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처세술이라는 둥, 삶의 지혜라는 둥, 듣기 좋은 말로 포장된 가식적인 언행을 감싸는 표현이 많다.
특히나 기성세대, 흔히 말하는 인생을 좀 살아봤다는 어른들이 주로 많이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유독 많이 쓰이는 곳은 회사와 같은 직장에서 더욱 많이 쓰이곤 한다.
화가 나도 참는 게 이기는 거고, 듣기 싫은 말도 웃으며 들어줘야 하고, 무엇보다 마음에 없는 말을 주로 하는 곳이 회사이다.
- 홍 차장, 이거 해볼 수 있어요?
- 네, 해보겠습니다.
속으론 너무 하기 싫지만 직장 상사가 시키는데 처음부터 부정적인 반응은 옳지 못하기에 해본다고 하는 거다.
아니면 유체이탈 화법으로 에둘러 이걸 하기엔 다른 업무가 산재해 있어서 이것까지 하기엔 좀 곤란할지도 모를 걸요라는 식으로.
홍 차장은 직장 생활 15년을 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적당히 넘어가는 법을 모른다. 단순한 홍 차장은 아니면 아닌 거고 기면 기인 거다.
이런 자세로 용케도 15년을 한 직장에서 버텨온 게 대단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버텨온 게 아니라 모두가 피해서 편해진 건데 그걸 또 홍 차장은 나름 현명하게 대처해서 사람들이 내 말이면 껌벅죽는구나 라고 오해하곤 한다.
김 과장은 처세술의 대가이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어떻게 말을 해야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잘 해결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거 같다. 한번 직설화법으로 말하면 끝날 것도 서로의 기분과 상황을 계산해서 완곡한 표현과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표현으로 결정을 상대방에게 은근슬쩍 넘겨서 책임을 면피할 수 방법을 잘 찾아낸다. 그의 최고의 장점은 뾰족하지 않고 공격적이지 않은 그의 화법일 것이다.
- 김 과장님, 이번 프로젝트 이슈 건은 다음 제도에 반영해서 기준을 팍 박아 넣읍시다.
- 네, 이번 케이스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인데 그래도 어렵지 않게 잘 해결돼서 다행인 거 같습니다. 물론 제도화해서 모든 걸 기준에 맞춰서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는 이번 사안은 제도에 끼워서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고객요구에 의한 이슈였으니 고객의 의견을 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절대 급하거나 쫓기듯이 말하지 않고 마치 나에겐 12척의 배가 있다는 듯 한껏 여유로운 자세이다.
그러면서도 팀장의 말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게 바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처세술일까?
박 부장은 예스맨이지만 다급하고 여유가 없어서 항상 조급하다. 그는 긍정적인 면에서는 우수한 직장인이지만 자주 흥분하면서 말을 하기에 거기서 감점의 요소가 매우 크다. 그리고 급해서 실수를 한다거나 말을 더듬거릴 때면 의견전달이 모호해지면서 급마무리되는 안타까운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한편으론 매우 인간적인 회사원이다.
그래서 기가 센 직원들에게 잘 휘둘리기도 한다.
- 어, 홍 차장님 이거 로컬환경에서 안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되네요.
- 어, 그럴 리가요. 되면 안 되는데......
- 그러게요. 왜 되는 거지?
- 어디요? 봐봐요.
- 여기요.... 아, 로컬이 아니라 VDI였네요. 아, 이런 죄송합니다. 하하하
역시나 허술한 면이 있어서 정이 가는 박 부장이다. 허술하지만 또 성실한 캐릭터이기에 밉상은 아닌 게 그의 매력일 것이다.
유 차장은 항상 텐션이 높다. 목소리도 하이텐션, 기분도 하이텐션, 말투도 하이텐션에 래퍼 못지않은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다. 일단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하면 그녀의 리듬감에 나까지 하이텐션이 되고 만다. 내 딴엔 저렇게까지 흥분하자고 말을 꺼낸 게 아니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상당히 흥분할 만한 소재였나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하지만 로우텐션으로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따분하고 반복되는 회사생활이 억지로 텐션을 높이지 않으면 저절로 어둠의 자식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 제가요 어제 점을 봤거든요. 아니 근데 점쟁이가 저보고 올해는 마가 꼈다는 거예요. 저보고 올해는 조신하게 지내라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그른 거 같이요.
- 점쟁이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라고 홍 차장이 말하니,
- 안 들었으면 몰라도 듣고 무시하기가 쉽지 않아요. 요새 일도 잘 안 풀리고 마가 끼긴 꼈나 봐요. 하하하
공그룹장은 다양의 성격의 변주를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캐릭터이다. 기분이 좋을 땐 농담도 잘 던지고 경직된 분위기를 유머러스하게 풀 줄 아는 대단한 능력이 있지만 한편으론 툭툭 던지는 단어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해서 타인으로 하여금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가벼운 성격이기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지만 친근했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면 온도차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 어, 뭐야? 오늘 홍 차장이랑 유 차장 옷색깔이 같네. 얼레리꼴레리~ 뭐야, 그 눈빛은? 내가 창피해? 얼레리꼴레리~
- 그룹장님, 체통을 지키셔야죠.
- 체통은 먹는 건가? 얼레리꼴레리~
- 됐습니다.
- 참, 홍 차장 내일 발표해야 하는 거 알지?
- 제가요? 전 금시초문인데...... 안 그래도 바쁜데..... 전 못해요.
- 어떻게 못한다는 말을 하냐?
홍 차장은 갑자기 냉랭한 분위기에 잠시 얼었지만 이미 못한다고 했기에 말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공그룹장은 말도 없이 휑 가버렸다.
최팀장은 틈이 없다. 여기서 틈은 허점이 아니라 여백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시간 토끼처럼 항상 시간에 쫓기듯 다급하기에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일쑤다. 그녀가 언제 이야기의 급마무리를 짓고 자리를 뜰지 모르기 때문이다. 급한 성격만큼이나 질문도 다급하기에 생각할 여유가 없다.
- 참, 오늘 주간회의였지!
- 김 과장, 보고자료 다 만들었어요?
- 아, 아뇨... 아직.
- 오늘 오전 보고인데 최대한 시간 맞춰 만들어봐요. 아름답게 안 만들어도 되니까 최대한 퀵하게.
- 아, 네......
- 참, 홍 차장 잠깐 와 볼래요.
-.... 네
- 이거 급한 거거든. 다른 할 사람이 없으니 홍 차장이 해줬으면 하는데.
- 팀장님, 지금 할 일도 몰려서 많아요. 못 할 것 같습니다.
- 다들 바빠요. 홍 차장 바쁜 거 아는데 할 만한 사람이 홍 차장이야. 충분히 할 수 있으니 해보지도 않고 못한다고 하지 말고 해 보세요.
-.... 네
홍 차장은 더 이상 말해봤자 팀장을 이길 수 없단 걸 알기에 말꼬리 잡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로써 홍 차장은 불평불만이 많은 직원이라는 오명도 생기고 거절한 일도 그대로 하게 됐다. 회사생활 최악의 상황 중 하나일 것이다.
홍 차장은 조금만 생각해 보고 말했으면 인성도 좋고 일도 척척 받아서 잘하는 긍정적인 직원이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좌충우돌 홍 차장은 도대체 언제쯤 회사생활에 현명하게 대처할 날이 올지 걱정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