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옥. 그녀는 1970년생으로 올해로 55세이다. 그녀가 이 회사를 다닌 지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둥근 얼굴에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머리는 항상 질끈 동여매고 좁은 이마에 짧지만 진한 눈썹이 그녀의 강한 인상을 부각시킨다.
그녀는 항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계통의 색깔로 깔맞춤 한 코디로 출근하곤 한다. 만일 컨셉이 노란색일 경우 샛노란 플리츠 스커트에 베이지색 타이즈를 신고 상의는 연노랑 스웨터를 받쳐 입고 머리끈은 어딘가 노란색이 하나라도 섞인 핀이나 머리끈으로 묶고 신발은 노란색에 어울릴만한 베이지나 화이트 계통의 구두를 신고 마지막으로 노란 스카프를 묶은 하얀색 토트백을 들고 미소를 머금으며 씩씩하게 출근한다.
그녀는 옷색깔 취향만큼이나 확실하면서도 일관성 있는 취미생활도 한다. 유명 브랜드 커피전문점에서 마케팅용으로 자주 쓰는 프리퀀시 도장 모으기로 다양한 소모품들을 모으는 게 그녀의 취미이다. 하루는 팀 내 나병헌이 다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기에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면 대부분 커피를 쏘는 사람이 원하는 매장으로 가는 게 불문율이지만 김현옥이 "우리 어차피 커피마실 거면 스벅에서 마시자. 나 요즘 거기 프리퀀시 모아서 시즌 이벤트 선물 받으려고 하거든. 음료 10잔 마시면 와플 기계를 준대."라는 표정에는 어떻게 그걸 안 받을 수가 있어. 이건 반드시 받아야지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나병헌이 "아 네~ 그래요. 거기로 가시죠." 하면서 마치 소리 내어 스마일 하면서 웃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스벅에 가려면 건널목도 건너야 하고 평소 마시러 가는 커피전문점보다 적어도 500미터는 더 걸어서 가야 한다. 다들 잠깐 커피 마시러 나온 것 치고는 수고스럽게 다녀와야 하는 지점에 있기에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럼 전 안 갈래요 하기도 그런 분위기이기에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런데 스벅매장에 가니 김현옥이 또 한마디 거들었다.
"저기..... 와플 기계를 받으려면 시즌음료를 3잔 마셔야 하거든. 나랑 같이 시즌음료 마실 사람?"
김현옥은 한 없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주변을 둘러보며 나랑 시즌음료 마셔줄 착한 사람 없나 물색에 나섰다. 착한 나병헌이 레이더망에 걸리고 그는 "네, 저 시즌음료 마실게요!"라며 호응해 줬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 본인이 원하는 음료를 주문했고 김현옥은 마지못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녀는 커피 마시는 내내 나병헌에게 감사인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 그를 추켜세워주는 수고로움 정도는 잊지 않고 했다.
"나 차장이 사주니 커피 맛이 더 좋네."
"요새 만보 걷기 열심히 해서 포인트로 커피값 좀 모았어요."
나병헌은 다양한 어플을 이용해 포인트를 모아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소소한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김현옥의 취미이자 습관 중의 하나가 공짜는 꼭 두둑하게 챙겨 오는 거다. 음식점에 가면 일회용 물티슈를 한 움큼 쥐어오거나 커피숍에 가면 일회용 빨대를 챙기고 패스트푸드점에선 남은 일회용 케첩을 빠짐없이 챙기곤 한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물건에 집착하는 건 어려서 정말 찢어지게 가난해서 정말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없었기에 뭐든 챙길 수 있을 때 챙겨둬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것 같다.
김현옥의 물건에 대한 소유욕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은 그녀의 책상이다. 그녀가 처음 이 부서로 오던 날 본인의 소지품들을 옮기기 위해서 사과 상자만 한 택배박스를 이동식 짐수레에 실어서 못해도 3번은 왕복으로 짐을 옮겼다. 저 많은 짐을 도대체 어디에 다 놓을 수 있을까 싶은데 그녀는 주변 공동사용 구역까지 조금씩 비집고 나와서 자신의 짐들을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공동사용 휴게실의 구석에도 누런 택배 박스가 쌓여있는데 상자마다 김현옥이라는 이름들이 경매 붙은 빨간딱지들처럼 존재감을 과시하며 쓰여있었다. 그런 김현옥의 책상은 정말 틈이라곤 볼 수 없는 온갖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있다.
우선 읽지도 않을 것 같은 책들부터 종류별 텀블러, 출처가 다양한 일회용 물티슈들, 형태가 다양한 빨대들, 크기별 종이컵들, 캐릭터 문구류들과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기면 필요할 수도 있는 접시와 과도까지 없는 게 없는 그녀의 책상이다.
하루는 팀 내 이순달이 어느 날 아침 앞자리의 정미영에게 자기 자리의 핸드크림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순달은 까만 안경테와 두터운 피부에 비해 상냥한 부산사투리를 쓰는 50대 남성이다. 상냥한 말투지만 들어보면 대화에 핵심은 없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려운 곳만 맴도는 느낌의 화법에 속에서 슬금슬금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말투만큼 두루뭉술한 성격에 시원하게 돈을 쓰는 법도 없어서 팀 내에서 암묵적인 구두쇠이다.
그런 이순달이 바로 어제 새로 산 핸드크림인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거다.
어제 사무실에는 이순달과 정미영, 그리고 김현옥이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간 순서는 이순달이 제일 먼저 퇴근하고 그다음에 정미영이, 마지막에 김현옥이 퇴근했다.
정미영은 혹시 가방에 들어있는 거 아니냐, 집에 가져간 건 아닌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이순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에이, 뭐 비싼 것도 아니고 다시 사면되죠 뭐.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나 보죠. 헤헤헤"
그는 어쩐지 씁쓸하면서도 미심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웃어넘겼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은 정미영은 괜히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순달은 내가 가졌다고 의심하는 건가? 정미영이 살면서 남의 물건에 손댄 적은 어려서 초등학교 2학년 때 대형슈퍼에서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은 나머지 초콜릿을 들다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다시 내려놓은 기억밖에 없다. 그런 소심한 그녀였기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찜찜하고 괜히 마지막에 남은 김현옥을 의심하게 됐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이순달이 정미영을 의심하는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다. 구두쇠인 이순달이 사봤자 이삼천 원하는 핸드크림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구두쇠가 몇 년 동안 핸드크림을 바르는 걸 본 적도 없는데 웬일로 핸드크림을 샀는지도 신기했다. 그런 그가 산 핸드크림이기에 금액보다 얼마나 많은 생각 끝에 샀을까 싶어서 더 신경이 쓰이는 정미영이었다. 그렇다고 이순달에게 그날 마지막으로 퇴근한 분이 김현옥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웃기다.
무슨 증거도 없이 대놓고 사람을 의심하면 의심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사람 되기 일쑤이기에.
정미영은 이순달에게 핸드크림 어디 건지 어떻게 생긴 건지 물어봤다.
당연하게도 이순달은 자기가 산 핸드크림 이름도 모르고 어디 브랜드인지는 더더욱 모른다고 했다. 아마 눈에 보이고 저렴하면서도 캐릭터를 좋아하는 그이기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핸드크림을 샀을 거다.
"아.... 제품명이 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주황색이었나?" 말하며 긁적 긁적이는 그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정미영은 도대체 자기가 산 물건이 핸드크림인 줄은 알고 있긴 한가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미영은 김현옥을 포함한 다른 직원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식사를 하면서 정미영은 이순달의 핸드크림 분실사건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김현옥의 반응을 살펴봤다.
"부장님, 글쎄 이순달 씨가 며칠 전에 새로 산 핸드크림을 바로 당일에 잃어버렸대요."
"그래? 아니 왜? 어떻게 분실됐는데?"라고 묻는 김현옥이다.
"그날 핸드크림사서 쓰고 책상에 두고 퇴근했는데 다음날 왔더니 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누가 그걸 가져갔지?"라고 말하면서 별일도 다 있네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내가 그날 제일 늦게 갔는데 나를 의심하는 거 아냐? 사무실에 CCTV를 설치할 수도 없고 그런 걸 챙기는 좀도둑이 있다니 왠지 찝찝한걸." 이마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다 고민스러운 듯 턱을 괴고는 살짝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뭐 비싼 건 아닌데 물건이 없어지니 서로 의심하게 되고 좀 그런 것 같아요."
정미영은 의심받는 게 싫어 김현옥을 의심한 자신이 인스턴트 라면처럼 값싸게 느껴졌다.
"그래도 비싼 게 없어진 게 아니니 다행이지 뭐."
당연히 이순달의 핸드크림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가끔 물건에 발이 달린 건지 감쪽같이 사라질 때가 있곤 한다. 아니면 귀신의 장난이거나. 대개는 사람이 자신의 기억력을 맹신해서 벌어지는 해프닝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읊조린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김현옥의 취미활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본인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프리퀀시 도장을 챙겨줘서 의도치 않게 와플 기계를 두 대나 받게 됐다며 행복에 찬 목소리로 자랑을 한다.
그리고 이순달의 책상에 다가가 그의 캐릭터 이어폰 케이스와 볼펜들을 보며 "이 캐릭터 좋아해? 난 얘보단 복숭아 캐릭터나 사자 캐릭터가 더 좋던데. 난 얘는 별로야."라며 묻지도 않은 취향을 밝히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 뒤로 이순달이 핸드크림을 샀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