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의 약속

by 슬미

결혼이란 무엇일까?
결혼은 꼭 해야 할까?
태어나 첫 사회생활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일 것이다. 그리곤 바로 의무교육과정인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선택사항인 대학교를 대개 들어가거나 아니면 바로 사회전선에 뛰어들어 생계활동을 하게 된다. 사회라는 정글에 지쳐갈 때쯤 마치 도피처나 안락처 또는 인생의 전환점으로 결혼을 한다. 사회적 제도하에 사는 사람들은 제도에 맞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리고 다들 결혼이 마치 당연한 인생의 항로인 것처럼 그 항로를 벗어나면 불안하고 초조하다. 아무래도 집단 세뇌에 따른 부작용일 것이다.

로라는 그래서 결혼했다.
적당히 사랑했고 적당히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같이 인생을 일궈 갈 만큼 성실하고 인간적인 남자라고 판단해서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불안한 미래에 하나 보다는 둘이 서로 의지하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혼자서는 밥 먹는 것도 눈치 보이고, 밤에 혼자 자는 것도 무섭고 적금을 부을 때도 의논할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결혼해 보니 챙길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았지만 기댈 곳이 있어서 로라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가족이 늘어가는 건 또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가족이 느는 만큼 걱정거리와 근심거리,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보기에 편안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선 보살핌과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로라는 평화로운 가정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력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맞벌이로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두 살배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면서 로라는 아이에게 부모의 따뜻한 품을 더 주지 못해 미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따뜻한 품도 경제적 여건이 중요하기에 경제력은 택한 로라이다. 로라가 살아본 인생은 양자택일이고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게 삶이었다. 로라에게 삶은 헤쳐나갈 고난과도 같은 거였기에 최대한 피해를 보지 않고 편하게 가는 쪽을 택하려고 했다. 요즘말대로 가성비 높은 인생을 살기 위해 여기저기 눈치 보며 고군분투 중이다.

결혼 후, 15년이 지나니 아이들도 많이 자라고 이제 좀 개인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짬도 생겨서 로라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서 친구들도 만나곤 한다. 로라는 직장맘이다 보니 주중에는 가족들과 지낼 시간이 없으니 주말은 무조건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아이들의 정서안정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주말은 개인적인 약속이나 일정은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주말에 개인적인 일정이라면 교회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비신자인 남편의 눈치를 봐가며 가야 하기에 마음이 편한 것만도 아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반에는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서기만 해도 남편의 언짢은 듯한 표정이 로라의 뒤통수를 계속 따라다녔다. 하지만 신앙생활도 한 번 다니기 시작하면 맺고 끊는 게 쉽지 않다. 처음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나갔지만 이젠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나가기도 한다. 로라의 신앙생활의 시작은 마음과 같지 않은 자식 키우기로 힘들어할 시기였다. 로라가 다니기 시작하니 하나 둘 아이들도 다니게 되었고, 지금은 둘째가 교회에서 독서활동을 정기적으로 하게 되었다. 신앙생활로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얻기 위해선 얽매임이 필수이다. 귀찮고 놀고 싶어도 시간이 되면 가야 한다. 로라도 정기적으로 다양한 봉사를 하며 신앙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로라가 특히나 삶에서 어려워하는 부분은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탁하는 것이다. 로라는 한 달 전에 옛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고 약속도 주말이 아닌 바쁘지 않은 평일 낮에 연차를 써서 가족에게 피해가 안 가는 시간을 어렵사리 잡았다. 만나면 서로를 이해하고 짓궂은 농담도 웃어넘길 수 있는 편한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만날 날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하지만 만나기 일주일 전 로라는 약속을 취소해야만 했다. 방학중이던 큰 아들이 며칠 전부터 스키장엘 가고 싶다고 노랠불렀고 갈 시간과 여유가 없던 로라와 남편은 아들의 노래가 여간 신경 쓰인 게 아니다. 그러던 일주일 전 남편이 갑자기 돌아오는 주말에 스키장을 가자고 한 거다.
남편이 따져보니 개학도 얼마 안 남았고 방학 중에 갈만 한 날이 그날 밖에 없을 거 같다나. 그러면서 오랜만에 가는 거니 토요일에 가서 월요일에 돌아오자는 거다. 하필 그 월요일이 친구들과의 약속인데 말이다. 로라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친구들과의 약속, 아들의 교회독서 스케줄, 로라의 교회 봉사 스케줄 조정할게 한 두 개가 아닌 데다 각 단체마다 읍소하고 일정 좀 바꿔줍사 하소연을 해야 한다. 로라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자 하기 싫은 일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엄마가 입장이 난처해서 스키장은 못 갈 거 같다고 말하기는 더 싫었다.
또 결혼 후 친구들과 거의 만나지 않는 남편에게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못 간다고 말하기도 미안하고 하기 싫었다. 왜 미안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결혼하고 부모가 되니 나보다는 가족, 자녀들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이것도 사회적 세뇌일 것이다. 약속이 있다고 말하면 남편은 탐탁해하진 않겠지만 또 수긍할 사람이란 것도 안다. 그렇더라도 나 때문에 가족의 일정이 어그러지는 건 로라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일이다.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고 친구들과의 오찬에 나간 들 마음 편히 수다를 떨 수도 없을걸 로라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친구들도 모두 가족이 있는 유부녀들이자 직장맘으로 어렵게 비운 시간임을 알기에 더 미안한 로라였다. 하지만 욕을 먹더라도 이해해 줄 친구들임을 알기에 친구들에게 욕먹는 편을 택했다. 역시나 양자택일의 인생이다.
또한 교회에도 둘째의 독서스케줄을 메워줄 대타를 알아봐야 했고 로라의 봉사스케줄도 사죄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로라는 약간의 신용대신 아들의 소원(?)과 가족의 추억 만들기를 선택했다.
다만 양쪽 모두에게 약간의 거짓말은 필수이다.
친구들과 교회에는 갑자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게 됐다는 것과 가족에겐 나의 개인적인 약속은 애초에 없던 일인 것이다.

로라는 스키장도 싫고 추운 것도 싫지만 자리에 누우며 모두가 평화로운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로라를 위한 방법은 없었다.
로라의 마음은 편했지만 기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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