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가기로 했어.
혜진에게 이번 추석 명절엔 베트남에 가기로 했으니 우리 집 고양이를 좀 부탁했다.
- 좋겠다. 나는 차례 지내는데 너는 해외여행이라니 너무 부럽네. 고양이는 걱정 마.
시골 갔다 올라오면 들러서 고양이 똥 치워주고 밥 주면 되지? 가족끼리 가는 거야?
- 어, 그럼 돼. 너무 고마워. 네가 가까운데 살아서 다행이다. 진짜 진짜 고마워. 내가 답례는 꼭 할게!
그리고 시어머니도 모시고 같이 가.
시어머니도 모시고 간다는 말에는 나를 너무 부러워할 것 없다는 뉘앙스도 섞여 있다.
- 아~ 시어머니도 같이 가? 효부네 효부야. 그나마 좀 덜 부럽네. 답례는 무슨~ 망고나 좀 사다 줘.
- 망고쯤이야 물론이지.
대개 시어머니를 모시고 여행 간다고 하면 처음엔 여행 가서 좋겠다는 부러움의 표정에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뀌곤 한다. 효부라는 말도 별로 듣기 좋은 말도 아니다. 내가 원해서 같이 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편의 희망사항이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는 그저 묵묵히 받아들여줄 뿐이다. 시어머니도 까탈스럽거나 예민하신 분이 아니어서 같이 가도 크게 힘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와 내가 끈끈하거나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딱 적당히 할 말만 하는 데면데면한 고부사이이다. 남편과 시어머니도 애틋한 사이는 아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핏줄이기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둘 만의 세계가 있다. 어머니는 홀로 하나뿐인 아들을 힘들게 키워내셨고 남편 또한 그런 어머니의 노고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남편이 '우리 엄마'하면서 어머니께 애교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저 여행 갈 때면 일하느라 여행도 못 다닌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디든 모시고 가려는 게 문제다. 그렇다. 그건 나에겐 문제다.
시어머니는 남편의 엄마지, 나의 엄마가 아니다.
나는 친정엄마와 여행을 언제 가봤는지 모르겠다.
친청엄마만 모시고 여행은 한 번도 안 가본 것 같다. 그건 엄마도 크게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더 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친정엄마와 여행 가는 것도 한 번 더 고민하기 마련인데 남편은 시어머니와의 여행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게 문제다.
- 내년엔 우리 애들 데리고 유럽여행 가보자.
- 엄마는 연세가 많으셔서 유럽 다니시기 힘들 거 같은데......
- 어머니를 유럽여행에도 꼭 모시고 가야 해?
- 애들은 크면 얼마든지 갈 수 있잖아.
- 나는 생각 안 해? 진짜 좀 너무 하지 않아?
이번 베트남 여행도 같이 가는데 유럽 여행은 우리끼리 가도 되지 않아?
남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자리를 떴다. 그렇다.
더 이상 왈가왈부해서 어머니와 여행을 문제화시키고 싶지 않은 거다. 그렇게 그는 몇 날 며칠을 입을 닫았다가 어떤 기점으로 마음이 풀린 건지 모르겠지만 사흘 만에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날 입을 닫은 이유에 대해선 한마디 말도 없었다. 결혼 후 살다 보면 서로 이해받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건 그렇게 마음의 무덤에 차곡차곡 묻혀간다. 그러다 가끔 폭발할 때면 무덤을 마구 파헤쳐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곤 한다.
그러니 너무 많이 묻으면 안 된다.
시어머니는 연세도 많으신데 잘 걸으시고 정정하시다. 내가 특별히 부축해서 다니거나 챙겨드리지 않아도 혼자서도 잘 쫓아오시고 음식도 너무 잘 드신다. 여행 다니며 투덜투덜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런데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잘 잊어버리고 까먹는 일이 많거나 했던 말을 여러 번 물어보실 때가 많다. 가끔은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하시곤 하면 답답한 나머지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한다.
그렇다. 나는 착한 효부스타일 며느리가 아닌 거다.
어머니~ 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라도 하면 좋을 텐데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며느리다.
그나마 어머니도 크게 나에게 바라는 건 없으신 거 같아서 다행이다.
어머니도 여행을 다니거나 맛있는 걸 드셔도 크게 좋다거나 맛있다는 표현이 없으셔서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도무지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은 초점 없는 멍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실 때가 많고 그럴 때면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계신 것만 같이 느껴진다.
가끔 남에게 얘기를 하실 때면 그때가 좋으셨구나 짐작하는 거다.
휴양지 수영장에서 만난 연배가 비슷한 할머니를 보시곤 계속 눈길을 주면서 대화를 하려고 하시더니 말을 거신다.
- 애들이랑 오셨어요?
- 네, 딸네 가족이랑 9 식구가 왔네요.
- 아유 많이도 오셨네. 베트남은 파도가 엄청 세네요. 지난번에 간 사이판은 물도 깨끗하고 잔잔했는데 여긴 영 파도가 세서 그러네요.
몇 년 전 모시고 간 사이판이 베트남에 와보니 좋았구나 싶으셨던 것 같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도 크게 기뻐하시진 않으시지만 이런 소소한 자랑거리로 여행의 기억을 담아 두시는구나 싶다.
여행 내내 아이들은 잠시의 뜨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기 마련이다. 시내 투어를 하다 잠깐 쉬러 들어간 카페에서 모두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기에 잠시 핸드폰은 꺼두고 우리 이번 여행에 대한 소감을 얘기해 보자 했더니 다들 헛웃음 짓고는 나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본다. 아랑곳 않고 나는 이번 여행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해 나갔다. 아이들에게도 물어보니 그냥 좋았다. 재밌었다. 남편도 응, 좋았어하고 끝이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동네에 베트남에서 일하러 온 젊은 총각 얘기를 꺼내더니 베트남 총각이 성실하고 일도 잘하더라면서 베트남 사람들이 성실해서 좋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었다. 어머니는 그러면서도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무슨 얘기든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묻는 질문에 단답형이 아닌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시며 웃으시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긴 했다.
어머니는 망고니 젤리니 주변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한 보따리 사셨다. 여행지에서 즐기기보다 돌아가 지인들에게 자랑하며 내어줄 선물에 여행의 만족도가 더 높으신 거 같기도 하다.
선물 보따리를 한가득 안고 집으로 가시면서 어머니는 손을 흔들며 덕분에 즐거웠다 하시며 여행 중 가장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하기도 하면서 마냥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심술이 나기도 한다. 역시 나는 효부는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