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는 날

by 슬미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냉기가 찬 사무실에서 회전문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마치 이 세계로 넘어간 듯 숨이 턱 막히는 더위가 맞아주는 초여름의 한 낮이다. 처음엔 덥고 답답한 공기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걷다 보면 따가운 햇살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는 그야말로 찜통더위의 연속이었다. 그날은 독서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서연은 3년째 독서 모임에 나가고 있다.

서연이 독서 모임에 나가게 된 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독서라는 고상한 취미에 대한 자부심과 그걸 뽐내고 싶은 허영심이 한 몫했다. 동네 도서관의 독서 모임을 알아보던 차에 신생 독서 모임이 있어서 그곳에 나가게 된 것이다. 그것이 벌써 3년 차가 되었고 그간 많은 사람들이 모임에 나왔다 안 나오기를 반복했다. 모임의 고정 멤버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도서관에서는 정식 독서 모임으로 등록하기 위해 장을 뽑아 달라 했고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 서연이 리더가 되었다. 서연은 평소 나서서 말을 하거나 모임을 이끌어 본 적이 없기에 부담스러웠지만 독서 모임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으로 하겠다고 한 것이다. 정식 모임이 되고 장이 생기면서 모임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어쩌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당연한 이치인 것과도 같다. 처음엔 리더 이름만 올리면 된다고 해서 올리게 됐지만 리더라는 호칭이 생기면 그때부턴 그에 맞는 할 일들이 하나 둘 생기기 마련이다. 결코 이름만 올라가는 장은 없는 법이다.

모임은 오픈 채팅방을 통해 이루어진다. 회원들이 자신이 본 각종 문화 행사에 대해서 공유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모이는 날과 읽을 책에 대한 공지를 하는 것이 컸다. 서연이 단톡방에 다음 모임 공지 글을 올리고, 모임 당일 확인 차원에서 한 번 더 글을 띄운다. 독서 모임의 회원들이 모임 공지 글에 반응을 해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회원들은 말도 없이 안 나올 때가 있고 그러면 무슨 중요한 일이 생겨서 안 나오나 보다 하게 된다. 그러다 모인 인원이 2명밖에 안 되는 날이 있었고 그 뒤로는 참석 인원이 4명 미만이면 모이지 말기로 간단한 모임의 룰을 정했다. 그 뒤로 서연은 채팅방에 모임 공지 글을 올리면서 참석 여부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참석합니다. 참석 못합니다.’라고 댓글을 달아 주지만 간혹 어떤 댓글도 띄우지 않고 안 나오는 회원들이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모임에 안 나온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채팅방에서 안 나가고 있는 전 회원들도 있다. 서연은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인원 체크를 했고 4명 미만이면 다음으로 모임을 연기하자는 글을 띄우기도 했다. 한 번은 서연까지 3명의 인원이 모이는 날이 되었고 서연은 모임의 룰대로 4명 미만이니 다음에 모이는 게 어떨까요?라고 글을 남겼는데 한 회원이 3명이어도 모이자고 했다. 그녀는 경희였다. 경희는 멋들어진 숏커트에 개성 있는 뿔테 안경을 쓰고 소설의 주인공에 몰입해서 독서를 하기에 소감을 발표할 때도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감정을 듬뿍 담아 표현한다. 그녀의 소감에 가끔은 예술가적 면모가 느껴지곤 한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자신의 이야기를 독특한 발상과 개성 있는 표현으로 모임의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기주장도 강한 편이다.
"이렇게 인원수가 적다고 안 하다 보면 결국에 사라지게 되더라고요. 그냥 모이죠."
서연은 경희의 말도 일리 있고 3명이면 나눌 이야기도 부족하진 않겠다 싶어 그날은 모이게 됐다.

도서관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을 올라가면 있는 숲길 옆에 주택들 사이 고즈넉한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로 야외 테라스까지 구비되어 있다. 테라스에는 꽃이며 나무들이 있어 여름의 생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언덕 위에 세워진 건물답게 테라스 너머 마천루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 들과 어우러져 도심 속의 화원에 앉아 있는 호사스러운 기분까지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도서관이다. 더 더워지기 전에 사서에게 테라스 자리를 부탁해서 한낮의 열기가 날아간 정원에 앉아 책과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또 한 명의 멤버인 희수는 항상 단정한 미소를 띤 채 말을 하기에 그녀를 보면 다들 미소 짓게 된다. 단정한 미소 뒤에 솔직하면서 깊은 사유가 느껴지는 희수의 소감에 감탄할 때도 있다.
"제가 이 책을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서 예전 제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경희는 바쁜 와중에 동네의 유명한 빵집에서 사 온 케이크를 보냉 가방에 정성스레 담아와서 내어주었다. 서연과 희수는 유독 큰 리액션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다들 빵을 한 입씩 베어 물고 책을 폈다. 리더인 서연은 미쳐 책을 다 읽지 못했다며 멋쩍어하며 주뼛주뼛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불안했지만 차즘 이야기 나누다 보니 여유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시간도 있고 각자의 말에 충분히 호응도 하면서 인원이 많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독서 모임이었다. 이렇게 3명은 항상 독서 모임에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고정 멤버에 들어간다. 서연은 3명이지만 오늘 모이길 잘했다고 경희와 희수에게 친근함을 표현했다.

장마라고 하지만 게릴라성 폭우가 간혹 내리는 날을 빼곤 찌는듯한 더위가 지속되던 여름날이었다. 서연은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부터 독서 모임 공지 글을 채팅방에 올렸고 한 달 넘게 모임에 나오지 않던 남성 회원이 참석한다는 반가운 글을 남겼다. 그는 경호이다. 경호는 우연히 와이프와 함께 주말 낮에 도서관에 방문했다 독서 회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이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자들뿐인 독서모임에 가뭄의 단비처럼 색다른 대화의 갈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더 경호의 참여는 달갑게 느껴진다. 서연은 회사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단톡방을 체크했지만 경호 이후로 참석한다는 회원은 없었다. 일이 있어 참석 못한다는 댓글 또한 없었다. 찌는듯한 더위 속에 단톡방은 식어빠진 국처럼 차가웠다. 오후 4시가 돼도 단톡방은 잠잠하기에 서연은 오늘 모임은 참여 인원이 저조하여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떻겠냐는 글을 올렸고 경호도 아쉽지만 그러는 게 좋겠다고 답글을 달아줬다. 서연은 오늘도 책을 다 읽지 못한 상태였다.

오후 7시 14분 단톡방의 알람이 떴다.
“저... 지금.... 도서관....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경희였다.
“바쁜 퇴근길을 뚫고 달려왔는데 이렇게 헛걸음한 게 벌써 3번째네요.” 경희는 실망스러움과 허무함이 가득 담긴 톡을 남겼다.
“아... 어쩌죠? 헛걸음하셔서... TT” 서연은 안타까운 뉘앙스의 톡을 달아줬다.
“바쁘지만 독서 모임에 대한 애착으로 무리하고 왔는데...”
“경희님, 채팅방 한 번 확인해주시지... TT” 서연도 원망스러운 톡을 남겼다.
“오늘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카톡 확인할 시간도 없었어요.”
서연은 헛걸음한 경희가 안타까웠지만 경희는 매번 카톡 확인을 안 하고 헛걸음을 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연은 경희에 대한 미안한 마음보다 원망의 마음이 커져 갔다. 바빠서 단톡방 확인을 못 했다는 건 핑계가 아닐까 하는. 어찌 됐든 경희는 매번 이런 식으로 취소되는 독서 모임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이 너무 컸고 결국엔 그녀를 제외한 다른 회원들은 모임에 대한 열의가 없구나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서연은 본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희에 대한 실망감과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단톡방에 표현하는 경솔함에 그간 쌓아온 그녀에 대한 신뢰까지 깡그리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에효.... 죄송합니다.” 서연은 마지못해 사죄의 글을 남겼지만 미안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경희도 더 이상 답변은 하지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장맛비가 내리더니 아침에는 흩날리다 잠시 그친 듯하다. 머리를 풀어헤친 풍성한 여인의 머리 같은 아카시아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내내 더위에 지쳐있다 다시 활기를 찾은 듯 짙녹색의 잎들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청초한 여인처럼 아름답다. 날씨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서연은 독서 모임하는 날임을 떠올렸다. 서연은 공지 글을 올리기 위해 단톡방에 접속했다. 저절로 경희와 나눈 부스러기처럼 남겨진 대화에 눈길을 주다가 도리질을 하곤 평소와 같이 공지글 올렸다.
"오늘 모이는 날입니다. 참석 가능하신 분 계실까요? "
“참석합니다.”라고 바로 경희가 댓글을 달았다. 미칠 듯 찌는 더위에 지칠 때쯤 선물 같은 비가 내리듯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에 서연의 마음도 비처럼 풀리는 것 같다.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참석이요!" 모임의 또 다른 회원인 소영이다.
오늘은 어쩐지 테라스에서 풍성한 이야기가 기대되는 아침이다.

keyword
이전 11화로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