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미 Sep 12. 2024

일탈

  나 회사 다녀올게.
7시 30분 매일 집에서 나오는 시간에 잠에서 덜 깬 남편과 아이들에게 출근 인사를 건네며 집을 나섰다. 하지만 회사로 가지 않는다. 회사엔 모처럼 연차를 냈다. 결혼 후 연차는 주로 집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만 쓰는 소중한 찬스였다. 허투루 썼다간 나중에 정말 급한 일-아이들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거나 집안 경조사-에 못 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차는 나를 위해 쓰는 게 아니라 가족 공동의 목적을 위해 써야 하는 중요한 찬스이다. 꼭 그럴 때만 써야 한다고 남편이나 아이들이 말한 것도 아닌데 살다 보니 스스로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습관처럼 그렇게 쓰게 되었다. 그리고 연차를 아끼고 아끼면 나중에 돈으로 환급해서 주기 때문에 그 돈이 또 저축한 돈 받는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러니 연차는 소중한 보물 같은 존재다. 그런 귀하디 귀한 연차를 오늘은 아무 용무도 없는 데다 계획도 없이 덜컥 내버렸다. 집을 나서면서 이거 하루 연차가 돈이 얼만데 괜히 연차를 냈나 하는 잠깐의 후회가 밀려왔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떨쳐버렸다. 그러니까 네가 이모양인 거다. 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제 어디로 가지?
시간도 너무 이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우선 출근하듯이 버스를 타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어졌다. 가면서 핸드폰으로 검색을 한다. 요새 챗GPT 이용에 빠져있어서 오늘도 그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계획도 없이 연차를 냈는데 뭐를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더니 정말 AI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활동들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몇 가지 아이디어를 드릴게요.'라며 카페투어, 취미활동, 영화나 드라마 몰아보기, 스파나 마사지, 독서나 자기 계발, 맛집 탐방 등 뻔한 아이디어를 제안해 줬다.
그래서 좀 더 기발하고 일탈이 될 만한 활동을 다시 추천해 달라고 요구했더니,
'즉흥여행, 서바이벌게임, 번지점프, 즉흥촬영, 코스프레, 모르는 동네서 하루 살기 등'을 추천해 줬다. 그러나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는 없었다. 항상 그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어떤 신박한 대답을 해줄까 기대를 하며 채팅창에 질문을 띄우는데 10초 안에 대답하는 그의 답변은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친절해서 편하지만 항상 새로울 게 없는 친구처럼 금세 질려버리곤 한다.  핸드폰의 화면을 끄고 우선 버스를 타고 가까운 시내로 나가보기로 한다.

 내린 곳은 광화문이다.
목적지도 없이 낯선 곳에 놓이니 어디로 가야 할지 길 잃은 여행자가 된 것처럼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혹시라도 이런 내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질까 싶어 눈에 띄는 카페로 들어가 본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회사원들이 줄줄이 들러서 커피를 한 잔씩 들고는 쌩 나가버리기 일쑤다. 저렇게 바쁜 사람들 틈에 이렇게 혼자 여유를 부리고 있자니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알차게 보내나 광화문 주변 갈 만한 곳을 검색해 본다. 결국 내가 생각해 낸 건 그 정도인 것이다. 검색해도 특별히 흥미롭거나 호기심을 유발하는 기발한 장소는 없지만 광화문에서 가까운 경복궁이 눈에 띈다. 한적하고 운치 있는 게 거기는 가볼 만할 것 같다. 경복궁을 향하면서 바쁘게 흘러가는 서울 하늘 아래 옛 것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에 신기하면서도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막상 경복궁에 오니 특별할 것도 없고 재미도 없는 곳이란 생각에 급 흥미가 사라진다. 대충 여러 집들을 들락날락해보다가 가까운 벤치에 앉아본다. 평일 오전이라 경복궁엔 인적이 드물다. 그러다 문득 아무것도 할 것 없는 무료함에 외로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다 문득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하던 지은 언니가 떠올랐다. 지은 언니는 예전에 같이 회사를 다니던 동료이다. 아이를 낳으면서 육아 휴직을 하고 다시 복직해서 일하다 육아문제로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더니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나간 옛 직장 동료이다.
학벌도 좋고 일도 깔끔하게 잘하던 유능하고 열정 넘치는 직원이었는데 육아라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악착같이 잡고 있던 직장을 한순간 놓는 언니가 안타까우면서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런 지은언니가 문득 떠올랐다. 전화를 할까 하다 카톡을 남겨본다.
  -지은언니~나야 미연이. 오랜만이다. 잘 지내? 갑자기 언니 생각이 나서.... 어찌 사나 궁금하네.
한참 동안 문자 앞 1이 사라지지 않더니 10분 뒤에 언니에게 답변이 왔다.
  -미연!!! 이게 얼마만이야? 안 그래도 네 생각 많이 났어. 우리 만나자!
  -나도 보고 싶어. 오늘 시간 돼?
  -나야 주부니까 시간 되는데...... 너 회사 아니야?
  -응, 나 회사 아니고 광화문. 인사동에서 볼까? 12시에?
  -그래, 좋다. 오랜만에 본다니 너무 좋다.
우리는 그렇게 인사동에서 2년 만의 회포를 풀었다. 언니는 아이들 보면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고 가끔은 회사를 관둔 걸 후회한다고 했다. 하지만 미련은 없단다. 그러면서 나에겐 그만두지 말라고 했다. 언니의 말은 앞뒤가 안 맞지만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와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언니는 애들 좀 크면 일하기 위해서 재취업 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근데 과연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배우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을 거 같단다. 그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오랜만의 언니를 만나서 반가웠지만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더 밀려왔다.
일탈을 꿈꿨지만 현실에 갇힌 나는 묵묵히 집으로 향한다. 즐거운 나의 집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