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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미 Oct 27. 2024

그날 이후,

 이수는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를 맞이했다.
하지만 한 달 전엔 이런 일상이 다시는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한기는 저녁 8시쯤 잠시 친구와 한 잔 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이수는 다 늦게 무슨 술이냐며 핀잔을 줬지만 아이를 돌보느라 녹초가 된 그녀는 솔직히 한기가 나간다고 해도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너무 늦지만 말라며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한기를 뒤통수로 쫓다가 마저 하던 설거지에 집중했다.

집안일을 끝내고 잠시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는데 문득 아까 나간 한기가 궁금해졌다. 갑자기 누굴 만나러 나간다는 거지? 지금 몇 시지?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사람이 몇 시간을 안 들어오네? 참 속 편한 인간이네라는 생각과 함께 밤의 여유를 즐기는 그가 얄미워졌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이수는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 인기척에 뒤척이던 이수는 이내 한기가 집에 돌아온 걸 알았다. 잠결에 협탁 위 충전기에 놓인 핸드폰을 보니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도 너무 늦은 데다 한참 잘 자고 있는데 잠이 깨서 짜증이 난 이수는 한기에게 볼멘소리로 일찍 좀 다니라고 쏘아붙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기는 대꾸도 없이 씻은 뒤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이내 코를 골고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 불도 켜지 않고 부엌으로 가는 길에 발 끝에 뭔가 채여서 바닥을 보니 한기가 벗어놓은 옷가지 옆에 반짝이는 머리핀이 떨어져 있었다. 여자 머리핀이다. 순간 이수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기가 왜 여자 머리핀을 갖고 있을까? 이수는 평소에 머리핀을 하지 않는다. 그럼 이건 누구의 머리핀인가? 그날 밤 이수는 아침까지 꼬박 잠을 설쳤다.

한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아침상을 마주하고 이수가 한기에게 어제 누굴 만났는지 물었다.
 - 어제?
한기는 바로 말을 못 하고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 동수라고 알지? 나 고등학교 때 친구? 집 근처로 왔다고 잠깐 얼굴 보자고 해서 나갔는데 반가운 나머지 새벽까지 술을 마셨네. 아으 속 쓰려.
 - 근데 이 머리핀은 뭐야?
이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새벽에 떨어진 핀을 보여줬다.
 - 어? 이걸 왜 당신이...
 - 새벽에 물 마시러 나왔다가 봤어. 왜 여자 머리핀을 당신이 가지고 있어.
 - 아,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나도 모르게 주웠어.
 - 핀을?
 - 응. 술김에 주운거지

이수는 한기의 말을 듣고도 속이 개운치 않았다. 어딘가에 숨겨진 진실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만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머리핀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한기는 별다른 반응 없이 출근 준비를 끝내고 문을 나섰다. 이수는 혼자 남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수의 머릿속에서 그 머리핀이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한기의 행동과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이 이수의 가슴을 더욱 조였다. 하지만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정말 길에서 주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이수의 직감은 너무도 강렬했다.

이수는 한기와의 시간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이수가 한기를 처음 만난 건 서점에서였다.
그날 이수는 지인의 소개로 종로에서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 아직은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던 4월이었다. 이수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기도 어려워 나가기로 했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이수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 보러 근처 교보문고에 들어갔다. 시와 소설코너에서 신간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남자. 단정한 베이지색 재킷에 똑떨어지는 연한 청바지를 입은 그가 카뮈의 책을 들어서 보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이수는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남자는 아직이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매무새를 고치는데 서점에서 본 그가 앞에 서있었다.
 - 안녕하세요? 서이수 씨?
 - 네, 이한기씨세요?
 - 혹시 좀 전에 서점에 계시지 않았어요?
 - 아... 네. 같은 코너에 서 있었던 거 같네요.
이수와 한기는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인연처럼 첫 만남부터 서로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르고 한기는 이수에게 사실 서점에서 이수를 보고 마음에 들어 끌리듯이 따라가게 됐고,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봐 책을 보는 척했다는 거다.
그런 너의 살결을 만질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 게 마치 엊그제 같은데 지금의 한기는 마치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낯선 남자처럼 느껴졌다.
이수는 최근에 한기와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 웃었던 게 언제인가 생각해 보니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웃음은커녕 서로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는 고생 베틀에 여념이 없었다.

이수는 한기에게 솔직히 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혹시나 그가 정말 자신을 배신했다면? 하지만 이수는 확실한 진실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평소 주의 깊게 보지 않던 한기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유독 핸드폰을 자주보고 안 하던 톡을 보내는 거 같았다. 핸드폰을 보면서 혼자 히죽히죽 웃는게 여간 수상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결국 한기가 잠든 새벽에 이수는 한기의 핸드폰 잠금을 풀고 카톡을 확인했다. 핸드폰 잠금 패턴은 한기가 수시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기에 슬쩍 보기만 해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많은 카톡 문자 중에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 다음 주도 만날 수 있을까?
그녀의 손은 떨렸고, 숨이 가빠왔다. 하지만 그 톡방엔 선뜻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더 깊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의심이 아님을 확신했다.

며칠 후, 이수는 한기에게 말을 꺼냈다.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 우리 얘기 좀 해. 당신, 나한테 뭘 숨기고 있지? 난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한기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간 느꼈던 의심과 불안을 모두 쏟아냈다. 한기 역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감정의 헛된 바람이었을 뿐, 아무것도 깊어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 미안하다고? 나도 미안하단 말로 용서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그럴 수 없어. 내 마음이.
 - 살면서 두고두고 사죄할게.
 - 난 평생 사죄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 너무 비참한 인생 아니야?
 - 미안하단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이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오랜 침묵에 빠졌다.
더 이상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혼란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 뒤엉켰다. 배신감은 너무 컸지만, 한기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왔을 때 한편에 잘 개어진 빨래들과 주방에 깨끗이 정돈된 식기건조기는 한기의 표정 같았다. 내가 잘할게 라는. 정돈된 가재도구들에서 그의 마음이 이수를 떠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수는 그런 한기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수는 한기에게 물었다. 정말 왜 그랬는지?
한기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힘들게 한마디를 꺼냈다.
 - 외로웠어. 넌 항상 나를 밀어내고. 네가 힘들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도 힘들었어. 하지만 내가 비겁했어. 미안해, 정말
 - 나도 많이 외로워. 너만 그런 거 아냐. 우린 아마 서로에게 바라기만 한 거 같다.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이야. 너무 절망적이야.
 - 난 다시 너와 잘해보고 싶어.
 - 난 너와 다시 잘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줘.

결국 이수는 눈물을 머금고 결정을 내렸다. 이혼은 하지 않기로. 하지만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음을 한기도, 이수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한 침대에 누웠다. 한기는 이수를 바라보았지만 이수는 한기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이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한기는 잠시 동안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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