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의 꿈

by 슬미

길가엔 이름 모를 들풀이 가득하다. 어떤 건 잎이 가늘고 길고, 어떤 건 잎이 둥글고 뭉툭하다.

수많은 들풀 중에 질경이가 있다. 질경이는 이름처럼 자동차가 밟고 지나가도 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다시 붙어서 살아난다. 질경이의 생명은 그렇게 질기다.


나는 기억한다. 고1 꿈에 대해 적는 시간이었다. 뚜렷한 꿈이 없었기에 시인이라고 적었다. 누가 내 꿈 따위에 관심이라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몇 분 뒤 아차 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적은 꿈들을 보더니 "시인?"하고 의아하고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순간 내 얼굴은 홍시처럼 검붉어졌다. 괜히 적었나 생각하는 순간 선생님은 “꿈이 시인이니?” 물어보셨고 ‘그냥 적었어요’라고 말할 수 없기에 그저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오오오” 라며 야유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는 괴성과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저 씩 웃기만 할 뿐이었다. 며칠 뒤 큰 실수를 했구나 절감하고 말았다. 담임 선생님께서 전국 독서감상문 백일장에 나가보라고 하셨고 우리 학교에 글 잘 쓰기로 소문난 혜란이와 내가 대표로 나가게 됐다는 거다. 그 ‘시인’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큰 일을 초래하게 될 줄이야. 혜란이야 백일장만 나가면 금상이던 은상이던 뭐라도 타오는 친구였으니 나가는 게 당연하지만 선생님은 무슨 대책도 없이 그저 꿈이 시인이라는 내 말에 검증도 없이 내보낸단 말인가? 이미 모든 아이들 앞에서 발표하셨기에 ‘저는 못 나가요.’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럼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만 같았기에 나는 또 나지막이 “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나는 원고지 알레르기도 있는데 어떻게 쓰지? 원고지의 빨간 네모 칸 들을 보고 있으면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함과 난감함이 엄습해 오곤 했다. 저 칸 들을 메꿔야 한다는 압박감 말이다. 독후감을 써서 한 번도 상을 받아본 적도 없는데 다들 내 글을 보고 비웃을 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한 손에 까만 반찬 봉지를 들고 만취가 돼서 들어왔다. 우리 딸 하며 나를 안으려고 했지만 달큼한 술냄새에 고기냄새까지 뒤범벅이 된 아버지를 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아버지를 밀쳐냈다. 알코올을 한껏 머금어서 검붉은 얼굴에 번져있던 따뜻한 미소는 어느새 분노에 가득 찬 용광로가 되어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반찬 봉지를 냅다 던져버렸다. 반찬 봉지 안에 들어있던 우엉조림과 콩자반은 집안 사방으로 날아가 온 집안이 짭조름한 간장 냄새와 시커먼 얼룩으로 뒤덮였다.

'아뿔싸'

내가 또 저 지랄 맞은 분노버튼을 눌러버렸구나 싶었다.

그냥 참을걸 하는 마음과 나 또한 아버지에 대해 차곡차곡 쌓아놓은 분노가 터져서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밤새 걸레를 들고 벽과 바닥을 닦는 것이었다. 손이 닿지 않는 천정은 그저 올려다보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무슨 생각으로 시인이라고 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라곤 이렇게 흩뿌려진 반찬의 사체도 다 치우지 못해 한심스러운데 말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헤어날 수 없는 현실에 허우적 댈 뿐인데 말이다. 닦아도 닦이지 않는 간장 자국과 꿉꿉한 간장 냄새에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덕지덕지 쌓여서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방에 곯아떨어져 누워버렸다.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닫았다. 그리곤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 창을 열고 컴컴한 하늘을 바라봤다. 그날따라 유독 밤하늘은 까맣고 별이 드문드문 빛났으며 그렇게 고요할 수 없었다. 하소연할 곳이라곤 까만 하늘 밖에 없었다. 별빛 사이로 가끔 불빛을 반짝이며 비행기가 잔잔한 바다 위를 떠가듯 흘러갔다. 엄마도 일 년 전 저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갔다. 엄마가 꼭 성공해서 돌아오면 돈 많이 벌어서 너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그냥 두 눈 딱 감고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엄마의 눈빛은 단호했고 나는 엄마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요샌 하늘만 보면 빈다. 엄마 빨리 오라고. 부디 저 비행기 안에는 엄마가 타고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미루고 미루다 독후감을 써서 내긴 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입상도 하지 못했고 혜란이는 당당히 금상을 받아서 학교의 명예를 지켜주었다. 조회 시간 단상에 올라가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하는 혜란이 다가갈 수 없는 우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혜란의 목소리는 내 귀에 와닿지 않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희미한 이목구비를 한 혜란은 평소에 말수가 많지 않은 조용한 친구였다. 나는 혜란이와 짧은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키가 컸고 그녀는 키가 작았다. 그 당시 우리는 대단히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고선 삼팔선과 베를린 장벽처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까지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단상 위의 혜란을 보며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나는 혜란이와 대화하지 않았다. 그 뒤로 담임도 나에게 백일장에 나가보란 얘기는 다신 하지 않았고 나의 꿈도 안개처럼 희미해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 혜란을 20년 뒤에 만나게 될 줄 몰랐다.

“혹시 명화여고 나오지 않았어요?” 동네 도서관의 독서 모임에 참여한 날 옆자리의 그녀가 나에게 슬쩍 말을 걸어왔다.

“네… 맞는데……저를 아세요?”라고 물어보는데 그녀가 생각났다. 혜란이었다. 희미한 이목구비에 존재감이 없는 외모였지만 확실히 그녀였다.

“혹시, 혜란이?”

“나 기억하는구나.”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억한다고 했다. 그날 독서감상문 대회에 나간 것도 기억한다고 했다. 혜란은 내 글을 읽었는데 좋았다고 했다. 입상하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어떤 소설의 감상문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그날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혜란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하다가 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일을 안 하니 무료해서 이렇게 독서 모임에 나왔는데 나를 만나서 반갑다고도 했다. 나도 동창을 이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놀랍고 반가웠다. 혜란이는 여전히 책을 좋아했고 가끔 혼자서 글을 쓴다고 했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말이다. 나 보고도 글을 쓰냐고 물어봤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여전히 그녀 앞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혜란은 글을 계속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초여름 저녁의 밤하늘은 유독 맑았다. 푸른 듯 까만 하늘은 부드럽고 까만 융단이 깔린 듯 포근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혜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정확히 뚜렷하지 않다. 자전거를 배우며 비틀비틀거리다 어느 순간 두 바퀴를 굴리게 되는 날이 오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다. 그저 두 손 놓고 쌩쌩 달리는 날이 올까를 상상하며 멋쩍게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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