쁜 언니를 보니 이유도 없이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아, 나 집에서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엄마가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택배 좀 부쳐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거기 들렀다 오느라 늦었어. 미안. 나 원래 안 늦는 거 알지? 아, 엄마는 꼭 나갈 때 꼭 뭘 시키더라.”

  “그럼 미리 카톡으로 좀 늦게 만나자고 하지 그랬어? 내 앞으로 천 명은 지나간 것 같아.”

  “뭘 또 천 명씩이나. 아 난 빨리 부치고 오면 대략 시간에 맞출 줄 알았거든. 하필 지하철도 계속 눈앞에서 놓치고 오늘 일진이 별로네.”

  “배고프다. 먼저 뭐라도 먹자. 여기 카페도 많고 맛집도 많다며.”

  “우리 먹쟁이가 배고팠구나. 야 그러지 말고 역에서 굿즈샵이 바로 앞이니까 거기 먼저 들르자. 그리고 마음 편하게 먹는 게 더 좋지 않아?”

언니는 평소보다 더 상냥하게 웃으며 팔짱을 끼고 굿즈샵으로 이끌었다. 굿즈샵엔 타니에 관한 다양한 아이템들이 알록달록 눈길을 끌고 있었다. 타니 멤버가 그려진 텀블러, 키링, 메모지, 다이어리, 우산 등 우리 일상에 필요한 모든 물건에 타니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언니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다 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으로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타니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언니가 신기하기만 했다.

  “언니는 타니가 뭐가 그렇게 좋아?”

  “네가 떡볶이 좋아하듯이 나는 타니가 좋은 거야. 넌 떡볶이 좋아하는 이유 있어?”

  “내가 아무리 떡볶이 좋아해도 찾아다니면서 먹는 거 봤어?”

  “하긴 넌 질보단 양이 더 중요하지? 너무 먹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나처럼 문화생활을 해봐. 일상에 활력이 생기고 즐거워. 거의 다 샀어. 내가 맛있는 곳 알아둔 데 있으니까 거기 가자.”

  “어딘데?”

  “따라와 봐. 네가 분명히 좋아할 곳이니까.”

언니는 굿즈를 한가득 안고 구김살 하나 없는 표정으로 신나서 얘기했다. 언니가 가자고 해서 따라간 곳은 쿠키와 빵을 같이 파는 카페였다. 나는 사실 밥이 먹고 싶었는데 빵을 먹으러 오니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언니가 여기 엄청 맛집이라고 옆에서 신나서 말하니 밥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그렇고 빵들을 보니 빵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맛나 보이는 빵과 커피를 주문하고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유, 피곤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많은 인파 속에 있다 와서 그런지 많이 지친 것 같다.

  “야, 여기 진짜 맛있어 보이지? 원래는 들어오려면 대기 2시간을 타야 하는데 인스타그램 게릴라 이벤트가 떠서 그거 내가 힘들게 지원해서 온 거야. 여기 오고 싶어도 대기 엄청 기다려야 하는데 내 덕에 바로 들어온 줄 알아.”

그렇지. 생색을 내야 언니지 싶었다.

  “그래, 고맙네. 덕분에 핫한 데도 와보고.”

  “지난주에 기획팀 김팀한테 당했잖아.”

  “그 싸가지 김팀이랑 무슨 일 있었어?”

  “지난주 금요일에 출근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안에 김팀이 딱 서 있는 거야. 그래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는데, 규진 씨 샴푸 향기 맡으니 아침이 상쾌하네. 하면서 씩 웃는 거야. 미소 짓는 그 입을 찢어버리고 싶더라니까.”

  “김팀답다. 그 새끼 원래 느끼한 멘트 잘 날리잖아. 언니도 한마디 하지 그랬어?”

  “난 너처럼 대놓고 싫은 소리 잘 못하잖아. 그냥 썩소 날리고 무시했어. 나도 너한테 좀 배워야 하는데.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좋아진 거야. 예전엔 성추행당해도 내가 피했는데 이젠 그런 일 당하면 바로 째려보면서 눈으로 욕하잖아.”

  “째려보는 게 무슨 복수야. 말로 해야지 말로.”

  “그러게. 내가 너처럼 겁대가리가 없어야 하는데 겁이 너무 많아.”

  “하긴 언니는 쫄보지.”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야, 뭘 또 쫄보야? 말을 참 기분 좋게 하네.”

언니는 살짝 언짢음과 동시에 내 말이 거슬린다는 표현을 돌려서 얘기했다.

  “언니가 나한테 겁대가리가 없다고 한 건 칭찬이고?”

나도 한마디 했다가 그걸 놓치지 않고 지적하는 언니가 얄미워서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네가 말로 하라고 한 게 겁대가리가 없는 거지. 그게 뭐 틀린 말이야?”

말속에 가시가 돋아서 언니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대화로 즐거운 토요일 오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가 겁대가리 나간 년이야.”

  “넌 꼭 스스로 비하하는 말을 잘하더라.”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목구멍에서 삼켰다. 말꼬리를 잡고 따지기 시작하면 결국 안 좋게 끝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참, 우리 이거 먹고 오늘은 좀 일찍 헤어지자. 나 오후에 집안 행사가 있는데 그걸 오늘 알았지 뭐야. 담에 또 성수에 오자. 여기 맛집도 엄청 많고 카페도 엄청 많거든.”

  “그래, 나도 내일 약속 있어서 오늘은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네.”

  “오랜만에 약속 생겼나 보네. 누구야? 남자?”

  “아냐, 친구. 고등학교 동창.”

  “좀 영양가 있는 사람을 만나. 맨날 만나는 친구만 만나지 말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오늘은 이만 가자.”

그렇게 언니와 5시에 성수역 앞에서 헤어졌다.


 언니를 보내고 바로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나 혼자 성수역 주변을 배회했다. 한 블록마다 예쁜 카페들이 있고 카페를 지나면 또 줄을 길게 선 허름한 밥집들이 보인다.

다들 둘 이상씩 짝지어 있거나 무리를 지어서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혼자 걸어 다니려니 괜히 어색하고 나만 우울하게 느껴졌다. 결국 발길을 돌려서 성수역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규진 언니로부터 카톡이 왔다.

  ‘잘 들어갔어? 난 집으로 오면서 지하철에서 이상한 변태 봤잖아.’

  ‘변태? 무슨?’

  ‘지하철에 사람 많은데 내 뒤에 꼭 붙어서 내 핸드폰을 슬쩍슬쩍 보는 거야.’

  ‘헐. 진짜 변태네. 눈으로 한 번 욕해주지 그랬어?’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옆 칸으로 옮겼어.’

  ‘그래 잘했어. 집에 잘 갔지?’

  ‘응. 집이지 벌써. 너도 조심히 들어가.’

 오늘 언니를 만나서 즐거웠지만 한 편으로 찜찜하고 기분이 묘했다. 어려서 엄마 따라 박물관에 갔다가 나는 지겨운데 엄마가 옆에서 계속 재밌지? 물어보는 바람에 재밌다고 답해버린 기분이랄까. 언니와 대화하면 묘하게 내가 을이 되는 기분이다. 이상하다. 남녀 사이도 아닌데 마치 내가 을의 이성이 된 듯한 묘한 기분이다.

 규진 언니와 나는 팀이 다르기에 한동안 각자의 생활로 연락이 없었다.

일주일 만에 규진 언니로부터 사내 톡이 왔다.

  ‘나 이번 주에 다시 성수 가려고. 지난번에 사 온 굿즈 중에 맘에 드는 게 있는데 그거 몇 개 더 사두려고.’

  ‘아니 뭘 하나 샀으면 됐지 굳이 먼 성수까지 또 가? 열정이 대단하네. “

  ‘타니는 내 삶의 활력이잖아.’

  ‘언니의 그 열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난 그렇게 뭐에 빠져본 적이 없어서.’

  ‘타니 굿즈를 주기적으로 사지 않으면 불안해. 나도 좀 적당히 해야 하는데 큰일이야.’

  ‘뭐든 열정이 있다는 건 좋은 거지 뭐. 파이팅!’

  ‘너 이번 타니 노래 들어봤어? 아직도 안 들었지?’

  ‘아, 차차 들어볼게. 참 이번에 직원 식당 업체 바뀌고 엄청 맛있지? 요새 너무 입맛이 좋아져서 큰일이야. 이러다가 앞자리 바뀔 거 같아.’

  ‘넌 먹을 것만 미친 듯이 달려들지 말고 타니 노래 들어봐. 안 먹어도 배불러.’

  ‘사생팬이 따로 없네.’

  ‘사생팬? 욕하는 거야?’

  ‘나보곤 미친 듯이 먹지 말라고 하고선.’

  ‘네가 입맛이 너무 좋아져서 미친 듯이 먹는다며.’

나는 순간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한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톡 창 스크롤을 올려보니 아니었다.

  ‘언니가 그렇게 말했거든.’

  ‘피곤하게 따지고 드네. 그만하자.’

  ‘그래. 그만하자.’

 규진 언니는 예쁘고 웃기고 재밌는데 꼭 둘이 같이 대화하면 밥을 잘 먹다가도 성미 급하게 삼켜버린 고등어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불편한 느낌이다. 고등어는 내가 좋아하는 생선인데 고등어만 먹으면 자꾸 목에 가시가 걸리니 이제는 고등어가 싫어지려고 한다. 가시 때문에 그 좋아하는 고등어를 그만 먹어야 할지 고민인데 일주일이 지나면 아마도 나는 또 고등어를 먹을 거다. 고등어만큼 내가 좋아하는 생선이 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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