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웅은 오랜만에 현철과 을지로에서 퇴근 후 만나기로 했다. 철웅의 회사는 종로에 있고 현철의 회사는 판교지만 현철의 집이 신당동이기에 을지로에서의 만남은 둘 모두에게 합리적인 장소라고 생각한다.
철웅과 현철은 옛 직장 동료인데 지금은 둘 다 다른 회사로 이직해서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보게 됐다.
먼저 만나자고 한 건 현철인데 철웅은 현철의 연락이 반가웠다. 철웅은 요새 회사에서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 미나 때문이다.
- 미나 씨, 이 A기획안 오늘까지 마무리할 수 있어?
- 아뇨, 오늘까지 끝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 이거 지난주부터 계속 얘기했는데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면 안 되지.
- 그땐 이번주 안에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해보니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요. 그리고 따로 또 주신 B업무가 있어서 그것까지 같이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 그래요, 지금 급한 건 A니까 그것 먼저 빨리 마무리지어주세요. B는 급한 거 아니니
미나는 일을 주면 항상 목표일보다 늦어지기 일쑤였고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며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대답하곤 한다.
- 미나 씨, 시스템개발 쪽을 기획하려면 IT업무에 대해서도 좀 알아야 기획에 도움이 돼요. 시간 될 때 이 책 한번 읽어봐요.
- 기획이랑 IT개발 업무는 엄연히 다른데 굳이 이것까지 제가 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획업무 배우기도 벅찬데......
- 기획도 결국 일을 알아야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알고 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거랑은 큰 차이가 있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좀 더 일해본 선배입장에서 얘기하는 거니까 받아들이는 건 본인의 몫이지.
- 네, 시간 되면 읽어 보겠습니다.
철웅은 이런 미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매번 잔소리하는 것도 불편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소리는 다시 반사되어 철웅에게 돌아오는 느낌이기에 힘만 빠지곤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목구멍으로 삼키곤 하는 일이 잦아지니 그게 철웅에게 스트레스로 쌓인다. 그러니 예전에 마음 맞아서 일할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곤 하던 현철의 연락은 마치 짝사랑하던 그녀로부터 온 연락처럼 기대가 된다.
철웅은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을지로로 향한다. 을지로의 저녁은 일을 끝내고 한 잔 하려고 모인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다. 철웅은 현철과 을지로의 효천횟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효천횟집은 시장 안에 허름하고 작은 식당으로 스키다시는 많지 않지만 나오는 반찬들이 깔끔하고 맛있는 건 물론이고 회맛이 꽤 일품이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께서 오셔서 뭐 드실래? 라며 친근하게 주문을 받으시는데 아무래도 그분이 이 식당의 주인장인 게 분명하다. 철웅이 식당에 가니 현철은 이미 와서 앉아있다.
- 김 이사님, 오랜만이에요.
현철은 현재 직장에서 이사로 재직 중이다.
- 박 부장님, 여전하네요. 왜 이렇게 나이를 안 먹는 거 같지? 나만 나이 든 거 같네.
- 김이사 님도 얼굴 좋아 보이십니다.
- 얼굴이 좋긴. 회나 시킵시다.
둘은 쥐치회에 소주와 맥주를 주문한 뒤, 먼저 나온 반찬들로 식전 식사를 시작했다. 오이며 당근으로 건강에 좋은 채소를 섭취하고 마요네즈에 버무린 사과사라다도 젓가락으로 콕 찔러 먹었다. 무엇보다 설탕물에 담근 생고구마는 자꾸만 손이 가서 회가 나오기 전에 한 접시 더 리필을 요청했다. 몇 가지 없는 반찬들이 회 못지않게 저마다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제대로 된 식당임에 틀림없다. 회를 기다리며 둘은 그간 못다 한 서로의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 현철은 새로 옮긴 직장에서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했다. 빨리 실적을 내야 하는데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아서 조급하다고 한다. 자리 잡은 현철이 부럽다고 한다.
- 부럽긴요. 전 팀원들이 요즘말로 엠지세대 들인데 예전에 저 일할 때 같지 않아서 답답해요.
- 요즘애들 쉽지 않지.
- 하루는 사내에서 직원들 직무마인드 교육한다고 다들 교육받으러 가는데 저는 일하느라 못 갔거든요. 그런데 신입직원 한 명도 안 가고 앉아있길래 교육받으러 안 가요? 하고 물어보니 할 일이 많아서 못 간다는 거예요. 일 안 많은 거 내가 뻔히 아는데 그냥 귀찮아서 안 간 거거든요. 마치 너도 안 가지 않았냐라는 눈빛으로 보는데 어이가 없는 거죠.
팀장이랑 신입이랑 레벨이 같아요? 요샌 수평조직이다 뭐다 그러는데 일을 배우는 입장에선 수평조직이 맞지 않다고 보거든요.
삐약빠약 병아리랑 꼬꼬댁 닭이랑 경험치가 다른데 동일시하는 태도가 저는 별로인 거죠.
- 하하하, 박 부장 삐약이 때문에 골치 아픈가 보네. 난 그것도 박 부장의 경험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박 부장이 이젠 관리자급의 자리이고 이젠 직원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에 대한 시행착오가 필요한 시기인거지.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는데 옆자리의 젊은 남녀들이 술에 취해 목소리가 높아지니 철웅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철웅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을 하니 현철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옆자리의 젊은이들은 눈치를 챈 건지 다들 손에 전자담배를 하나씩 들고 밖으로 나간다.
- 박 부장도 꼰대가 다 됐네.
- 그런가 봐요. 그냥 저는 꼰대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세상에 꼰대도 필요하니까요. 꼰대라는 말로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게 더 꼰대스러운 거 아닌가 싶어요. 젊은 꼰대.
- 박 부장말도 맞네. 하하하
- 오늘 김 이사님 덕분에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 난 이 회사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아.
- 아니 왜요? 실적 못 내서 눈치 줘요?
- 박 부장 요새 일 인분이라는 말 알아?
- 식당 가면 쓰는 말 아녜요?
- 뭐 그런 뜻에서 나온 건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쓴대. 회사에서 내가 일 인분을 하는지, 게임에서 일 인분의 역할을 하는지를 잰다는 거지. 그런데 나는 지금 일 인분은커녕 영점오인분도 못하고 있거든. 분위기가 나가길 바라는 거 같아. 난 이제 딴일 해야 할까 봐. 부동산 경매라도 배워볼까
- 경매, 노후대비로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 회사는 안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 응, 아직은 생각 중이야. 걱정 마.
철웅과 현철은 횟집을 나와 2차로 근처 가맥술집으로 가서 먹태에 맥주를 더 마셨다.
술이 들어갈수록 둘은 옛날얘기에 빠졌고 그럴수록 서글퍼졌다.
거나하게 술에 젖은 둘은 아쉽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철웅은 현철에게 미안해졌다. 현철의 고민에 비해 별거 아닌 일로 핏대 세우며 얘기한 건 아닌지, 행복한 고민으로 들린 건 아닌지 죄스런 마음마저 들었다. 한편으로 현철이 말한 일 인분의 기준이 과연 합리적인 기준인 걸까? 일 인분이라는 말로 선을 긋는 건 아닌가? 일 인분이 그렇게 중요한가 싶어졌다. 그래서 김미나는 그렇게 일 인분만 하려고 하는 건가 더 이해할 수 없는 일 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