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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미 Oct 09. 2024

사요나라, 카즈오

 유리는 같은 팀의 미연과 점심을 먹고 한 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나가서 한 손에 든 커피를 쏟을 뻔했다.
 - 아, 스마센. 이야이야. 미안합니다.
 - 아, 네.....
미안하다는 말에 유리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말투가 어눌한 게 일본인인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보니 가지런한 눈썹에 삐쭉삐쭉 자른 머리가 영락없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대여섯 명의 비슷한 느낌의 남자들과 몰려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까만 양복에 까만 백팩을 메고 있었는데 마치 교복처럼 똑같아서 같은 곳에서 옷이라도 맞춘 거가 싶은 느낌이었다. 내 어깨를 친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멀리 사라져 갔다.


 - 뭐야, 일본 사람들이 왜 우리 회사에 있는 거지?
미연이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유리에게 말했다.
 - 아, 우리 닛뽄 다이치산교라는 회사랑 협약 맺어있잖아. 거기서 출장 온 거 아냐?
유리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 아, 그런가? 그나저나 저 남자 꽤 귀엽네. 근데 바지는 왜 이렇게 짧은 거야?ㅋㅋ
미연이 내 어깨를 친 남자를 보며 말했다.
 - 귀엽긴,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이는 것 같은데.
라고 유리는 말했지만 유리도 그런 그에게 어쩐지 눈이 갔다.

자리에 오자마자 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유리를 부르며 잠깐 자리로 오라고 했다. 팀장은 갑자기 일본 회사에서 우리 회사 기술은 배우러 일부 직원들이 왔는데 다들 한국말을 좀 하긴 하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중간에서 소통이 안될 때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다고 인사팀에서 도움을 요청해 왔다는 것이다. 유리가 일본어를 좀 할 줄 안다는 정보가 있기에 하루에 2시간씩 일본 직원 교육에 와서 지원을 좀 해주라는 내용이었다.
유리는 일본어 자격증이 있지만 안 쓴 지도 10년이 넘었고 과연 내가 일본 사람들과 대화가 될까 자신이 없었다. 팀장은 괜찮다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지금 4층 회의실에서 회사 연구소 직원들과 일본 직원들이 미팅 중이니 가보라고 했다.
유리는 가면서 뭐라고 나를 소개해야 하지 혼자 일본어로 중얼거리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4층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에서는 연구소 직원들이 회사 기술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 중이었다. 앞 문으로 들어가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뒷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갔는데 연구소 직원이 용케 유리를 알아보고 앞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 여긴 기획팀 이유리 대리입니다. 일본어를 아주 잘하신다고 하니 궁금한 건 이분을 통해 물어봐 주세요.
연구소 직원이 소개를 해주자 유리는 속으로 아주 잘하긴 뭘 잘한다는 건지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건지 속이 타들어 갔다.
 - 안녕하세요. 이유리입니다. 저희 회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요로시쿠 오네가이 시마스.
일본 직원들은 어딘가 안도의 표정의 지으며 유리를 향해 환영의 박수를 보내줬다.
유리는 일본 직원들 사이에 앉아서 그들이 설명을 들으면서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옆에서 쉬운 단어를 써가며 설명해 주었다. 그들 사이에 아까 점심시간에 마주친 그가 있었다.

설명회가 끝나고 일본인들을 환영하는 회식자리가 있었고 내 옆에 그가 와서 앉았다.
 - 하지메마시떼. 다카하시 카즈오 데스. 안녕하세요.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요.
 - 안녕하세요. 괜찮아요. 그런데 앞은 잘 보고 다니셔야 할 것 같아요.
 - 네네네, 아까는 어리둥절해서 바보같이 실수했던 것 같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 아~ 그러실 필요까지는.

유리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카즈오는 너무 진심으로 사과해서 민망함이 몰려왔다.
 - 그런데 이 반찬은 뭐예요? 매워요?
그는 빨갛게 무친 홍어회 무침을 가리키며 물어봤다.

민망하던 차에 화제를 돌려주는 카즈오가 반가운 유리였다.
 - 아, 이건 삭힌 회로 만든 무침인데 조금 매울 수도 있지만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 아, 네.
그는 맛을 보더니 우마이, 맷차 우마이를 외치며 엄지 손가락을 엄지 척해서 보여주며 웃었다.
 - 일본 어디서 오셨어요?
 - 오사카요. 아세요?
 - 어쩐지. 오사카 사투리를 쓰시길래 여쭤봤어요.
 - 오사카 사투리는 어떻게 아세요? 너무 반가워요.
카즈오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유리를 바라봤다.
 - 대학교 때 오사카에 한 달 정도 살았었어요. 어학연수로
 - 헤에, 혼마니?
 - 네, 카즈오 씨가 오사카 사투리 쓰시는 거 보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나네요. 반가워요.
 - 저도 반갑네요. 한국에서 고향친구 만난 기분이랄까? 하하하

 유리는 매일 반복되고 특별할 것 없던 일상에 카즈오라는 파도의 일렁임에 생기가 돌았다.
카즈오는 유리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장난기가 다분한 둥근 눈을 가졌고 웃으면 양 옆의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꽤 매력적인 미소를 가졌다. 그런 카즈오에게 유리는 호기심이 생겼다.
유리는 다음날부터 일본 직원들 미팅 시간이 기다려졌다. 유리는 무심한 척 카즈오 옆자리로 앉았다. 그러자 카즈오가 유리를 보고 씽끗 미소 지어 주었다.
미팅 중에 카즈오가 유리의 노트에 슬쩍 메모를 적었다.
 - 주말에 한강 구경 가고 싶은데 같이 가줄 수 있어요?
 -......
 - 제가 갑자기 무리한 부탁드렸나 보네요. 미안해요.
 - 괜찮아요. 같이 가요.
유리는 주말에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왜 카즈오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했는지 모르겠다. 왠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일 거절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기에 유리는 선뜻 응했다. 하지만 섣불리 응한 건 아닌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마음은 있었다.

토요일 2시 뚝섬역에서 카즈오를 만나기로 했다. 10월 초의 날씨는 꽤나 선선했고 살짝 한기가 도는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날씨였다. 하지만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선명하게 하얀 게 마치 수채화로 그린 듯했다. 유리는 시간 맞춰 나갔고 카즈오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베이지색 치노팬츠에 연하늘색 체크 남방을 깔끔하게 바지 속에 넣어서 반듯한 매무새로 서 있었다. 깔끔한 그의 이미지와 파란 하늘이 꽤나 잘 어울리는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런 카즈오를 만나러 가는 길이 왠지 떨리고 마치 썸 타는 이성과 데이트하러 가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멋쩍게 느껴지는 유리였다. 한편으로 이게 썸 아닌가 싶었다.
유리가 연애를 안 한 지 2년이 넘어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지도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카즈오는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보고 싶다고 했고 둘은 같이 한강의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탔다.

 - 유리라는 이름 저희 어머니 이름하고 같아요.
 - 정말요? 유리, 흔한 이름이죠.
 - 한국에도 유리라는 이름이 있는 줄 몰랐어요.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져요. 오늘 갑자기 데이트하자고 했는데 선뜻 응해줘서 고마워요.
 - 데이트요? 데이트라고 하니 좀 이상하네요. 하하하

속으론 설레었지만 마음을 들킬까 봐 유리는 아닌 척 웃어넘겼다.
 - 아, 데이트가 아닌가요? 미안해요. 그런데 우리 왠지 인연인 거 같지 않아요? 처음부터.
 - 글쎄요. 저는 처음에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 싫어하죠?
 - 꼭 그렇지 않아요. 나라에 대한 감정이 좀 안 좋은 거지....... 미안해요.
 -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전 좀 한국 사람들에게 미안한 느낌이 있어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니 저도 왠지 고맙네요. 제가 뭐라고.
 - 한강 참 좋네요. 서울의 도심에서 이렇게 뻥 뚫린 곳이 있다니 신기해요. 한강 너무 아름다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곧 떠나야 한다니 좀 서글프네요.

카즈오와 유리는 한강을 바라보는 벤치에 앉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한강의 건너편에 있는 빼곡한 마천루들에 반짝이는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피부에 닿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강 건너의 불빛들과 주변의 사람들로 자그마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한강이 좋은 것은 강물과 도시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카즈오는 한 달 뒤에 돌아가야 한다. 유리도 알고 있지만 미처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가 돌아간다고 하니 왠지 유리도 서글퍼졌다. 유리는 한강을 바라보는 카즈오의 옆모습을 보니 긴 속눈썹과 날카로운 콧대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유리는 남자의 옆모습을 좋아한다. 순간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속으로 삼켰다.

 - 유리 씨는 눈이 참 예뻐요. 제가 만약 한국에 살았으면 유리 씨하고 만나자고 했을 거예요. 이건 진심이에요. 그럴 수 없다니 너무 아쉽고요.
 - 저를 좋게 봐주시니 너무 고마워요. 저도 카즈오 씨 좋은 사람처럼 느껴져요. 곧 가신다니 아쉽고.
 - 일본에 놀러 와요. 제가 오사카 구경시켜 줄게요.
 - 꼭 갈게요.

유리는 꼭 놀러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카즈오를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삶의 의미마저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카즈오가 돌아가기까지 한 달 동안 유리와 카즈오는 거의 매일 만났다. 이젠 호기심의 감정을 넘어선 끈으로 꽉 묶여버린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유리는 초조했다. 과연 카즈오를 잘 보내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떠나면 마음이 쿵 내려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여지없이 다가왔고 그는 곧 돌아가야 한다.
카즈오가 떠나기 전날 유리에게 말했다. 너를 만나서 너무 행복했고 한국의 시간이 그리울 거라고. 꼭 일본에 놀러 오라고. 기다리겠다고.

유리는 카즈오의 그런 말들이 가을바람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그는 유리를 기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카즈오가 돌아가고 한 동안 유리는 너무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자리의 미연이 유리에게 말했다.

 - 야, 지난번에 왔던 일본 사람들 중에 너랑 친하게 지내던 카즈오라는 남자, 유부남이래. 너 알았어? 너 엄청 친하게 지내는 거 같던데 깊은 사이는 아니지? 유부남이 싱글인 것처럼 행세하고 너무 깬다.
 - 어어, 알고 있었지. 그 사람이 먼저 말했어.

나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얼얼하게 맞은 느낌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 아, 알고 있었어? 그럼 다행이고. 암튼 이제 가서 다행이네. 너랑 그 사람이랑 너무 붙어 다녀서 사람들이 뒤에서 얼마나 웅성웅성 댔는데. 몰랐지?
 - 아, 그냥 친구야. 친구.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화가 났다가도 어이가 없다가도 그의 옆모습이 떠오르면 마냥 보고만 싶었다. 어차피 끝이 보이는 사이였다. 유리도 알고 있었다. 카즈오가 말을 안 한 거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괘씸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유리도 하지 않았다. 유부남이든 싱글이든 결국 헤어질 관계였다.
한 달 뒤, 그로부터 SNS문자가 왔다.

- 고멘나사이, 사요나라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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